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을 위한 우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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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은 때때로 경이롭다.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기이한 정도로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놀라운 반전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을 누구나 겪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제외한 삶에만 적용되는 듯 보여 절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같은 행위일 뿐인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은 하루는 행복한 것이며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소망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빌헬름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속 인물들도 그렇다.

 

 소설의 화자인  ‘나’ 는 마흔 여섯 살의 남자로 수제화를 신고 걸으며 테스터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과거에는 인터뷰 진행자로 활동했고 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지만 모두 과거일 뿐이다. 현재는 구두 테스터로 받는 비용이 긴축재정이라는 이유로 줄어들고 일자리를 잃을 위기며, 진정 사랑하는 연인 리자는 약간의 생활비를 남기고 떠났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구두를 신고 거리를 걸으며 이웃을 관찰하는 일이다. 같은 시각에 만나는,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옛 친구나 동료가 전부다. 거리를 청소하는 내외, 말의 털을 빗질하는 여자,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노무자의 아내나, 유모차에서 잠든 아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제와 다른 어떤 사소한 변화나 발견에 놀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나와 마주하는 그들도 역시나 유명했던 과거 이력을 지녔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꿈꾼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오랜 친구 수잔네는 여전히 연극 무대를, 한때 사진작가였던 힘멜스바흐는 재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현재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수잔네의 말처럼 말이다.

 

 ‘대중의 고통은 말이야, 수잔네는 말한다(그녀가 정말로 대중의 고통이라는 말을 쓰다니 놀랍다),불쌍하기 그지없는 그들 모두가 일생 동안 중요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해, 이해하겠어?’ 78쪽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고통스러울까? 어쩌면 그런 생각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와 인연을 맺는 사람이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 누구와 마주하게 될지 모르니까. 소설에서 어쩔 수 없이 구두 테스터를 계속해야 하고, 벼룩시장에 구두를 팔아야 하는 주인공이 힘멜스바흐의 부탁으로 신문사에 연락을 했다가 다시 일을 하게 되고 수잔네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난 실패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한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리고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삶을 계속 이어간다.’  158쪽

 

 우리는 어제를 살고 오늘을 산다. 그러니까 내일을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과거의 화려한 시절에 발을 담그고 살기도 할 것이다. 때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넘어졌기에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다는 걸 모른다. 그럴 때 누구나 삶을 원망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날을 위한 우산』은 그런 멋진 풍경을 선물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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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삶은 결코 순수한 우리 자신만의 작품은 아니겠지요...
* * *
삶의 궤적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이켜볼 때 아깝게 놓쳐버린 여러 번의 행운과 스스로 불러왔던 여러 번의 불행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미로를 헤매듯 잘못 거쳐온 삶의 행로'(괴테, 《파우스트》1부, 헌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칫 자신을 지나치게 질책하기 쉽다.

삶은 결코 순수한 우리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 삶은 두 가지 요인, 즉 일련의 사건과 우리가 내린 결정의 산물이다. 게다가 두 요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일찌감치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견하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눈 앞의 사건과 현재의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목표가 아직 멀리 있는 한,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한다. 다만 짐작으로 대충 방향을 잡을 뿐이다. 우리가 내린 결정이 목표점에 더 가까이 데려가주기를 바라면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결정내릴 뿐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과 우리의 기본 의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주어지는 두 가지 힘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겨나는 대각선이 바로 삶의 궤적이다. (쇼펜하우어)

자목련 2012-12-18 21:01   좋아요 0 | URL
전 <파우스트>를 읽지 못했는데,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oren님은 정말 깊은 독서를 하시는 듯해요.
 
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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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아가면서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의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같은 분야에 있다면 인생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한데 그 분야의 최고자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계속 경쟁을 하며 지내겠지만 누군가는 다른 궤도로 수정할 것이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특히 그렇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몰락하는 자』속 화자와 친구가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을 포기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글렌 굴드와 만나면서 한 사람의 생이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반복적인 문장들로 강조하며 이어진다.

 

 쉰한 살의 화자는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참여 한 후 친구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별장 근처 여관에 투숙한다. 베르트하이머의 자살이 28년 전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글렌 굴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불친절한 화자는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의 순서없이 들려준다. 부유했지만 예술에는 무지했던 가정에서 자란 화자와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의 대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렌 굴드를 알기 전까지 말이다. 글렌 굴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친구가 되었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아노만이 전부였고 글렌 굴드를 의식하는 삶이 전부였던 것이다.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여동생을 괴롭히고 친구인 화자에겐 권태로운 삶을 자살로 마감할 것이라 비아냥 거렸다.

 

 첫 눈에 서로를 알아 본 세 명의 친구 중 둘은 죽었고 화자는 살아남았다. 예술과 피아노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았지만 나머지 둘은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자는 베르트하이머처럼 자살하지 않았기에 몰락하지 않은 자라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글렌 굴드의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생은 글렌 굴드로 인해 수정된 것이다. 화자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절망과는 달랐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흔들릴 수있다는 건 가능할 것일까? 만약 글렌 굴드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다면 베이르트하이머는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것이 불행이든, 패배자든, 몰락하는 자이든 말이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식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92쪽

 

 소설은 글렌 굴드의 등장만으로도 흥미로우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냉소적이고 독단적인 독백의 반복만으로도 충분하게 독자를 이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인간에게 절망이라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빠져 나오기 어려운 늪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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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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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이나 날씨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비가 오면 비에 관련된, 눈이 오면 눈에 관련된 노래를 찾아 듣거나 시나 소설을 떠올린다. 이런 감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빨리 친해지거나 더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강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뿐 아니라 음악이나 책도 그렇다. 내게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은 그런 책이다.

 

 소설은 필명으로 책을 쓰는 이디스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스스로 버지니아 울프를 닮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휴가철이 지나 조용하고 쓸쓸한 호텔 뒤락에 머문다. 그곳에서 다양한 부류의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화려한 외모의 퓨지 부인과 그녀의 딸 제니퍼,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모니카, 늘 혼자인 노년의 보뇌이유 부인, 그들의 일과는 단조롭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 그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으로 서로를 탐하며 알아간다.

 

 이디스는 작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곳에 왔다. 호텔 뒤락을 도피처로 삼은 것이다. 퓨지 부인은 남편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행과 쇼핑을 낙으로 여긴다. 혼기가 지난 딸을 자신의 부속물처럼 여기며 모두에게 주목받기를 바란다. 거식증에 걸린 모니카는 아이를 갖지 못해 남편에게 유배를 당한 격이다. 보뇌이유 부인은 며느리에게 집을 빼앗겨 호텔을 전전한다.

 

 주인공 이디스의 사연은 연인인 데이비드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들려준다. 로맨틱한 삶을 꿈꾸던 어머니와 그런 아내를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이디스에게 결혼은 망설임이다. 작가라는 직업도 결혼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만이 요구되는 시대였기에 글쓰기를 보장받을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의 결혼식에 다른 곳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모든 비난을 피해 호텔 뒤락으로 도망쳤다. 어쩌면 이디스에게 사랑은 불륜 관계인 데이비드 뿐인지 모른다.

 

 소설은 호텔 뒤락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일상 속에 숨겨진 여자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로를 질투하고 험담하고 은밀하게 누군가를 유혹하는 그들의 생생하게 묘사한다. 더불어 그들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말한다.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여자들의 삶을 퓨지 부인, 모니카, 보뇌이유 부인을 통해 보여준다. 남편과 아들에 의해 결정되는 삶은 진정 행복한 것인지 묻는다. 이디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호텔에서 만난 사업가 네빌은 이디스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결혼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디스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사랑을 원했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무엇이 여자을 살게 하는지 이디스의 말을 통해 전한다. 여자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여자에게 필요한 건 일을 포기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괴상한 징후가 생기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것보다 훨씬 진진해요. 내 말은 난 사랑 없이는 잘 살아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어떤 힘이 있어도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고 심지어 꿈도 꿀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세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물고기 같은, 움직이니 않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안에서부터 파멸해버리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란 저녁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온종일 햇볕 따가운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예요. 매일 저녁 그 사람이 올 거라고요.”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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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남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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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다. 양육되고 조금씩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지 않은가.  ‘나’는 어디서 와서 이 세상에 ‘나’라는 이로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정답도 없거니와 존재라는 명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생이라는 굴레는 그 질문 외에도 답을 찾아야 할 것이 많으니까. 만약, 존재에만 올인 할 수 있다면 답 근처에 다가갈 수 있을까?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의 화자처럼 말이다.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우울하고 권태로운 남자에게 친척이 남긴 유산은 그를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지겹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겼으니 그에게 남은 건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다. 작고 낡은 호텔을 떠나 자신만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가정부를 두고 홀가분한 생활을 시작한다. 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거리를 거닐며 주변 인물들을 (자신을 경계하는 수위, 지정 자리를 내어주며 부러워하는 식당 종업원, 개를 기르는 이웃 여자)관찰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되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니 그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일상이라도 혼자 깨어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일은 고독하다. 거기다 건물은 무너지고, 폭동이 일어나고,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고, 독재는 이어지는 세상까지 그가 불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끔찍한 세상을 흉보고 비판하고 술잔을 나눌 누군가를 원하지만 그는 찾지 못한다. 물론 그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화를 설치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번호가 알려지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지만 병원을 추천받는 일로 끝난다.

 

 다른 시도로 단골 식당 여 종업원과 동거를 한다. 사랑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이별로 이어진다. 그를 불안과 그의 환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그는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절대 외롭거나 불쌍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우주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였다. 평범한 삶이 그에게는 너무도 무겁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며, 단단하고 투박하면서도 한없이 허약한 듯한 이 느낌이 야릇하다. 이 세계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만 허점이 있어도 모든 것이 수천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내 몸이 조화의 눈부신 잎사귀의 일부라 생각되자 무(無)에 대한 구토가 일어난다. 그리고 충만에 대한 구토.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얼마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오직 순간만 있으리라.’ 89쪽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이 세계는 용해될 수 없는 실재이거나, 아니면 절대적 실재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실재를 감추고 있는 단순한 커튼일지도. 동시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십억 개의 이미지와 목소리, 이런 모든 것은 부동의 근본적인 토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추측일 뿐. 이런 토대가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했다’ 107쪽

 

 그가 예전과 같이 직장에 다니고 그들과 어울렸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그에게는 존재에 대한 갈증이 있었 것이다. 육체적 욕망을 채우고, 계절이 바뀌고, 이념이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그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그 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죽음이었다. 

 

 ‘사다리가 빛났다. 정원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고, 나는 그 일부가 되어 그 한복판에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아니면 몇 초가 흘렀다. 사다리가 내게 다가왔다. 거의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여러 해가, 아니면 몇 초가 흘러다. 그것이 멀어져 녹듯이 사라졌다. 사다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덤불이, 나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선문과 함께 기둥들이 나에게 깊이 스며들었던 그 빛의 무엇인가는 남았다. 나는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155~156쪽

 

 쓸쓸하고 어두운 소설이지만 선명한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인물의 이름이나 사회적 지위, 직책을 언급하면서도 말이다. 화자를 비롯해 우리 인간이 우주의 작은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는 듯하다. 버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시간마다 시시콜콜 일과를 사진과 140자의 글자에 담아 세상에 내 놓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로 살고 있지만 다른 나를 갈망하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나와 같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가. 누구도 그 기다림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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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으니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네요.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여러 차례 언급했던 '마야의 베일'도 떠오릅니다. '필사해 둔 부분'이 있어서 (매우 길지만) 덧붙여 봅니다.
* * *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자목련 2012-12-14 18:41   좋아요 0 | URL
oren 님은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담겼을 책을 읽으셨군요.
영원한 탐구의 주제가 아닐가 싶어요, 존재란.
소설을 읽는 동안은 고독과 존재란 단어에 둘러싸였지만 금세 잊고 마는..
 

 

 당신의 조언은 언제나 힘이 된다. 당신의 응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안하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얼어붙은 불안을 녹이기 위해 습관처럼, 의식처럼 책을 사들이고 있다. 때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은 친절하게도 이벤트 중이다. 컵이 탐나서, 그런 핑계를 댈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이미 컵은 도착했고 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소설을 포함, 이런 책들을 들인다.

 

 좋아하는 작가 김숨의 장편을 읽다가 멈추었지만 2013년 현대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길은 이 책을 주문하는 일, 수장작인 김숨의 『그 밤의 경숙』과 더불어 조해진, 김연수의 단편도 만날 수 있다. <국수> 같은 소설을 기대한다. 아직 읽지 않았으니 말할 수 없는 소설이다. 리뷰를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요즘 리뷰다운 리뷰(그러니까 이건 내 주관적인)을 쓰지 못하고 있다. 한강, 김선우, 백가흠, 정소현의 소설도 아직 읽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한국 문학을 선택할 때, 특히 시집을 주문할 때마다 도움을 받는 이웃(내가 매우 좋아하는 이웃)이 있다. 신간 시집 김주대의 『그리움의 넓이』,읽지 못한 구간 시집 이선영의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를 함께 주문했다. 폭설로 배송은 늦어지려는지, 예상 도착 일이 여느 때보다 늦다.

 

  12월은 21일 남았다. 12월의 리스트는 아직 그대로다.  줄어들기는커녕 리스트가 늘어나고 있다. 2013년의 리스트를 작성해야 할 시간도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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