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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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모든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현재가 아닌 과거라는 이유로 미화할 수 있는 생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로 다 채워졌을 수 있고 누군가는 지금 채우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도착하지 않은 미래에서 기대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 행운의 기회를 위해 비굴한 오늘을 견디고 참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런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포기한 채 살아가는지도. 권여선의 소설은 그런 게 생이라는 걸 재차 확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어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살아갈 뿐이라고 말이다. 아니,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극진하게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그들처럼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세상은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도 모두가 그렇다고 나까지 그렇게 흘러가고 싶지 않으니 「손톱」의 소희나 「너머」의 N과 「친구」의 해옥과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응시한다. 한 달 월급 백칠십만 원으로 옥탑방 월세와 대출금을 갚고 간신히 살아가는 스물한 살의 소희에게 다친 손톱을 위한 치료비는 과도한 지출이다. 소희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이 생겨도 상의할 대상이 없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다. 엄마와 언니가 있었지만 차례로 소희 곁을 떠났다. 엄마가 언니의 적금과 대출을 받아 떠난 것처럼 언니도 소희에게 대출을 남기도 떠났다. 그런 소희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출근 시간에 통근 버스에서 만나는 햇빛이다.

소희는 강변을 달리는 통근버스 차장에 바짝 붙어앉아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본다. 버스가 좋은데, 소희는 버스가 슬프다. 그러니까 슬픈 건 버스가 아니라 햇빛인데,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53쪽)

자신의 일상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희에게 같이 일하는 민경 언니가 학교와 알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며 엄마와 상의했다는 말에 뭔가 타오르는 걸 느꼈다. 왜 소희에게는 아무도 없는가. 갑자기 나는 화가 났다. 엄마와 언니 둘 중 하나라도 소희 곁에 있었다면 긴 하루의 끝을 수다로 풀고 의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더 큰 사고를 치고 소희에게 떠넘겼을까. 그랬다면 없는 게 나을까.

 

딱딱한 껍데기 속에 갇힌 느낌, 바삭하게 구워지는 과자처럼 겉은 점점 검고 단단해지는데 속은 끓는 시럽처럼 뜨거운 핏물이 휘도는 느낌, 겉과 속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54쪽)

 

그날 왜 그랬냐 하면 그때 소희는 달아오르다 달아오르다 끝내 퍽 금이 가야만 했던 상태였으니까. 뿜어낼 구멍이 절실할 때, 그러니 손톱이든 어디든 와삭 깨지고 퍽퍽 터져야 할 때였다. 아하하…… 웃겨 죽을 뻔했지. 엄마랑 뭘 했다고? 상의? 엄마랑 상의를 해? 아하하…… 민경 언니가 소희를 그렇게 웃겼으므로 소희는 박스 밑으로 급하게, 온 힘을 다해 손을 집어넣었던 거고, 터졌던 거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거고. (55쪽)

시청료를 내지 않으려고 텔레비전도 없애고 매운 짬뽕 곱빼기 한 그릇을 선뜻 주문하지도 못하는 스물한 살의 소희에게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그럼 「너머」의 N은 어떤가. 두 달간 계약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N은 어쩌면 한 한기, 혹은 그 이상으로 재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학급 담임도 잘 해내고 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과도 잘 지내고 싶다. 하지만 N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달랐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은근히 드러냈고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계산하고 먼저 이익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었다. 치사한 일이었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N은 요양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N을 알아보지 못하고 울음소리만 내는 어머니.「너머」에서 학교와 요양병원은 전혀 다른 공간이지만 N과 어머니가 놓은 상황은 묘하게 닮았다. 둘은 약자였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N의 이런 심정은 소희보다 나은 거라 해야 할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세상천지 N에게는 어머니밖에 없고 어머니에게는 N밖에 없다고. (150쪽)

 

기댈 곳이 아픈 어머니밖에 없는 N, 그와 다르게 「친구」의 해옥에게 아들 민수가 전부다. 민수를 위해 일하고 민수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에는 여성용품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고깃집에서 일하는 해옥은 민수의 모습을 보며 고단함을 잊는다. 중학교에 들어간 민수는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해옥에겐 영란이란 친구도 있었다. 지금의 일을 소개해 주었고 해옥의 건강도 걱정해 주었다. 자신의 이모가 파는 다이어트 식품을 해옥에게 아주 싼 가격에 팔 정도로. 그러니까 영란은 교묘하게 해옥을 이용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민수를 때린 아이들처럼. 그래서 해옥은 민수가 학교 폭력 피해자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윽박지르듯 담임은 소리를 높여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민수는 친구끼리 장난친 거라 했고 해옥은 아이들에게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주기로 한다. 아들인 민수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뭔가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답답함은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소희, N, 해옥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기인한 게 아니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는 일이 너무 큰 바람일까. 20대의 소희가 마주할 삶이 지금보다는 버겁지 않기를 바란다. 슬프면서 좋은 거 말고 그냥 좋은 걸 느끼기를.

언급한 단편만 좋았던 건 아니다. 삶의 후반부에 접어든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공허함과 죽음에 대한 감정을 만날 수 있는 「모르는 영역」과 「재」, 두 단편 속 인물은 어느 순간 다가올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에 더 애틋했다. 조금씩 죽음을 향해 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받아들일 여유는 없는 슬픔이라고 할까. 하루하루 살면서 그런 감정의 실체와 만나 체득해야 한다는 게 슬프다.

권여선은 불행과 슬픔을 전제로 생을 말하는 건 아닐까. 그것과 온전히 이별할 수 없으나 점차 멀어질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조금 더 살아봐야 한다고. 그러니 아직 멀었다는 말은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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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 - 무민 골짜기, 시작하는 이야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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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은 두렵고도 흥분된 일이다. 그러나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두려움은 접어두어야 한다. 아빠를 찾아 나선 무민과 무민 엄마처럼 말이다. 무민과 무민 엄마는 8월의 끝 무렵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과 마주할지 모른다. 그런 궁금증이 동화를 읽는 재미일지도 모른다. 작고 귀여운 무민 모자는 빛나는 작은 두 눈의 작은 동물을 만나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작은 동물과 무민 모자는 왕뱀이 사는 늪을 만나자 무서움에 떤다. 이대로 멈춰야 하는 걸까.

“어휴, 우린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늪을 건널 용기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햇빛을 찾겠어? 이제 그냥 같이 가자고.” (14쪽)

무민의 말처럼 용기를 내자 늪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튤립에 살고 있는 파란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툴리파를 만난 동행한다. 처음엔 둘이었지만 넷이 된 것이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나선 모험은 계속되었고 아주 높은 곳에 사는 노신사의 집에 방문한다. 무민은 초콜릿과 캐러멜이 가득한 그곳에서 살자고 엄마를 조른다. 하지만 신선한 공기와 진짜 햇빛이 필요한 엄마는 모두를 이끌고 나간다. 그러자 이번엔 바다와 만나고 모두가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그곳에서 해티패티들이 배에 올라타는 걸 목격하고 그들에게 향한다. 아빠가 해티패티들을 따라 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파도가 밀려와 배를 타고 가는 일도 힘들었다. 아마도 무민과 무민 엄마 둘이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목적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아빠를 찾고 추위를 피해 집을 집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홍수 속에서 조난을 당한 고양이 가족을 구해주고 대머리 황새 아저씨의 안경을 찾아주고 도움을 받는다. 아빠를 찾는다는 사정을 듣고 자신의 날개 위에 작은 동물과 무민 모자를 태우고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아빠를 찾았다. 누군가를 도아주고 도움을 받는 일. 어려운 시기에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무민 시리즈의 애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무민 시리즈의 첫 시작이라는 걸 알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40년대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던 시절, 어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가는 희망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모든 걸 삼켜버리는 동화 속 홍수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견딘 것처럼 말이다.

 

귀여운 캐릭터와 예쁜 삽화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동화지만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모두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선물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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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이브러리 - 유혹하는 도서관
스튜어트 켈스 지음, 김수민 옮김 / 현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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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도서관이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과 죽음, 강한 열망과 상실, 믿음을 지키고 깨뜨리는 이야기들. 온갖 종류의 인생 극이 담겨 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복잡하고 반복적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연결된다.(14쪽)


책장을 넘기는 감촉, 읽던 책을 얼굴에 덮고 잠드는 밤을 사랑한다. 책 냄새에 담긴 설렘을 안다. 표지가 예쁜 책, 독특한 책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은 전자책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다. 도서관을 찾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빌려온 책을 제때 읽지 못해 반납하고 다시 빌리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고 책을 소장하는 욕심도 생겼기 때문이다. 책장을 들이고 책을 모으던 그 열정은 식었지만 책에 대한 책,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 책을 모으는 이들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책이 있다. 희귀본 연구자이자 출판 역사가인 스튜어트 켈스의 『더 라이브러리』. 이 책은 책과 도서관의 역사를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은 도서관의 다채롭고 특별한 이야기를 15가지 주제로 풀어놓는다. 희귀본 연구자이자 출판 역사가란 타이틀에 걸맞게 흥미로운 에피소드(책과 함께 자는 사람들, 비열한 수집가들, 책을 위한 발명품, 도서관에 사는 동물들)를 소개한다. 그가 얼마나 많은 도서관을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보물 같은 책을 발견했는지 이 한 권의 책에 전부 담겼다. 도서관에서만 발견하는 책의 즐거움이 있듯 이 책도 그러하다.

 

과거에는 책은 지금보다 더 귀한 존재였고 희귀품이었다. 그러니 도서관에서는 장서를 확충하기 위해 남다른 정책이 있었으니, 알렉산드리아 당국은 두루마리 책을 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도서관에서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책은 모으는 일보다 보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선반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중세 후반 책의 수가 증가하면서 책에 대한 부수적인 물품들이 생겨났고 선반 길이가 배가 될수록 그 배수의 4승에 비례해서 선반이 아래로 휘어져 도서관 학자 멜빌 듀이는 가장 적당한 책장 선반 길이가 1미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많은 책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 도서관 건축가들은 햇볕이 곧장 내리쬐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색유리를 사용했다. 책이 많아지면서 도서관에는 책을 훔치는 도둑도 등장했고 이를 막기 위해 굴뚝을 타고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쇠창살, 금속 칸막이, 심지어는 책이 책상에서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광경도 연출되었다. 도서관 절도는 근대 도서관에서도 이어졌는데 그만큼 인간에게 책은 매혹적이며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도서관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소이며 주제가 된다. 이 책에서도 역시 톨킨, 움베르토 에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 속 도서관을 소개하는데 가상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이 되는 도서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독자가 나뿐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모두에게 책이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기준에 맞춰 책을 난도질하고 아무렇게 놔둔 파블로 망겔이나 화가에게 책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며 모델이 포즈를 취할 때 지지대로 썼다는 에드워드 번 존스는 좀 심했다. 이 외에도 재미있고 놀라운 에피소드, 때로는 속상하고 잔인한 도서관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는 책이다.

 

넘쳐나는 책들을 도서관에 모두 소장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지배할 거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다. 우리는 전자책이 주는 장점을 알고 있다. 휴대가 용이하고 언제든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이 주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다. 아주 먼 미래에 종이책은 사라지고 도서관은 유물로 남는 걸까? 한 권의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수많은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도서관을 우리는 여전히 꿈꾸고 기대한다.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책을 훑어보게 되면서 잃게 된 것들로 있다. 스크린을 통해 훑어보는 것으로는 물리적이고 복잡하며 생각지도 않은 발견을 할 수도 있는 실제 책이 있는 도서관을 둘러보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책은 비밀 공간과 기막힌 발견, 페인트와 회벽, 나무 돌로 만든 뛰어난 예술, 승리에서부터 절망까지 인간사의 다양한 측면 등 도서관의 많은 경이로운 점들을 보여준다. 책등과, 책배, 수직성, 서가 기호, 책장, 서고, 가판대, 홀, 반구형 지붕 같은 책과 도서관의 물리적 요소들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주면서 독자는 이들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예를 들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활용되고 가치를 인정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책과 도서관의 경우 이런 독서 방식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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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안 죽어 - 오늘 하루도 기꺼이 버텨낸 나와 당신의 소생 기록
김시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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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표지에 절로 시선이 멈춘다. 거기다 제목까지 독특하다. 그런데 나는 왜『괜찮아, 안 죽어』를 ‘괜찮아, 죽지 마’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응급실에서 죽음의 고비를 마주한 환자를 상대했던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급한 마음에 말하자면 이 책은 너무 유쾌하고 따뜻하다. 동네 병원의 일상이라고 할까. 아니면 단골 할매 환자들이 들려주는 굴곡진 인생의 맛이라고 할까. 뭐라 표현하든 상관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뭔가 권위적이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동네 의원에서 만나는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혈압약을 처방받으러 오는 할머니, 감기 때문에 오거나 그냥 안부를 전하러 오는 환자들의 수다를 들어주는 아들 같은 원장 선생님이었다. 처음부터 환자들과 친밀한 사이였던 건 아니다. 2층에 위치한 병원에 힘들게 찾아오는 할머니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다. 그러니 홍시를 주고 내려갔다가 똑바로 세워서 보관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다시 올라오는 마음, 뜨거운 옥수수 바로 먹어야 맛있다며 가지고 온 정성을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잘 쓰려고 애쓴 모양도 없이 보통의 일상이라서,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인 이야기라서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작은 읍에 사는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라 더욱 그랬다. 대기실에서 처음 만나 할머니들은 바로 언니 동생이 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궁금하지 않은 당신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돌아가신 할머니, 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마 그들과 같지 않을까 잠깐 상상하는 시간.

“환자한테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그러지 마.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재밌게 살다 죽는 게, 먹고 싶은 거 힘들게 참으면서 오래 사는 거보다 백배는 더 좋아. 그니까 나 맥심도 마실 거고, 떡도 먹을 거야. 커피 달달하게 타서 백설기하고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74쪽)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디서나 죽음은 존재한다. 동네 병원에서도 그러하다. 그 안에서 사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환자와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의사가 있다. 당뇨, 혈압처럼 평생 먹어야 하는 병과 동행하는 삶을 곁에서 지켜본다. 죽음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노년의 삶, 그들에게서 듣는 고단한 인생은 때로 눈물겹고 때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그들만이 알려주는 생의 기쁨은 또 얼마나 크고 다양한가. 남겨질 아내가 불편 없이 약을 처방받기를 바라며 사전답사 격으로 병원을 찾은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 학생 환자였다가 대학생이 되고 취직을 하여 소식을 전하러 온 청춘, 저자에게 모두 특별하고 소중한 환자였다.

 

응급실처럼 다급한 움직임은 아니지만 정겨운 소란이 끊이지 않는 그곳. 나도 한번 그들의 틈에 끼어 웃고 싶다. 그들이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들려주는 멋진 하모니가 아름답다. 괜히 화가 나고 사는 게 우울한 날, 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운 날, 슬그머니 펼치면 좋을 책이다. ‘정’이라는 폭죽이 만든 불꽃이 환한 빛을 안겨줄 테니까.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의료진의 노고를 생각한다. 더불어 그들과 우리의 일상이 보통의 그것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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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미즈키 히로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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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직원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언제나 그렇듯 서로가 원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최저시급의 상승은 소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는 이들과 영세 자영업자에게는 많은 부담이 된다고 들었다. 더 좋은 사회로 나가기 위한 제도이지만 보완해할 점이 아직 많은 듯하다. 노동 현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받고 일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체감하기는 어렵다고 할까. 조카의 경우도 그랬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했지만 그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지 못했다. 조카는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러니까 노무사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회사가 지급하지 않으려 했던 급여를 받은 것이다. 미즈키 히로미의『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를 읽으면서 조카의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노사 간의 대화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 발생하는 일들은 이미 익숙하다.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시위 현장이나 긴 줄다리기 끝에 극적인 타협을 이룬 결과나 법정 분쟁으로도 해결이 나지 않아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접했기 때문이다. 노사 간의 대립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게 노무사가 아닐까 싶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서로에게 최선의 방법을 제시하는 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 책은 재미없고 딱딱한 업무에 관한 설명서가 아닐까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맞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거리 조절에 대한 조언이라고 할까.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 히나코는 신입 사회보험노무사다. 그녀는 직원이 네 명인 야마다노무사사무소에서 일한다. 정식 직원이 아닌 파견직으로 일했던 히나코는 노무사 자격증을 땄다. 3개월마다 갱신되던 파견직에 대한 불안이 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히나코의 업무는 사무소에 일을 의뢰한 클라이언트(그러니까 사 측)를 만나 업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책은 연작 소설의 형식으로 히나코에게 배당된 업무를 소개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6개의 사연은 우리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이거나 주변의 친구의 경우처럼 익숙하다. 


첫 번째는 퇴사 후 발생하는 실업수당에 관한 이야기로 어떤 형태로 퇴사를 했는지가 관건이다. 책의 사례의 경우는 부당 해고의 경우 실업수당이 바로 지급되는 것으로 나온다. 회사의 경우는 자발적인 퇴사라 주장하고 퇴사자는 부당 해고라 주장하니 그 사실 확인을 밝혀야 한다. 사 측에 고용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사 측의 편에서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다양한 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 원하지 않게 퇴사를 한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는 실업급여를 잘 받고 있을까. 


두 번째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에게 계약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며 많은 업무를 할당하는 점장이 등장한다. 열심히 일하면 계약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티는 아르바이트생은 조카를 보는 듯해 많이 속상했다. 열정페이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세 번째로 기업의 취업규칙을 정하는 데 있어 회사에 유리하게 하려고 임신, 출산에 대한 조항을 교묘하게 조절하는 사연에는 분노가 폭발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 더 좋은 복지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임신한 직원으로 다른 직원의 업무가 많아진다고 직원들을 이간질하는 사장이라니. 결혼 후 육아로 인해 경단녀가 된 수많은 엄마들이 분개할 사연이다. 그 외에도 산업재해에 대한 정의와 해석, 부서마다 다른 업무로 인한 재량 노동시간 적용을 두고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나코는 노무사 이전에 파견직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사업자와 근로자의 사이를 조율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사적인 감정을 빼고 객관적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법을 지키면서 노사가 모두 원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는 노무사란 직업이 참 좋은 것 같다. 현장에서 느끼는 피로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히나코의“일의 보람이란 사실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그 일로 감사를 받는 것.” (315쪽)말처럼 노무사란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고용주는 고용주대로, 직원은 직원대로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바라는 목적이 있기에 노무사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모두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는 사연이다. 내 주변의 누군가는 사장이고 다른 누군가는 직원이니까. 이런 유용한 내용을 적절한 재미와 함께 읽을 수 있는 한국판 노무사의 이야기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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