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이 진행중이거나 사랑이 끝났음에도 그 사랑의 그늘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 객관성을 잃는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랑은 아주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사랑이 끝난 뒤에 그 사랑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마나 다행이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된 관찰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내가 아닌 타인의 사랑에 대해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함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백처럼 말이다. 그 고백이 쓰디 든 답장으로 돌아온다면 짝사랑으로 분류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표현과 소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단점이나 결점은 그 사랑이 커지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 그 과정에서 결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어떤 경우는 그것으로 인해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그것은 소통의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남자가 사랑한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인 『너를 사랑한다는 건』은 결국 소통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 아니, 알랭드 보통이 스물 셋에 썼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기 형식을 띈 소설이자 에세이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 논한다고 해야겠다. 소설은 흥미롭다. 스물 셋의 청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스물 셋이라는 나이를 생각할 때 그는 아주 생각이 많은 청년이었겠구나 싶다. 소설 속 ‘나’가 사랑한 이사벨의 이미지는 내게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물론, 내가 그 시절과 아주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해온 사랑은 우리 욕구의 진화 과정을 드러낸다.’ p. 170

 서로 다른 환경의 두 사람은 단순한 호감이나 첫 느낌에 반해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느낌은 누구는 웃는 모습에, 누구는 커피를 든 손가락의 형태에, 누구는 목소리에, 누구는 입고 있는 옷 색깔처럼 다양할 것이다. 관계는 만남의 횟수나 대화의 양에 따라 확장된다. 중요한 건 대화의 소재가 무엇이냐에 따른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듯 보편적으로 어린시절, 집안, 가족, 과거의 연인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뤄질 것이다. 피상적인 대화가 아닌 깊이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구하고 끌어내는 정보의 양은 절정에 이른다. 점심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 동료, 일, 유년, 삶의 철학, 사랑의 역사 등의 주제를 탐사한다. 그러나 관계가 진전되면 불행한 상황이 전재되기 시작한다. 친밀감이 점점 심오해지는 주제에 관한 더 긴 대화의 촉매가 되기는 커녕, 외려 정반대의 시나리오를 펼쳐놓는다.’ p. 328~ 329

 경험자들은 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누군가를 안다고 하는 믿음이 얼마나 얕은 판단인지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다.  나와 당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 말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과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다는 건,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계속되고 지속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어쩜 그건 모든 관계에 해당되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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