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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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사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숭고하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살아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코로나 19로 모든 게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요즘, 그런 생각을 더 자주 한다. 그러니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말고 때로 있는 그대로 즐기고 순간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루시아 벌린의 단편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 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살면 살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니 흐르는 물처럼 나를 맡겨보면 어떠냐고. 이렇게 말하면 이 소설집엔 온통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뿐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울과 불행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22편의 단편 속 주인공은 저마다의 삶에서 뭔가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한다.


첫 번째 단편 「벚꽃의 계절」에는 두 살 된 아들을 키우는 카산드라의 일상을 보여준다. 반복된 일상, 매일 똑같은 시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밖으로 나오고 가게를 찾고 길을 걷는다. 그러다 같은 시각 같은 공간에서 우체부와 마주한다. 한치의 변화도 없이 기계적인 움직임, 카산드라는 우체부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남편과 대화를 통해 뭔가 달라지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카산드라의 마음을 몰라주고 무시한다. 어떻게 보면 카산드라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녀의 내부에서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뭘 더 원하지?’란 물음에 카산드라가 그것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 결국은 모두의 바람이라는 걸 느낀다.


22편의 주인공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다. 어떤 단편들은 연작소설처럼 이어진다. 광산 기술자였던 아버지와 몸이 아픈 어머니를 둔 소녀의 인생 이야기라고 할까. 단편 속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어른 나이에 선택한 결혼과 임신, 육아, 그리고 이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러하다. 1943년을 배경으로 한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은 마치 흑백 영화와 같다. 거리에 모여든 아이들, 그리고 어른을 상대로 오르골 화장품 정리함을 파는 대담함. 「여름날 가끔」도 연장선이다. 근처에 제철소가 있는 마을, 아이들은 어른의 근심 걱정을 알지 못하고 돌차기나 공기놀이를 한다. 제련소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상황이 아이들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비스듬한 햇빛에 반짝이는 공터의 유리 조각처럼, 마을 저편으로 몰려가 흩어지는 연무가 역광을 받아 여러 색채를 띠었다. 멋진 파란색과 초록색, 움푹 파인 길에 고인 물에 자동차 기름이 떠서 생기는 강렬한 초록색과 무지갯빛 보라색. 너울거리는 노란색과 붉게 녹슨 색도 있지만 대개는 은은한 이끼 빛이 나는 초록색이 우리 얼굴에 비쳤다. (93~94쪽) 「여름날 가끔」


그런 유년 시절을 보낸 아이는 「순찰: 고딕풍의 로맨스」 속 사춘기 소녀 로라가 된다. 아버지의 지인이 경영하는 농장을 방문하며 그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동안 로라는 이상함 감정에 휘둘린다. 그것이 호기심인지, 사랑인지, 혹은 욕망인지 모른 채 빠져든다. 아픈 어머니 때문에 아이에서 여자로 자라면서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한 「이별 연습」 속 화자 ‘나’도 로라로 볼 수 있다. 칠레를 떠나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비행기 여행을 하는 ‘나’는 그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어머니와 자신에게 보여준 전 없는 표정. 루시아 벌린의 이런 문장을 통해 그 마음이 무언지 알 것 같다. 쓸쓸하고도 외로운 마음.


나는 나이 든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는 너무 늦은 느낌. (157쪽) 「이별 연습」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에서는 마리아가 등장한다. 그녀 역시 이전의 인물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준비되지 않은 결혼, 임신, 육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제3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선택한 결혼, 자꾸만 멀어지는 남편과의 관계. 담배와 술로 채워지는 삶의 일부. 그래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기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고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마리아를 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거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마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이 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165쪽)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놓쳐버린 기회. 한 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172쪽)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표제작인 「내 인생은 열린 책」에서 클레어는 아이 넷을 둔 이혼녀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주목했다. 그녀가 사귀는 남자까지. 클레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개의치 않았고 아이를 돌보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 학기가 끝난 걸 자축하기 위해 외출한 날 막내를 잃어버렸다. 마을에서는 막내를 찾는 동시에 클레어와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클레어 역시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었다. 다행히 막내 아이는 찾았지만 모든 걸 클레어의 책임으로 몰고 있었다. 그냥 운이 나빠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코랄레스로 이사한 건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그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냥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268쪽) 「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의 바람도 클레어와 같았을 것이다. 다정한 엄마,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그녀와 루시아 벌린을 질타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매 순간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비참하거나 절망적인 기운보다는 그 모든 걸 감싸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차가운 눈을 보면서 우리가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녀의 인생과 이야기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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