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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박민규’를 만나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박민규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하는 박민규를 말이다. 18편의 단편으로 박민규를 전부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는 시간 동안 오로지 그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로 쓰여진 단편을 읽는 순간은 그 누군가가 ‘나’라는 착각에 빠져도 좋을 시간이다. 소설을 선물로 받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여하튼 그런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그가 참 괜찮은 작가구나 생각한다. 인간 박민규를 알지 못하니, 소설가 박민규는 그가 쓴 소설로만 평가를 받는다. 수상 이력으로, 인터뷰나 방송에서의 모습을 통해 만난 소설가 박민규가 아니라 그의 소설을 말할 시간이다.
가장 궁금했던 단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바로, 연극으로 공연된 어머니를 위해 쓰여진 소설 <낮잠>이다. 요양원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는 노인의 마음을 다룬 잔잔한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는 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며 살고자 하는 이도 인간이다. 요실금에 걸리고 치매에 걸린 노인들의 일상은 때로 고요하고 때로 요란하다. 기억을 잃은 첫사랑을 보호하고자 혼인신고를 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문득,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향해 살고 있나. 복잡한 마음이 파도를 친다.
쓸쓸하고 고단한 삶을 그린 소설은 또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소설 <누런 강 배 한 척>에서 노년의 삶을 만난다. 치매의 아내가 등장하니 <낮잠>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준 늙은 부부는 함께 삶을 마감하려 한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좋아하는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좋은 곳에서 머문다. 그 끝은 행복할까.
『더블』엔 세 부류의 소설들이 있다. <낮잠>과 <누런 강 배 한 척>, 암에 걸리 40대 남성이 고향에 돌아와 주변을 정리하는 <근처>와 같이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는 목도리나 장갑처럼 온기를 전해주는 단편들과 SF나 판타지 성향이 짙은 <깊>,<끝까지 이럴래?>,<굿모닝 존 웨인>, <크로만, 운>,<슬> 같은 단편이다.
후자의 소설들은 먼 미래의 지구나 인류의 모습에 대한 박민규의 놀라운 상상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암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에서 해방되고 심지어 냉동까지 가능하다. 지구는 통일된 하나의 언어가 공통어가 된다. 언젠가 현실로 닥쳐올 지구 멸망의 불안한 사회상,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은 얼마나 존재할 수 있을까. 깊은 심해와 우주에서의 생존은 상상이 아니라 곧 현실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내가 살 수 없는 미래에 누군가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일상과 상상의 중간쯤이라 해도 좋을 소설들도 있다. 박민규 특유의 재치와 감동까지 선사하는 단편들은 재미 그 이상의 표현이 적절하겠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물체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 <아스피린>, 소박한 꿈이 있기에 힘든 하루 하루를 이겨내는 이벤트 회사 직원이 광고용 비행선을 쫓아가는 <굿바이, 제플린>, 한 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 한순간 몰락하여 생계를 위해 화성까지 날아가 자동차를 파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정말 기발하고 웃긴 설정이지만 절대 즐겁게 웃을 수 없는 건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노랫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박민규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한다. 그의 소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풀면 풀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실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문학상 수상하고 <문학적 자서전>에서 만난 작가로서 숙연한 그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그 한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그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련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 앉고, 보조용 테이블을 끼우고, 노트북을 얹으면 준비는 끝이 난다. 그리고 쓴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의자가 지닌 거부하기 힘든 위력, 때문이다.
이 의자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장애를,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찬 존재임을 - 휠체어는 말없이, 자신의 전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해준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늘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이 되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이 한 줄의 문자이 얼마나 하물며 쓰여지는 것인지를
나의 재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이 의자는 늘, 실질적으로 나에게 충고하고 일러준다. 눈과 귀보다도… 머리보다도 빨리, 몸은 기억하고 습득한다. 나는 머리보다 몸을 믿는 인간이고, 아무튼 이 습관을 통해 많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잇다. 마음가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관건은 시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자서전은 얼어 죽을> 중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