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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ㅣ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한 권의 시집을 온전히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마음은 풍요롭거나 슬픈 상태다. 내게는 대체적으로 그랬다. 박소란의 시집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조금 슬펐고 조금 기뻤다. 일상의 어느 순간 내가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고 한 사람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가 되었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몇몇 장면은 고스란히 남아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세상과의 단절을 원했던 시절이 달려들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졌다. 시인의 감성과 나의 그것이 같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이런 시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아야 괜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닫힌 문을 두드렸던 다정한 친구에게 이 시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입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감상」, 전문)
이 시집이 기뻤던 건 이런 시가 있어서다. 모든 말들이 시가 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살 수도 있다는 착각을 안겨주는 그런 시라 말하고 싶다. 버스나 지하철, 기차를 타고 내리는 일상에서 한 번쯤 일어날 수 있는 생활 시라고 표현하고 싶다. 감추었던 마음을 어떤 말에 빌려 슬그머니 내려놓는 것, 불쑥 네가 보고 싶어서, 불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한다는 확신. 시는 이래서 좋구나.
불쑥,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아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 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불쑥」, 전문)
그리고 언제나 내가 반하는 단어, 풍경을 만나는 시.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고백하고야 만다. 이런 시가 좋아요, 이런 시를 만나면 나를 한 번쯤 떠올려줘요. 여름의 절정에서 눈이 오는 풍경을 그린다. 아름답게만 내리는 눈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곤혹스러운 존재가 되는 눈. 눈을 헤치며 걷는 일, 그것을 바라보는 일, 그 풍경은 서늘하다. 그 서늘함이 여름을 위로한다.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소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