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며 시를 읽는다. 무엇을 위한 시인지도 모른 채 시인이 무엇을
갈구하는지도 모른 채 읽는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왜 시를 읽는
것일까. 인간에게 시란 어떤
의미인가. 문학이 길을 잃고 독자에게 외면 받은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시를 찾는 건 구원 아닌 구원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작(露雀)
홍사용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노작문학상의 2016년 수상작 신동옥의 시는 유려한 언어의
사유가 아니다. 삶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인간의 고통과
시인 스스로의 성찰을 담았다. 하여 낯선 언어지만 익숙한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저수지」를 보면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난 살풍경한
저수지를 떠올린다. 그러다 점차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인간과
마주하는 것이다.
‘죽은 것 산 것 몽땅 다 저 속에 있다
/ 온몸에 뼈란 뼈는 /
죄 부셔져
/ 불로 돌아가고 바람에 흩어져라
/ 눈보라 치듯 휘돌다가 /
피리 소리를 내며
빨려든다 / 소용돌이친다’
「저수지」 부분
물은 생명을 키우는
젖줄이다. 한때는 풍요로운 단물이 가득했지만 어느 순간
수몰되거나 썩어버리는 것을 인간의 생과 닮았다. 버려진 저수지가 되고
만다. 결국엔 사그라지고 쇠락하는 검은 짐승을
애도하는 시는 순수한 문학의 정수, 시 본연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시적
아름다움에서 매몰되지 않으려는 시인의 자아를 볼 수 있다.
시인의 번뇌와 고뇌를 반영한
「퇴고」의 첫 부분 ‘아름다운 시를 얻는 밤에는 울음도 없이
흐느끼는 꿈을 꾸었다. 먼 곳에서 문장을 좇아 말을 달려온 이
하나, 인적이 드문 꿈의 빗장을 밀다가는
두드렸다’에서는
다른 자아가 등장한다. 한 없이 유려해서 「고래가 되는 꿈」 의 ‘이 땅을 버리고 /
맨 처음 바다로
나아간 한 마리 고래가 되어서 / 내 남은 숨 모두 들이켜고도
/ 차고 넘칠 퀴퀴한 추억에 익사하던 어느 먼
옛날 / 전생의 힘을 빌어서 끝장내지 못한 미련은
/ 나도 모를 누구의 꿈결을 텀벙거리고
/ 치달리고 달리까?’는 「저수지」의 검은 짐승과 이어진
듯하다.
신동옥의 시는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 문이 너무 거대해서 손잡이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런 시를 보자.
「우주백반」 은 ‘여자는 백반처럼 늙었다’로 시작해 ‘여자는 백반처럼 늙었다’로 끝난다.
삶이라는 투쟁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전체를 다 읽지 않더라도 그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비루한 삶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지는 건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세계로의 확장, 그러니까 다른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신동옥의 시를 읽다 보면 이미지가 허상이
아닌 실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의 아름다운 동상들」이 그렇다.
동화 속 마법을
연상시키는 운율은 현실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아 뿌린다. 시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당신의 살인자마저 살해당하는 나라에서는 누구
노래를 끝마쳐야 하나요? / 나의 아름다운 동상들,
우리의 영혼은 짐승의
냄새를 경작하고 있습니다 / 파도가 끝나는 곳에 구름이 구름이 끝나는
곳에 바람이 일 듯 / 소금 호수를 걸어간 파리한 사나이
/ 제 피의 농도를 가늠하며 피눈물을 한 방울씩
떨구네요’
몇 편의 시를 읽고 신동옥 시의 내부를 다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외부에서 내부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추천우수작인
김근, 김성규,
김중일,
안상학,
오은,
정병근,
하재연,
허연 시인의 작품을
보면 저마다의 리듬이 느껴진다. 자신만의 고유한 방향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발견한다.
절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에 대한 단상을
단호한 시로 노래하는 김중일의 시는 편안하면서도 오랜 여운을 남긴다. 아마도 시를 통해 우리네 슬픔을 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높이로 날아오는
새」를 보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새가 바로
우리이므로.
‘아주 작은 새가 있었다. /
먼지보다 작은
새였다. / 제 그림자로 세상을 고이 덮으려던
새였다./ 깊고 깊은 높이로 날아오른 새가
있었다. / 날 새도록 새는 날고 날았다
/ (중략)
우리는 모르는 새 그
새의 그림자를 걸치고 살았다. / 날았다 우리도 날개사 다 녹도록
날았다. / 새와 함께 새파란 하늘이
되었다. / 결국 그 새는 세상의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
다다랐다. / 희생자의 무덤 위였다.’
경쾌하면서도 쉽게 다가오는 일상의 풍경을
그린 오은, 시어의 반복으로 재미를 주면서도 자조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김근, 적막과 고독을 평범한 일기처럼 써 내려간
김성규, 기이하게도 물질에서 인간의 세계를 구축하는
하재연, 가장 보편적인 일상을 친근하게 들려주는
안상학, 되돌릴 수 없는 아픈 생을 가만히 바라보며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내려는 허연의 시는 문득 서러운 삶을 세상에 내 놓고 통곡해도 좋다는 허락 같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들에게 삶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시 하나일 것이다. 안과 밖을 오가며 수많은 말을 고르는 삶의
고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무딘 세상에 스스로 날카로운 창이
되기를 바란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시를 쓰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신동옥의 이런 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시를 위한 각오를 응원할 뿐이다. 오랫동안 경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멀리 퍼지기를 말이다.
‘속죄하는 마음에서 /
나는 오늘 여기
吉音에서 죽고 /
나는 드러누울
것이다./ 모든 동물이 꼭 제 몸뚱이만 한 무덤을
남기도 가듯이 / 우선 일생 나를 끌고 온 그림자를
/ 발바닥에서 떼어 /
여기
吉音에 묻어두고 /
시작하겠다.’
「드러누운 밤」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