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중된 책읽기를 고치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소설만 읽으려니 말이다. 이번에는 산문이다. 2010년에 읽은 산문집을 살펴보니, 좋았던 책들이 많았다. 내 선택을 받은 5권은 이렇다. 우선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은 최윤필의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멋진 제목이 또 있을까. 부제는 또 어떤가.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좋다라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아, 좋다.  

 ‘흔희들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삶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은 새로운 여행지와 달리 대개는 외롭고 황량하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쳐갈 나그네나 구경꾼이 아니라, 불편한 시선을 무릎쓰고 어떻게든 비집고 껴 앉아야 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세상은 그들이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넉넉한 세상, 지금보다는 휠씬 헐겁고 느슨한 세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p. 313

 박완서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편안한 글이었다. 우리네 엄마, 할머니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까. 전쟁을 겪은 세대의 슬픔을 읽는 그런 시간들이다. 연평도 사태를 보면서 전쟁을 떠올리는 순간, 자꾸 이 책이 생각난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개 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p. 25~26  

『나는 가짜다』는 작가들의 초상화와 글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짧은 글은 작가 각각의 개성이 묻어나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 처음 만난 작가, 궁금했던 작가들을 만나는 시간은 즐겁고 즐겁다. 거기다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까지 만나니, 괜찮은 기획이다. 

 ‘자화상이란 모름지기 이미 존재하는 육체적 외관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윤관 사시에 아슬아슬하게 맺히는,  하나의 긴장에 찬 이미지다. 모든 예술이 그럴 것이다. 외관과 내면 사이, 우연과 필연 사이, 자유와 부자유 사이, 필멸과 불멸 사이를 오락가락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p.163  권여선의 글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 서영은의 진솔한 삶의 여정을 들을 수 있는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산티아고 길에 관한 책이 맞다. 그러나 여행기가 아니다.  종교가 같다면 더 좋을 책이다. 내려놓을수록 버릴수록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삶을 만난다.

  ‘인생의 중요한 결단이란 불시에 찾아들어 남모르게 치러지는 정신적 엑스터시와 같다. 그가 코앞에 있는 수건을 흔든다고 해서, 그 수건이 빨간색인가  하얀색인가 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입술을 꾸욱 다물고 시위를 당긴 방향,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 p 18 

 김도언과의 첫 만남은 박범신의 책에서 그리고  앞서 소개한 나는 가짜다에서 짧은 글로 만났다. 그리고 그의 소설집을 샀다. 소설집보다 먼저 만난 산문집이 바로, 불안의 황홀 이 책을 사랑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같은 날의 내 일기(블로그의 메모나 리뷰)를 찾기도 했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 읽어도 좋다.    

 11월은 소금 같다
 눈동자에 떨어지는 소금처럼,
 긴 황홀이다
 나뭇가지마다 흉터가 열리는,
 11월은
 비늘을 벗은 물고기처럼
 등이 따갑다 - 2005년 10월 30일 일요일 일기 전문   

 김도언이 소금같다고 말한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연평도 주민은 피난민이 되었고, 연말은 불안하게 다가온다. 모두에게 행복한 12월이 되면 좋겠다. 연평도 주민에게 의식주가 해결되면 좋겠고, 흥청망청 송년회가 아닌 조금은 경건하고 나눔이 있는 시간들이면 좋겠다. 12월은 설탕처럼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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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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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규’를 만나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박민규의 실체를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하는 박민규를 말이다. 18편의 단편으로 박민규를 전부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는 시간 동안 오로지 그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로 쓰여진 단편을 읽는 순간은 그 누군가가 ‘나’라는 착각에 빠져도 좋을 시간이다. 소설을 선물로 받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여하튼 그런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그가 참 괜찮은 작가구나 생각한다. 인간 박민규를 알지 못하니, 소설가 박민규는 그가 쓴 소설로만 평가를 받는다. 수상 이력으로, 인터뷰나 방송에서의 모습을 통해 만난 소설가 박민규가 아니라 그의 소설을 말할 시간이다.  

 가장 궁금했던 단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바로, 연극으로 공연된 어머니를 위해 쓰여진 소설 <낮잠>이다. 요양원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는 노인의 마음을 다룬 잔잔한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는 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며 살고자 하는 이도 인간이다. 요실금에 걸리고 치매에 걸린 노인들의 일상은 때로 고요하고 때로 요란하다. 기억을 잃은 첫사랑을 보호하고자 혼인신고를 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될까. 문득,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향해 살고 있나. 복잡한 마음이 파도를 친다.  

 쓸쓸하고 고단한 삶을 그린 소설은 또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소설 <누런 강 배 한 척>에서 노년의 삶을 만난다. 치매의 아내가 등장하니 <낮잠>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준 늙은 부부는 함께 삶을 마감하려 한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좋아하는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좋은 곳에서 머문다. 그 끝은 행복할까.  

『더블』엔 세 부류의 소설들이 있다. <낮잠>과 <누런 강 배 한 척>, 암에 걸리 40대 남성이 고향에 돌아와 주변을 정리하는 <근처>와 같이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는 목도리나 장갑처럼 온기를 전해주는 단편들과 SF나 판타지 성향이 짙은 <깊>,<끝까지 이럴래?>,<굿모닝 존 웨인>, <크로만, 운>,<슬> 같은 단편이다.  

 후자의 소설들은 먼 미래의 지구나 인류의 모습에 대한 박민규의 놀라운 상상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암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에서 해방되고 심지어 냉동까지 가능하다. 지구는 통일된 하나의 언어가 공통어가 된다. 언젠가 현실로 닥쳐올 지구 멸망의 불안한 사회상,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은 얼마나 존재할 수 있을까. 은 심해와 우주에서의 생존은 상상이 아니라 곧 현실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내가 살 수 없는 미래에 누군가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일상과 상상의 중간쯤이라 해도 좋을 소설들도 있다. 박민규 특유의 재치와 감동까지 선사하는 단편들은 재미 그 이상의 표현이 적절하겠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떠다니는 비행물체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 <아스피린>, 소박한 꿈이 있기에 힘든 하루 하루를 이겨내는 이벤트 회사 직원이 광고용 비행선을 쫓아가는 <굿바이, 제플린>,  한 때 잘나가던 세일즈맨이 한순간 몰락하여 생계를 위해 화성까지 날아가 자동차를 파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정말 기발하고 웃긴 설정이지만 절대 즐겁게 웃을 수 없는 건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노랫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박민규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한다. 그의 소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 풀면 풀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실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문학상 수상하고 <문학적 자서전>에서 만난 작가로서 숙연한 그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그 한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그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련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글을 쓴다. 앉고, 보조용 테이블을 끼우고, 노트북을 얹으면 준비는 끝이 난다. 그리고 쓴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의자가 지닌 거부하기 힘든 위력, 때문이다. 

 이 의자에는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장애를,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찬 존재임을 - 휠체어는 말없이, 자신의 전부를 통해 나에게 전달해준다.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늘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이 되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이 한 줄의 문자이 얼마나 하물며 쓰여지는 것인지를 

 나의 재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이 의자는 늘, 실질적으로 나에게 충고하고 일러준다. 눈과 귀보다도
… 머리보다도 빨리, 몸은 기억하고 습득한다. 나는 머리보다 몸을 믿는 인간이고, 아무튼 이 습관을 통해 많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잇다. 마음가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관건은 시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자서전은 얼어 죽을> 중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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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창비와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을 선보였다. 창비에서는 나라별로 작가의 단편들을 모아 엮었고 문학동네에서는 장편을 선택했다. 창비 10권 중에서 영국, 러시아를 만났고, 프랑스와 중국의 단편을 하나씩 골라 읽고 있다. 문학동네 시리즈 중에서는 헤르타 뮐러, 스탕달, 오에 겐자브로만 읽었다. 발자크의 나귀가족은 아지 읽지 못했다.  해서, 특히 올해는 다양한 외국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 중에 선택한 5권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없겠다. 내겐 좀 더 폭넓은 책읽기가 필요하다.  
 
 여하튼 내가 선택한 5권은 이렇다. 읽어내기가 힘든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이 책을 시작으로 그녀의 책을 두 권 더 읽었다. 내게는 모두 어려웠다. 전쟁으로 붕괴된 삶은 세대를 고통을 안겨준다. 엊그제 연평도 사건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고픈 천사가 나를 저울에 올릴 때 나는 그의 저울을 속일 것이다. 
 아껴둔 빵처럼 나는 가벼워지리라.
 그리고 아껴둔 빵처럼 씹기 어려워지리라. 두고 봐,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간단한 계획이지만 오래 버틸테니까. ’p 251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에서 만난 단편들, 같은 제목으로 펭귄시리즈도 만나볼 생각이다.  가장 최근에 만난 바진의 『차가운 밤』이다. 자욱한 안개가 떠나지 않았던 소설이다. 역시나 전쟁이 배경이다. 아름다운 문장은 쓸쓸하고 안타깝고 슬펐다.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수면에는 새하얀 안개가 가로놓여 있었으나, 그녀는 안개가 언제부터 짙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안개가 짙게 스며왔다. 질식시킬 듯한, 가슴을 채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밤중에도 흰빛을 내며 강 언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p. 150 


 

 

 

 

 

 

 

 

 

 

 

 

 

 

 

 

 

    

 

  매혹적인 표지로 시선을 사로잡는 두 권의 책.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마이클 온다치의잉글리시 페이션트』. 어젯밤은 단편집이고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장편이다. 어젯밤은 신선하고 기발했다. 제임스 설터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도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놨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 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p 99 

 마지막 잉글리시 페이션트도  중심에 전쟁이 있다. 이런, 어찌하다 보니 세계 문학은 전쟁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슬픔과 고통은 이렇게 다시 문학으로 피어나 우리 곁에 있었다

 
‘이제는 식사 시간에 그녀와 다시 이야기하고 그들이 천막 안에서나 영국인 환자의 방에서 가장 친밀감을 느꼈던 그 단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요동치는 강같은 공간을 포함하고 있었던 두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를 회상하자 그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던 것만큼 자기 자신에게 매료되었다. 소년답고 진지한 사람. 나긋나긋한 팔은 그가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를 향해 허공으로 뻗는다. 젖은 장화는 끈을 한데 묶어 이탈리아의 문가 옆에 서 있다. 그의 팔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침대 위에는 엎드린 인물 형상이 있다.’ p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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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여기 저기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 열심히 투표를 하다가, 가만 생각했다. 내 맘대로 정하는 2010년 최고의 소설을 말이다. 문학에서 시작하여 인문까지 골라도 좋다. 우선 5권의 소설이다. 제목처럼 내 맘대로 정하는 소설이다.(순전히 내 개인적인 취향이다).  한국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었으면 좋겠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사실 불편하고 읽기 힘든 소설이다. 해서, 어떤 이는 피하고 싶은 소설이다. 신춘문예 등단 소설인 '열 세 살'이나 '엄마들' 부터 그녀의 소설은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여성의 삶을 다루는 그녀의 소설, 그 인물들이 행복해질 날이 언제 올까, 문득 궁금해진다. 곤궁하고 치욕스런 삶이 아닌, 조금은 평범한 일상을 다룬 소설도 기대해 본다.   

 암에 걸린 것도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나는 그저 무수한 암 환자 중에서 한 명일 뿐이었다. p.105 

 황정은의 白의 그림자는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오늘 수상 발표가 났다.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 소식은 그녀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단편집에서 느꼈던 환상과 상상의 세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여전히 리뷰는 쓰지 못했다. 아, 맑고 투명한  소설, 다시 한 번 더 읽으면 과연 리뷰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 음식이 먹고 싶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 p. 147

 

 

 

  

 

 

 

 

 

 

  

 

 

 

 

 

 

 

  

 

 올 여름 나는 심하게 아팠다. 병실에서 읽은 윤대녕의 대설주의보 보리밭에 가고 싶었던 소설이다. 연두빛 고운 보리 사이를 걷고 싶었던 소설들. 봄을 떠올리는 소설이다. 최근에 만난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엔 그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역시나 리뷰를 올리지 못했다.   

 청명에 내가 보리 같은 여자를 만났군. p.27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아름답고 촘촘한 문장들이었다. 하나의 문장을 단단한 문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을 다듬고 다듬었을까. 나에게서 나온 나의 문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푸른른 틈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모두 색이 들어있다. (제목이 작가의 의지로 탄생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다음엔 갈색이나, 보라가 들어가면 좋겠다.   

 찻잔이나 술잔, 밥공기 같은 것이 결코 화분이 될 수 없던 시절에도, 한쪽 모서리가 기운 사다리꼴의 그 방은 내게 충분히 훌륭한 화분이었다. p.117 

 강영숙의 라이팅 클럽이다. 얼마전 하성란의 책을 삼킨 TV에 그녀가 출연했다. 방송이 끝날 무렵 시청했기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그는 쓰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글을 쓰면서 더 행복해져야 하는데 작가의 삶은 점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써야 한다면, 죽을 각오로 쓰라는 말이리라.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글쓰기를 다룬 소설이라 더 의미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낭독한 부분은 이렇다.  

 글쓰기 모드의 필요조건이라는 게 있을까. 금방 색각나는 건 일단 날씨가 너무 더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나 보리 파스테르나크가닥터 지바고 유리 지바고를 상상해보면 좋겠다. 날씨와 소설은 누가 뭐래도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고 너무 배가 불러도 안 되고 너무 배가 고파도 안 된다. 배가 부르면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배가 고프면 꼬르륵거리는 소리 때문에 글 쓰는 데 집중을 못 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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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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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작가는 모옌, 차오원쉬엔, 위화, 쑤퉁 정도가 전부이니 고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세계문학의 숲’이란 이름으로 시공사의 세계문학 시리즈  출판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처음 마주한 책이 바로 중국 거장 바진의 <차가운 밤>이다.  매혹적인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여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여인을 상상한다.  

 자욱한 안개 속에 여자와 남자가 있다. 그들은 속히 안개가 걷히길 바라고 안개 속에서 나오려 한다. 그러나 안개는 점점 짙어지고 서로의 모습조차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안개속의 두 남녀는 항일전쟁을 견뎌내는 수많은 중국인인과 동시에 바로 소설의 주인공 원시안과 수성이다. 끝을 예상할 수 없는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피폐해지고 지쳐간다. 1940년대 중국엔 종전에 대한 희망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삶이 계속된다. 

 주인공 원시안과 수성은 결혼 14년차 부부다. 젊은 시절 함께 공부하고 사랑을 나누고 교육 사업까지 했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의 삶을 뒤바뀌어 놓았다.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서서히 붕괴되는 한 가정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신지식인으로 뜨거운 열정을 맘껏 펼치며 살았을 것이다. 원시안은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고 수성은 은행에 다닌다. 우유부단하며 소심한 성격으로 묘사된 윈시안은 직장 동료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으로 힘들어 한다. 그에 반해 자유로운 수성은 직장 상사와 차를 마시고 무도회를 가며 전쟁이라는 상황을 잊으려 한다. 

 지금 지식인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예요.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는 것은 아편이나 쌀을 매점매석해서 돈 번 사람이나 할 수 있어요.” p.105

 윈시안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잘 드러난 문장이다. 1940년대 지식인들은 이처럼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수성과 어머니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윈시안은 병에 걸린다. 수성은 발령을 핑계로 광저우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는 아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병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책하며 아내를 보내기로 한다. 아내 역시 남편을 사랑하지만 시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고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싶어한다. 게다가 자신을 향해 구애하는 남자까지 있다. 수성은 결정을 번복하며 고민하지만 그녀는 그가 아닌 상사를 선택한다. 아무도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 풍족한 삶을 선택하지 않을 이 누구인가.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수면에는 새하얀 안개가 가로놓여 있었으나, 그녀는 안개가 언제부터 짙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안개가 짙게 스며왔다. 질식시킬 듯한, 가슴을 채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밤중에도 흰빛을 내며 강 언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p. 150

 그는 이름을 부르며 쫓아갔다. 자동차는 쏜살같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고, 그는 따라갈 수가 없어서 멈추어 서서 기침을 토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에는 보름달 같은 전등이 외롭게 인도를 비추고 있었다. p.239

 <차가운 밤>을 읽는 내내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가 떠올랐다. 수성과 매혹적인 표지 때문이다. 1940년대 중국은 제목처럼 <차가운 밤>이었고 그들에겐 온기가 필요했다. 소설은 여타의 전쟁소설과는 좀 다르게 다가온다. 긴급 경계경보가 울리는 긴박감, 예고 없이 찾아오는 정전이 반복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덜하다. 격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정의 생활을 관찰하며 그들의 내밀한 심리 변화를 통해 전쟁이 모든 것을 상실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이 묘사한 전쟁에 대한 공포는 안개와 같았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안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어떤 희망 말이다. 시나브로 시야를 가리는 안개처럼 전쟁은 일상과 영혼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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