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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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이 진행중이거나 사랑이 끝났음에도 그 사랑의 그늘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객관성을 잃는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아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사랑이 끝난 뒤에 그 사랑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된 관찰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아닌 타인의 사랑에 대해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함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백처럼 말이다. 그 고백이 쓰디 든 답장으로 돌아온다면 짝사랑으로 분류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표현과 소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단점이나 결점은 그 사랑이 커지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 그 과정에서 결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어떤 경우는 그것으로 인해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그것은 소통의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사랑한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인 『너를 사랑한다는 건』은 결국 소통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 아니, 알랭드 보통이 스물 셋에 썼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이자 에세이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 논한다고 해야겠다. 소설은 흥미롭다. 스물 셋의 청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를 생각할 때 그는 아주 생각이 많은 청년이었겠구나 싶다. 소설 속 ‘나’가 사랑한 이사벨의 이미지는 내게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물론, 내가 그 시절과 아주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해온 사랑은 우리 욕구의 진화 과정을 드러낸다.’ p. 170

 서로 다른 환경의 두 사람은 단순한 호감이나 첫 느낌에 반해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느낌은 누구는 웃는 모습에, 누구는 커피를 든 손가락의 형태에, 누구는 목소리에, 누구는 입고 있는 옷 색깔처럼 다양할 것이다. 관계는 만남의 횟수나 대화의 양에 따라 확장된다. 중요한 건 대화의 소재가 무엇이냐에 따른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듯 보편적으로 어린시절, 집안, 가족, 과거의 연인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뤄질 것이다. 피상적인 대화가 아닌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재되기 시작한다. 친밀감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 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p. 328~ 329

 경험자들은 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얕은 판단인지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다.  나와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말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과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다는 건,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계속되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어쩜 그건 모든 관계에 해당되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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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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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읽기 힘들다. 가장 최근에 만난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비롯하여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대표적이다. 해서, 페루 태생의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엔 기대와 동시에 두려움이 있었다. 염소의 축제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과 첫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염소의 축제』는 열네 살에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난 후 35년 동안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산 주인공 우라니아가 병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고향에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우라니아가 들려주는 1996년 현재 시선과 독재자 트루히요가 정권을 잡던 과거 시절, 그리고 그를 암살을 시행하던 날(1961년 5월 30일)의 시선으로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우라니아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친척에게 들려주고, 나머지 두 개의 시선은 과거에 머무르는 무척 흥미로운 흐름이다. 

소설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 개의 이야기는 모두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과연 서사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주인공 우라니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궁금증이 제일 크다. 트루히요 측근으로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독재자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그로 인해 우라니아가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진실은 사라지고 아부와 아첨이 가득했던 시절, 언제 독재자의 눈 밖에 날까 두려운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허수아비 대통령을 내 세우고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를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또한 트루히요를 제거하는 거사를 완벽하게 해냈지만, 그들이 원하던 세상으로 변화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리라. 수 십년 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체제가 하루 아침에 달라질 리 없었다. 1인자가 죽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여전했고 사람들에게 공포는 습관처럼 존재했다. 암살자가 되버린 그들은 숨겨주고 보호해 줄리 만무했다. 그들은 살고 싶었으니까. 순간의 선택의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올 수 있는 시대였다.   

 “주요 음모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는 스스로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트루히요의 시체는 거기에 있었지만, 트루히요는 계속 그들 안에 살아 있었던 것이지요.” p. 377 - 2권  바르가스 요사의 인터뷰 중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쓰여졌기에 서사는 탄탄했다. 염소로 불리던 트루히요가 벌이는 축제에 대한 묘사는 생생했다. 헤서, 더 잔혹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오만과 성에 대한 혐오스러운 집착은 너무도 끔찍했다. 우라니아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일흔의 독재자가 열네 살 소녀를 범하는 장면은 차마 읽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랬다. 독재자가 가진 힘은 그토록 강했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역사속 잔인한 독재자들의 이름이 떠오른건 자명한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자체가 중요했다. 우라니아가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이유도 그러하리라.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했고, 공부해야 했고, 아버지와 고향, 조국을 잊어야만 했다. 그러나 잊혀질리 없었다. 35년이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자신을 남에게 맡긴 채 눈만 뜨고 살아남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독재자에게 딸을 바친 아버지를 그만 용서하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과거는 잊고 현재의 성공한 삶을 누리며 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 있게 말하지만, 날 부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오히려 난 너희들이 부러워.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고모와 너희들도 문제가 있고, 힘든 시기를 보냈고, 실망하고 절망하기도 했어. 그러나 가족이 있고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친척도 있고 조국도 있어. 그런 게 바로 인생이겠지. 하지만 아빠와 총통은 나를 볼모지로 만들었어.” p. 365 - 2권 

 우라니아에게 사촌들과 고모가 누렸던 인생은 없었던 것이다. 한 여자의 인생은 열네 살에 머물러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라니아는 도미니카 공화국를 비롯한 독재 정치의 희생양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타의 인물들과 배경, 역사적 기록들과는 다르게 우라니아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권력의 횡포의 대상은 언제나 약자와 여성이었다는 것을. 잔혹한 축제는 도미니카 공화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여전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이 높이 평가받는 점은 아마도 그런 점이 아닐까 한다. 그곳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꺼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의 뚜껑을 과감하게 열어버린 것이다. 해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고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상황과 위치에 따라 사람들은 변화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독재자가 사라지고 발라게르 대통령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안정을 되찾아가는 과정과 조금씩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의 모습을 통해 위정자들과 권력의 집행자들이 무언가 느끼기를 바란다.   

 이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나처럼 도미니카 공화국 를 검색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의 그 도미니카 공화국이 분명한데, 전혀 다른 느낌이다. 카리브해 이스파니올라섬의 동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한때 트루히요 시로 불리었던 우라니아의 고향 ‘산토 도밍고’에 더이상 어떤 식으로든 염소의 축제는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회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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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 사태 - 김도언 소설집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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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가와 소설의 주인공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한데 말이다. 소설가와 주인공의 동성이거나 같은 연령대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소설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뿐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 역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해서, 자전소설이나 산문집을 통해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리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신경숙의 『외딴방』이 그 예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랑의 사태』를 읽으면서 작가 김도언이 아니라 ‘그 남자 김도언’을 읽는 듯했다. 이건『불안의 황홀』의 여파인지 모른다.  

 『불안의 황홀』에서 만난 김도언은 밝음 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가볍지 않고 무거운, 투명하기 보다는 불투명에 속해있었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기 전 어떤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데,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나 <악취미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랑의 사태>는 내게 평이했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단편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그건 곧 드러낼 냉소이며 광기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 말은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란 말이다.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 연보>,<백하동 가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권태주의자>와 <랑의 사태>,<다큐멘터리 가족극장>,<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다크블루, 시간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화자는 소설가이거나, 출판사의 편집장, 시인, 시를 읽거나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권태주의자>와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설 속 인물이나 배경이 같은 <권태주의자>나 <랑의 사태>는 마치 연작소설으로 읽힌다. <권태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권태로운 삶을 사는 이야기다. 뚜렷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그러나 한 편으로 보면 무언가에 집착하듯 보인다. 소설엔 화자가 벤자민 나무와 대화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벤자민 나무의 답에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 118  

 벤자민 나무도 화자처럼 권태주의자였던 거다.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이라니.누군가는 지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자 탁구장 주인인 화자 삼촌이나 화자는 모두 권태주의자답게 살고 있다. <랑의 사태>는 랑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도서관에서 삼촌의 시집을 읽고 있는 랑을 만난다. 랑은 모텔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랑에게 부모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녀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면 살아낼 수 없는 여자다. 화자는 기꺼이 랑의 환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삶, 때때로 누구나 바라는 권태로운 삶이 아닐까.

 <다큐멘터리 가족극장>,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저버린 큰 형과 쌍둥이 형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에서는 평소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을 빌어 우리 생에 가져야 할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안과 밖을 나누면서 모두들 따뜻한 내부를 갖기를 원한단다. 우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것이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까다롭고 사나운 바깥 같구나.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어려워. 어떻게 저 밖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p. 203~ 204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삶은 무엇일까. 한 가족의 가장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온 삶 속에 이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을 꺼라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생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단할까.  이는 서른 아홉의 출판사 편집자인 화자가 열두 살 아래의 그림작가를 사랑하는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은퇴를 앞둔 야구 선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인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에서도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소통에 대해 말이다. 

 9편의 소설에서 김도언은 이런 삶을 지향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소설들은 하나의 특정한 에피소드를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존재의 이유처럼 다소 철학적인 것들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일들 말이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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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특별판)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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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하다’란 말이 어울리던 시절은 이미 내게서 사라졌다. 그 무모함 속에 담겼던 열정,도전도 함께 말이다. 그러니까, 7번 국도 위에 있었던 시절은 기억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시절 뜨겁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차갑거나 미지근한 쪽에 속하지 않았다. 20대였고 삶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나름대로의 변명으로 내 삶을 자위한다. 잘 살고 있는지, 잘 살아왔는지 마음이 복잡할 때, 새로운 7번 국도의 문장이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선다.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여행하는 젊은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이 왠지 안쓰럽다.  7번 국도를 함께 품었던 화자인 나와 재현,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세희가 품었던 갈망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새로운 소설로 쓰여졌듯 7번 국도는 이제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건 소설 속 화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하니1997년 7번 국도를 읽고 그 길 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닐 것이다.  

 화자인 나는 어엿한 작가로 학생들과 문학기행을 떠나고 깨질 듯 불안했던 세희는 아이 엄마가 되어 살아간다. 혼자 외롭고 상처받았다 생각했던 시간들을 잘 견뎌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잊은 건 절대 아니다. 상처받고 상처주고 울고 웃었던,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었던 순간들이 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날 내가 사랑했던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도 살아 있을까.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p.187 

 때로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겨도 좋은 게 생이 아닐까.  소설에서나 소설 밖 우리 생에서 필요한 건 이런 문장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자신이 숨을 쉰다는 사실에만 집중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들숨에 집중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날숨에 집중해서 숨을 내쉰다. 천천히, 다시 들숨에 집중하고 날숨에 집중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 생각들은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어떤 생각들은 오랫동안 떠올라 마음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럴 때면 격랑이 몰아치는 강가에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듯이 그 생각들을 바라본다. 중요한 건 생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이다. p. 192

 7번 국도에서도 그랬듯 소설엔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투명물고기의 <저물다>를 들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해도 반드시 저물듯, 투쟁하는 삶도 열병처럼 사랑했던 순간도 언젠가는 저물고 만다. 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곧 과거로 사라지니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면 된다. 작가 스스로도 뜨겁던 청춘을 지나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말이 정답은 아닐런지. 삶은 우야든둥 지금 여게 있는 거지, 어데 멀리 있는 게 아닌 기라예. p. 96 

 김연수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처음부터 소설을 새로이 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13년이란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13년이란 시간의 흐름에 세상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삶 자체도 변하니까. 그래도 2010년 다시 만나는7번 국도 Revisited는 누군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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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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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이 전부였던 때가 있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려도 아픈 건 똑같으니,사랑을 모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를 버리고 사랑을 택한 삶은 영원히 행복할까. 영원한 사랑은 없을지 모르나 사랑이란 게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는 건 맞다.  여기 그런 생을 산 두 여자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한 사람을 사랑했다. 천샹과 예러우가 사랑한 남자는 시인 망허였다.  
 
 시인를 사랑한 여자 - 천샹 
 중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 소녀 천샹은 망허와의 단 한번의 만남이 다였다. 그 만남으로 시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대학 선배와 결혼한다. 시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 하지 않아도 순간의 기억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망허의 새 시집에 실린 사진을 보고 자신이 사랑한 망허가 가짜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절망은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멍허의 아이가 아닌 아들 역시 그녀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던 남편과 이혼을 한다. 

 시인이 사랑한 여자 - 예러우 
 예러우와 망허는 첫 눈에 운명을 느꼈다. 논문을 쓰기 위래 지방을 다니며 현지답사를 하는 예러우 앞에 나타난 시인 망허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유랑의 길에 나선 길이었다. 하룻밤의 사랑만 남기고 예러우는 자신의 길로 떠났고 망허는 그녀의 찾아 떠난다. 재회의 순간, 말 그대로 길 위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본 것이다.  망허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추스리려 홀로 떠났지만 결국 둘은 하나가 되기로 한다.  

 둘은 중국의 여러 마을을 함께 다닌다. 끝도 없는 길을 걷고 걸어서 도착한 마을들은 1980년대 중국이 그러했듯 가난했고 순수했다. 낯선 타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내주고 서슴없이 자신들의 삶을 들려주었다. 예러우와 망허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통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장윈은 그들의 힘든 여정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어쩌면 그것은 연인과 함께했기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모든 나무와 꽃들은 얼마나 눈부셨겠는가.

 ‘낭창낭창 늘어진 물버들이 여기저기서 수풀을 이루어 멀리서 보면 보랏빛, 초록빛, 담황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그건 분명 남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버들가지마다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나 있었다. 당버들은 북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교목이었지만, 이곳의 당버들은 유난히 깨끗하고 힘 있게 뻗어 있었다. 연녹색 잎사귀에 통통하게 물이 오르고, 줄기는 자작나무의 그것처럼 희고 깨끗했다.’ p. 158  
 
 그러나, 자궁 외 임신으로 예러우는 망허의 곁을 영영 떠나버린다. 예러우를 잃고 망허는 그만의 길을 떠난다. 길 위에 남겨진 사랑은 그들을 기억할까.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산촌의 소학교의 교장인 천샹은 학교를 후원하는 건축 회사의 사장인 망허와 마주한다. 천샹의 대접으로 마을의 토굴에서 하루를 보내며 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제가 예전에 시인이었답니다.” 
  “그러시군요. 저도 예전에 시를 좋아했었죠.” 
  “그런데 전 시인이었지만, 한 번도 시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사실 시는 참 잔인한 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제게 물으시는 건가요?” 
  “네.” 
  “원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잔인하죠”. p. 271~ 272 

 그들의 시라 부르며 말한 그것은 사랑이었고 삶이었다. 잔인하고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들. 책을 다 읽고 나니 박용재의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란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정말 그랬다. 예러우와 천샹은 망허를 사랑한 만큼 살았던 것이다. 천샹에게 시인 망허는 삶 그 이상이었다. 예러우는 어떠한가. 망허와의 만남에서 그와의 운명적 사랑을 예감한 그녀는 그 결말이 불행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랑을 놓지 못했다. 잔인한 시를 닮은 그들의 사랑이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 박용재의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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