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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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닷없이 찾아온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밤들이 있다.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외마디 외침을 쏟아냈다. 무작정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잠들려고 몸을 둥글게 말아 뒤척이다 결국엔 불을 켜고 앉았다. 눈이 부셨다. 다스릴 수 없는 몸의 시간을 어찌할 수 없어 잠깐 울었다. 그런 밤에 마주한 게 침묵이었다. 읽다 만 한강의 소설을 잡았을 때 확인할 수 없는 내 얼굴에도 새 같은 무엇인가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했다.

 

 ‘기척 없이 그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의 얼굴 속에 새 같은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따스한 감각이 그녀에게 즉각적인 고통을 일깨운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147쪽)

 

 두 번째 읽는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은 아주 천천히 내게로 왔다. 처음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침묵의 결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팠다. 들릴 듯 말듯한 가냘픈 음성이 있었다. 그래서 더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여자는 이혼을 했고 아이를 빼앗겼고 엄마가 죽었다. 모든 것을 잃은 여자는 어느 시절 말을 잃었던 것처럼 다시 말을 잃었다. 여자는 언어를 되찾기 위해 어떤 구원을 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운다. 원하지 않았던 침묵이었기에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한 듯한 삶이지만 침묵의 세계는 고요하지 않았다. 크고 굵은 소리들이 그녀를 둘러싼다. 오직 아이의 음성만이 그녀에게 웃음을 주고 평화를 안겨준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곧 그의 삶에는 빛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열다섯 살 독일로 떠났다가 십칠 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처럼 시력을 잃다가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남자의 삶에서 선명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학원에서 희랍어를 가르치기 위해 문장을 쓰고 외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와 남자, 보편적인 삶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이 놓여지만 그들에게는 지극히 보편의 삶이다.

 

 깨지지 않는 침묵이 흐르는 확장되지 않는 빛의 공간에서 여자와 남자는 대화를 나눈다. 여자의 기척을 느끼며 그저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는 남자. 그것은 결코 고통의 사랑이 아니었다. 잔인한 기억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사랑, 위대한 사랑, 고귀한 사랑이었다. 손끝으로 울리지 않는 소리를 적어 답하는 여자. 몸으로 익힌 자신의 공간에서 여자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채집하려 한다. 마치 소리가 처음으로 잉태되던 태고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결핍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184쪽)

 

  단순하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라 말할 수 없다. 사랑, 혹은 구원을 말하는 소설이라 말할 수도 없다. 여자가 말을 잃었고 남자가 빛을 잃어서가 아니다. 거기, 당신이 있기에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침묵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소멸과 상실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의 떨림이라고 해야 할까. 스치듯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당신의 기척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통과 통증의 크기를 잴 수 없고 그 끝에 무엇이 올지 모른 채 살고 있는 나에게도.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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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08-1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지 마세요...

2016-08-1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6-08-1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마음 아파요.

자목련 2016-08-11 18:03   좋아요 0 | URL
한강의 소설은 대체로 많이 아픈데 <희랍어 시간>은 더욱 애잔했어요.
더위가 사그라들지 않네요. 그래도 곧 가을이 온다고 생각하니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