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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특별판)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무모하다’란 말이 어울리던 시절은 이미 내게서 사라졌다. 그 무모함 속에 담겼던 열정,도전도 함께 말이다. 그러니까, 7번 국도 위에 있었던 시절은 기억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시절 뜨겁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차갑거나 미지근한 쪽에 속하지 않았다. 20대였고 삶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마흔을 앞둔 지금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나름대로의 변명으로 내 삶을 자위한다. 잘 살고 있는지, 잘 살아왔는지 마음이 복잡할 때, 새로운 7번 국도의 문장이 이끄는 대로 길을 나선다.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여행하는 젊은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이 왠지 안쓰럽다. 7번 국도를 함께 품었던 화자인 나와 재현,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세희가 품었던 갈망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새로운 소설로 쓰여졌듯 7번 국도는 이제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건 소설 속 화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하니1997년 7번 국도를 읽고 그 길 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닐 것이다.
화자인 나는 어엿한 작가로 학생들과 문학기행을 떠나고 깨질 듯 불안했던 세희는 아이 엄마가 되어 살아간다. 혼자 외롭고 상처받았다 생각했던 시간들을 잘 견뎌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을 잊은 건 절대 아니다. 상처받고 상처주고 울고 웃었던, 모든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었던 순간들이 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날 내가 사랑했던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도 살아 있을까.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기억의 달인이 되어, 사소한 것들도 빼놓지 않고, 어제의 일인 것처럼 늘 신선하게,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도 그 기억들이 남을 수 있도록, 이 세계 곳곳에 그 기억들을 숨겨두는 일.’ p.187
때로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겨도 좋은 게 생이 아닐까. 소설에서나 소설 밖 우리 생에서 필요한 건 이런 문장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자신이 숨을 쉰다는 사실에만 집중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들숨에 집중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날숨에 집중해서 숨을 내쉰다. 천천히, 다시 들숨에 집중하고 날숨에 집중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다. 생각들은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어떤 생각들은 오랫동안 떠올라 마음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럴 때면 격랑이 몰아치는 강가에 앉아서 강물을 바라보듯이 그 생각들을 바라본다. 중요한 건 생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이다.’ p. 192
7번 국도에서도 그랬듯 소설엔 노래 가사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투명물고기의 <저물다>를 들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해도 반드시 저물듯, 투쟁하는 삶도 열병처럼 사랑했던 순간도 언젠가는 저물고 만다. 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곧 과거로 사라지니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면 된다. 작가 스스로도 뜨겁던 청춘을 지나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말이 정답은 아닐런지. ‘삶은 우야든둥 지금 여게 있는 거지, 어데 멀리 있는 게 아닌 기라예.’ p. 96
김연수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처음부터 소설을 새로이 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13년이란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13년이란 시간의 흐름에 세상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삶 자체도 변하니까. 그래도 2010년 다시 만나는『7번 국도 Revisited』는 누군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