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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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마음은 풍요롭거나 슬픈 상태다. 내게는 대체적으로 그랬다. 박소란의 시집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조금 슬펐고 조금 기뻤다. 일상의 어느 순간 내가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고 한 사람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가 되었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몇몇 장면은 고스란히 남아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세상과의 단절을 원했던 시절이 달려들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졌다. 시인의 감성과 나의 그것이 같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이런 시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아야 괜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닫힌 문을 두드렸던 다정한 친구에게 이 시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입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감상」, 전문)

이 시집이 기뻤던 건 이런 시가 있어서다. 모든 말들이 시가 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살 수도 있다는 착각을 안겨주는 그런 시라 말하고 싶다. 버스나 지하철, 기차를 타고 내리는 일상에서 한 번쯤 일어날 수 있는 생활 시라고 표현하고 싶다. 감추었던 마음을 어떤 말에 빌려 슬그머니 내려놓는 것, 불쑥 네가 보고 싶어서, 불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한다는 확신. 시는 이래서 좋구나.


불쑥,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아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 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불쑥」, 전문)

그리고 언제나 내가 반하는 단어, 풍경을 만나는 시.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고백하고야 만다. 이런 시가 좋아요, 이런 시를 만나면 나를 한 번쯤 떠올려줘요. 여름의 절정에서 눈이 오는 풍경을 그린다. 아름답게만 내리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곤혹스러운 존재가 되는 눈. 눈을 헤치며 걷는 일, 그것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은 서늘하다. 그 서늘함이 여름을 위로한다.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소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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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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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사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숭고하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살아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코로나 19로 모든 게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요즘, 그런 생각을 더 자주 한다. 그러니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말고 때로 있는 그대로 즐기고 순간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루시아 벌린의 단편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 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살면 살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니 흐르는 물처럼 나를 맡겨보면 어떠냐고. 이렇게 말하면 이 소설집엔 온통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뿐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울과 불행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22편의 단편 속 주인공은 저마다의 삶에서 뭔가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한다.


첫 번째 단편 「벚꽃의 계절」에는 두 살 된 아들을 키우는 카산드라의 일상을 보여준다. 반복된 일상, 매일 똑같은 시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밖으로 나오고 가게를 찾고 길을 걷는다. 그러다 같은 시각 같은 공간에서 우체부와 마주한다. 한치의 변화도 없이 기계적인 움직임, 카산드라는 우체부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남편과 대화를 통해 뭔가 달라지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카산드라의 마음을 몰라주고 무시한다. 어떻게 보면 카산드라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녀의 내부에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뭘 더 원하지?’란 물음에 카산드라가 그것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 결국은 모두의 바람이라는 걸 느낀다.


22편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다. 어떤 단편들은 연작소설처럼 이어진다. 광산 기술자였던 아버지와 몸이 아픈 어머니를 둔 소녀의 인생 이야기라고 할까. 단편 속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어른 나이에 선택한 결혼과 임신, 육아, 그리고 이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러하다. 1943년을 배경으로 한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은 마치 흑백 영화와 같다. 거리에 모여든 아이들, 그리고 어른을 상대로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을 파는 대담함. 「여름날 가끔」도 연장선이다. 근처에 제철소가 있는 마을, 아이들은 어른의 근심 걱정을 알지 못하고 돌차기나 공기놀이를 한다. 제련소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상황이 아이들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비스듬한 햇빛에 반짝이는 공터의 유리 조각처럼, 마을 저편으로 몰려가 흩어지는 연무가 역광을 받아 여러 색채를 띠었다. 멋진 파란색과 초록색, 움푹 파인 길에 고인 물에 자동차 기름이 떠서 생기는 강렬한 초록색과 무지갯빛 보라색. 너울거리는 노란색과 붉게 녹슨 색도 있지만 대개는 은은한 이끼 빛이 나는 초록색이 우리 얼굴에 비쳤다. (93~94쪽) 「여름날 가끔」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낸 아이는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속 사춘기 소녀 로라가 된다. 아버지의 지인이 경영하는 농장을 방문하며 그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동안 로라는 이상함 감정에 휘둘린다. 그것이 호기심인지, 사랑인지, 혹은 욕망인지 모른 채 빠져든다. 아픈 어머니 때문에 아이에서 여자로 자라면서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한 「이별 연습」 속 화자 ‘나’도 로라로 볼 수 있다. 칠레를 떠나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비행기 여행을 하는 ‘나’는 그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어머니와 자신에게 보여준 전 없는 표정. 루시아 벌린의 이런 문장을 통해 그 마음이 무언지 알 것 같다. 쓸쓸하고도 외로운 마음.


나는 나이 든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는 너무 늦은 느낌. (157쪽) 「이별 연습」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에서는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녀 역시 이전의 인물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준비되지 않은 결혼, 임신, 육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제3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선택한 결혼, 자꾸만 멀어지는 남편과의 관계. 담배와 술로 채워지는 삶의 일부. 그래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기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고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마리아를 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거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마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이 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165쪽)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놓쳐버린 기회. 한 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172쪽)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표제작인 「내 인생은 열린 책」에서 클레어는 아이 넷을 둔 이혼녀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가 사귀는 남자까지. 클레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개의치 않았고 아이를 돌보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 학기가 끝난 걸 자축하기 위해 외출한 날 막내를 잃어버렸다. 마을에서는 막내를 찾는 동시에 클레어와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클레어 역시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었다. 다행히 막내 아이는 찾았지만 모든 걸 클레어의 책임으로 몰고 있었다. 그냥 운이 나빠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코랄레스로 이사한 건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그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냥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268쪽) 「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의 바람도 클레어와 같았을 것이다. 다정한 엄마,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그녀와 루시아 벌린을 질타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매 순간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비참하거나 절망적인 기운보다는 그 모든 걸 감싸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차가운 눈을 보면서 우리가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녀의 인생과 이야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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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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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Spiel’와 ‘공간 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슈필라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6쪽)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몇 년 전부터 ‘힐링’이 삶의 목표가 되는가 싶더니 ‘욜로’로 이어졌고 최근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인 ‘Work-life balance’이 대세다. 나만 모르는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삶의 지향점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면 맞을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고도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운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 등장하는 ‘슈필라움’은 새로운 유행어가 아닐까.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내 ‘슈필라움’이다. (12쪽)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은 먹고살기에 급급한 일상이 아니라 여유롭고 평온한 삶을 꿈꾼다. 그만큼 살기가 좋아진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삶의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는 게 맞겠다. 지금 힘들더라도 나중에 괜찮을 거라는 막연함이 아닐 지금도 미래도 재밌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니 문화심리학자인 저자가 말하는 공간 ‘슈필라움’이 필요한 거다. 저자처럼 여수의 바닷가 횟집을 재정비해 화실로 사용하거나 작은 섬을 사서 작업실을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 없는 형편인 걸 나는 잘 안다. 다만, 그런 공간을 꿈꾸고 계획해야 한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시기, 질투 같은 감정에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바닷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을 테니까.


저자는 ‘슈필라움’을 빌려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이제껏 살아온 저마다의 삶,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해 한 번 깊이 있게 고민하고 돌아본 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그가 화려한 방송 이력과 교수직을 내려놓고 여수로 향한 사연이나 여수에서 화가로서 ‘미역창고(美力創考)’에서 그림을 그리며 글을 쓰는 모습은 유쾌하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밌게 읽으면서 저자의 그림도 감상하고 사진작가가 담은 여수의 풍경도 마주할 수 있는 괜찮은 책이다. 그러나 그게 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글을 통해 전하려는 사유가 매력적이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내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시선은 곧 마음이라는 단순한 명제, 그 안에 담긴 삶의 철학이라고 할까. 문학심리학 박사의 강의를 듣는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 joint-attention’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34쪽)


지금 내가 보는 것들, 그것에 담긴 내 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들(물건, 사람)를 향한 나의 마음에 담긴 욕망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혼자이기를 바라면서도 외롭기는 싫어 자꾸만 SNS를 지켜보고 이곳과 그곳에 동시에 발을 걸치는 우리네 모습을 말이다. 마음을 들킨 것 같다고 할까.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소통과 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함께 보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룰 때 순서를 주고받는다면 불화나 불신도 감소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갖는다.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 주고받기’다. 타인의 ‘순서’를 기다릴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105쪽)


저자의 공간을 보면서 나의 공간을 둘러본다. 아마도 많은 독자가 그럴 것이다. 그 공간에서 무얼 할 때 가장 편안하고 가장 행복한가 집중한다. 그런 공간이 없어 우울하거나 불행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내 우울할 필요는 없다. 이런 책을 통해 저자의 ‘미역창고’와 작고 귀여운 배 ‘오리가슴’으로 대리만족을 할 수도 있으니까. 거기다 나만의 ‘슈필라움’을 만들어야겠다는 소망이 잉태했을 테니 괜찮다. 우리가 원하는 공간은 궁극적으로 내가 편안해지는 곳이다. 아무리 넓고 화려한 공간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곳은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은 곳이다. 모든 건 나로 시작한다. 그래서 나를 알아야 한다. 단호하면서도 진정한 저자의 글처럼 말이다.


‘싫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하나씩 제거해나가면 삶은 어느 순간 좋아져 있다. ‘나쁜 것’이 분명해야 그것을 제거할 용기와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115쪽)


공간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순간, 음악을 듣는 순간, 그림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공간이 될 수 있다. 나만을 위해 천천히 흐르는 시간, 그 순간 내 시선이 닿은 그곳(것)이 ‘슈필라움’이어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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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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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이 순간이 지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삶에 그런 마법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게도 모든 과정을 견디고 겪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할 때 주변을 둘러본다. 이미 경험한 자, 혹은 경험했을 법한 어른을 찾는다. 답을 알려줄 누군가가 필요했으니까. 여든 살의 ‘칙디야크’와 일흔다섯 살의 ‘사’도 그랬을 것이다. 늙고 병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족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곁에 있는 늙은 친구뿐이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가득한 알래스카의 설원에 남겨진 칙디야크와 사는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도움만 받고 살아온 그들에게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친구보다 나이가 많은 칙디야크가 느끼는 절망은 사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고 컸다.


그들 주의의 모든 것이 은빛 달빛으로 싸여 있었다. 수많은 나무 아래 그리고 야영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두 여인은 잠시 동안 둑 위에 서서 그 특별한 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쉬었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60쪽)


둘이라는 숫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이 잊고 있던 삶을 떠올렸고 더 따뜻하고 더 안전한 야영지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눈과 바람을 뚫고 이동하고 자작나무와 가죽끈으로 눈 신발을 만들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부족에서 함께 살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대화도 나누며 감정을 공유했다. 태어날 때부터 약하고 늙은 여자는 아니었다. 부족에 도움을 주는 구성원이었고 딸에게 전부였던 엄마였다. 언제부터 수동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제는 아니었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죽음과 상관없이 능동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칙디야크와 사가 둘이서 헤쳐나간 1년의 시간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늙었다는 이유로 가치 없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는 오직 스스로에게 있을 뿐이다.


두 늙은 여자의 힘겨운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몹시 두려웠다. 그녀들이 굶어죽는 건 아닐까, 얼어죽는 건 아닐까. 거대한 포식자의 등장으로 죽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나는 이 책이 생존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죽음만 생각했을까.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경험한 삶의 태도와 현명한 지혜가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만 떠올렸을까. 어쩌면 그녀들에게 나의 미래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난과 빈곤의 독거노인, 고독사로 이어지는 100 세 시대의 삶을 말이다. 누군가는 알래스카 인디언의 삶과 우리의 그것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든 번의 여름과 일흔다섯 번의 여름의 힘을 무시하고 서른 번의 여름과 마흔의 여름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잊을 만하면 힘든 일이 찾아온다. 생이란 무릇 그렇다.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바라는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은 괜찮아진다. 내일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며 겨울밤을 함께 보내고 새로운 아침을 맞은 두 늙은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온 부족에게 충분한 음식을 주고 그들을 용서하고 협력하여 살아가는 아름답고 숭고한 결말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모든 삶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걸 깨닫는다. 어떤 삶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곳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칙디야크와 사의 삶을 응원한다. 죽음이라는 소멸의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순간을 살아가는 삶을 축복한다. 어제와 같은 듯 다르지만 하루하루 이어지는 생과 끊임없이 세상을 논하고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늙은 여자의 그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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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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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는 동시에 바로 멈춤이 된다. 그런 책은 도전이 필요하다.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거나 거대한 분량에 지레 지친다. 고전의 경우도 그러하다. 고전은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생각 말이다. 『파우스트』란 제목만 보고 그랬다. 내가 아는 파우스트는 괴테를 떠올렸으니까. 매번 시작만 하고 말았던 그 소설로 알았다. <첫사랑>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대충 제목만 보는 나의 이 불량함을 어찌할까. 그러니 이반 투르게네프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과 섬세한 묘사에 반하고 말았다고.


『파우스트』엔 이반 투르게네프의 세 가지 중단편을 엮었다. 표제작인 <파우스트>, <세 번의 만남>, <이상한 이야기>모두 매력적이다. 첫 번째 <세 번의 만남>은 제목 그대로 세 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나’가 묘령의 신비한 여인을 세 번 만나는 이야기.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면서 읽었다. ‘나’가 그 여인을 처음 만난 건 이탈리아의 소렌토였고 그녀와 한 남자의 은밀한 만남의 목격자였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그녀를 러시아의 한적한 영지의 저택에서 다시 만났다.


정말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초록빛 자연 속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여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모자 아래 살짝 드러난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홍초를 띤 하얀 얼굴, 살짝 곡선을 그린 가는 목덜미, 긴 회색 옷을 따라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내렸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행복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30쪽, <세 번의 만남>)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도 주변 사람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더욱 커졌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운 건 페테르부르크의 가면 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만남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했지만 그녀는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에 항상 그녀 곁에 있던 남자였다.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아쉬운 사랑이지만 그녀를 만날 때마다 떨리며 흥분했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그 사랑을 아름답고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표제작인 <파우스트>는 9편의 편지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 파벨에게 일어난 일을 친구에게 편지로 알려주는 이야기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벨은 과거 첫 사랑이었던 베라와 재회한다. 대학 동창의 아내로 말이다. 가혹한 운명이었다. 과거 파벨은 베라와 결혼까지 결심했지만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라에게 어머니는 신과 같은 존재였고 무조건 복종하는 대상이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베라에 대한 파벨의 사랑은 되살아났다. 베라는 스물여덟 살에 세 아이를 둔 엄마였고 친구의 아내였다. 베라와 만난 파벨은 그녀에게 과거에 어머니의 반대로 접하지 못했던 문학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처음이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베라에게 파우스트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솟구치는 욕망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남편을 두고 사랑하는 파벨에게 갈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신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베라는 병이 들었고 죽음을 맞이한다. 베라의 욕망은 죽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내 청춘이 눈앞에 되살아나 환영처럼 어른거리더니 온몸의 혈관을 따라 불길처럼, 독약처럼 뛰어다니는 거야. 심장은 확장된 채 수축되지 않았고 심장의 혈관이 온통 약동하지 시작했지. 그리고 욕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지……. (74쪽, <파우스트>)


앞의 두 편이 사랑과 욕망에 관한 것이었다면 마지막 <이상한 이야기>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는 H가 드려주는 과거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H는 우연하게 순수하고 맑은 소녀 소피를 만났다. 좋은 기억이었기에 소피가 가출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업무차 방문한 곳에서 소피를 발견한다. 소피는 ‘바슬리’란 순례자를 돌보며 희생하고 있었다. 가출의 이유도 그래서였다. 소피는 과거와 달라졌다. H는 소피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지만 그녀는 완고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르고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파국으로 끝났지라도 말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름답고도 섬세한 묘사로 만난 사랑, 욕망, 종교를 향한 몸부림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 중 하나다. 고전을 통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마음처럼 닿을 수 없고 쉽지 않은 게 인생이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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