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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남자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다. 양육되고 조금씩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지 않은가. ‘나’는 어디서 와서 이 세상에 ‘나’라는 이로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정답도 없거니와 존재라는 명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생이라는 굴레는 그 질문 외에도 답을 찾아야 할 것이 많으니까. 만약, 존재에만 올인 할 수 있다면 답 근처에 다가갈 수 있을까?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의 화자처럼 말이다.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우울하고 권태로운 남자에게 친척이 남긴 유산은 그를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지겹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겼으니 그에게 남은 건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다. 작고 낡은 호텔을 떠나 자신만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가정부를 두고 홀가분한 생활을 시작한다. 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거리를 거닐며 주변 인물들을 (자신을 경계하는 수위, 지정 자리를 내어주며 부러워하는 식당 종업원, 개를 기르는 이웃 여자)관찰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되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니 그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일상이라도 혼자 깨어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일은 고독하다. 거기다 건물은 무너지고, 폭동이 일어나고,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고, 독재는 이어지는 세상까지 그가 불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끔찍한 세상을 흉보고 비판하고 술잔을 나눌 누군가를 원하지만 그는 찾지 못한다. 물론 그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화를 설치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번호가 알려지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지만 병원을 추천받는 일로 끝난다.
다른 시도로 단골 식당 여 종업원과 동거를 한다. 사랑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이별로 이어진다. 그를 불안과 그의 환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그는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절대 외롭거나 불쌍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우주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였다. 평범한 삶이 그에게는 너무도 무겁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며, 단단하고 투박하면서도 한없이 허약한 듯한 이 느낌이 야릇하다. 이 세계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만 허점이 있어도 모든 것이 수천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내 몸이 조화의 눈부신 잎사귀의 일부라 생각되자 무(無)에 대한 구토가 일어난다. 그리고 충만에 대한 구토.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얼마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오직 순간만 있으리라.’ 89쪽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이 세계는 용해될 수 없는 실재이거나, 아니면 절대적 실재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실재를 감추고 있는 단순한 커튼일지도. 동시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십억 개의 이미지와 목소리, 이런 모든 것은 부동의 근본적인 토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추측일 뿐. 이런 토대가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했다’ 107쪽
그가 예전과 같이 직장에 다니고 그들과 어울렸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그에게는 존재에 대한 갈증이 있었을 것이다. 육체적 욕망을 채우고, 계절이 바뀌고, 이념이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그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그 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죽음이었다.
‘사다리가 빛났다. 정원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고, 나는 그 일부가 되어 그 한복판에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아니면 몇 초가 흘렀다. 사다리가 내게 다가왔다. 거의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여러 해가, 아니면 몇 초가 흘러다. 그것이 멀어져 녹듯이 사라졌다. 사다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덤불이, 나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선문과 함께 기둥들이 나에게 깊이 스며들었던 그 빛의 무엇인가는 남았다. 나는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155~156쪽
쓸쓸하고 어두운 소설이지만 선명한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인물의 이름이나 사회적 지위, 직책을 언급하면서도 말이다. 화자를 비롯해 우리 인간이 우주의 작은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는 듯하다. 버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시간마다 시시콜콜 일과를 사진과 140자의 글자에 담아 세상에 내 놓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로 살고 있지만 다른 나를 갈망하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나와 같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가. 누구도 그 기다림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