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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평점 :
세사르 아이라의 『바라모』는 1923년 파나마 콜론의 공무원 ‘바라모’가 월급을 받은 순간부터 열두 시간에 걸쳐 쓴 시「아기 예수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연 독자는 시 「아기 예수의 노래」의 전문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어떤 시이기에 라틴 아메리카에 시의 걸작으로 찬사 받는지 궁금하니까. 단 한 번도 시를 쓴 적이 없는 바라모가 쓴 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주목할 건 월급을 받는 순간부터다. 바라모가 월급으로 받은 이백 페소(100페소짜리 두 장)이 위조지폐였던 것이다. 받은 순간 알아차렸지만 바라모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공무원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위조지폐라도 상관없던 것일까.
광장으로 나온 내내 바라모를 지배하는 건 위조지폐. 왜 아니겠는가.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진 그 앞에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는 남자다. 정부 청사의 운전기사로 공무원들에게 판 돈을 대주는 도박단이기도 하다. 오늘이 월급 날인 걸 알고 빚을 받으러 온 것인가. 아니었다. 노련한 도박꾼인 어머니가 딴 돈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쯤이면 그 시절 파나마가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공무원도 도박을 하는 사회. 그렇다면 위조지폐 유통도 만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라모가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수중에 진짜 돈이 생겼으니 뭐라도 먹기로 한다. 땅이 떨어졌다고 몸이 신호를 보내니. 젤리는 파는 여자에게 주사위처럼 생긴 빨간 젤리를 산다. 여자에게 줄 동전이 없어 운전기사에게 받는 1페소를 건넨다. 너무 큰돈을 받은 여자는 거스름돈을 구하기 어렵고 그걸 보던 신체 불구자가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나선다. 바라모는 자신에게 잔돈이 없음을 미안해한다. 여기서 신체 불구자의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잘못은 화폐를 제대로 발행하지 않아서 액면가가 낮을수록 일반 대중에게 더욱 희귀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야기한 통화 당국에 있다고. (18쪽)
이런 문장을 곳곳에서 마주하는데 이 소설이 그 시대의 파나마를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젤리를 손에 들고 광장 중앙으로 가는데 미친 남자가 빚을 갚으라며 달려든다. 노상 있는 일이라 동건을 건네며 빚 갚았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젤리를 든 손 때문에 힘들다. 정작 젤리는 먹지도 못하고 흘러내려 버려야 하는데 휴지통은 없고 화단 쪽의 풀밭에 버리려다 키 큰 관목의 가지 끝에 젤리를 꽂았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바라모와 독자인 나도 진이 다 빠졌다. 근데 위조지폐는 어쩌지.
집에 왔지만 쉴 수가 없다. 공무원의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려워(거기다 도박까지 하고 있으니) 바라모는 취미인 동물 박제로 언젠가 돈을 벌기를 꿈꾸며 오늘도 물고기를 만진다. 그는 물고기에 관련된 것이라면 아마뤼 사소해도 일일이 기록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도착해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며 보여준다. 내용은 협박이었다. 어머니가 파나마로 이주한 지 오십 년이나 지났지만 두 모자에게는 사그라들지 않는 소문이 있었다. 바라모의 생물학적 부모에게서 훔쳐 왔다는. 중국인 어머니, 누가 봐도 중국인인 바라모를 보면 그럴 리가 없지만 어머니에겐 남편이 없었다. 어머니를 달래고 뒷면을 보니 매트리스 영수증이었다. 언젠가 바라모가 어머니와 함께 매장에서 직접 가지고 온 매트리스. 그토록 찾을 때는 사라지고 없던 영수증. 바라모에게 종이가 추가된다. 호주머니 속의 종잇조각들.
어머니가 준비한 저녁을 먹고 바라모는 자신의 평소 루틴대로 카페를 찾는다. 여전히 위조지폐를 생각하면서. 경찰이 자신의 주머니 속의 실체를 알 것 같아 두렵다.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구나 싶은 게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퇴근할 때 만난 정부 운전기사가 사고 피해자였고 바라 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차 안에는 경제부 장관이 있었다. 사고가 아닌 테러였고 장관이 임시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는 가정집에 옮긴다. 그 집은 바라모도 아는 공고라 집안이었는데 자매가 사는 줄은 몰랐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골프채 밀수로) 처음 알게 된다.

공고라 집안에서 나와 카페에서 바라모가 합석한 세 명의 신사들과 대화를 나눈다. 늘 카페에서 봤던 그들이지만 합석은 처음이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들은 해적판 출판업자로 바라모가 출판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해 글을 쓰냐고 묻는다. 바라모에겐 기록(물고기)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 퇴근길에 광장에서 들었던 클라리온 소리까지 기록하는 바라모인 것을.
그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날 기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 나중에 혹시 이때의 기록이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모지를 잘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35쪽)
그럼 원고료는 얼마인가? 어쩌면 당신이 예상했을 이백 페소가 맞다. 거기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바라모의 말에 그들은 네 다섯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내 호주머니에 이백 페소가 들어온다고. 아, 이처럼 쉬운 일이었던가. 골칫거리 위조지폐 2장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해묵은 쓸데없는 습관, 즉 손에 들어오는 모든 종이 쪼가리를 보관해 두는 습관이 결실을 맺는 때였다. (104쪽)
그의 눈앞으로 광대한 사막 같은 황량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야자수, 어둠에 잠긴 정부 청사들 그리고 적막을 가로지르며 태엽 장난감처럼 외로이 굴러가는 자동차. 그는 잠을 자느라 이러한 장관을 늘 놓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것이 작가의 특권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향수에 젖었다. (106쪽)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 위조지폐는 진짜 돈이 되었고 기록하고 모아둔 습관은 책이 되었다. 한낱 말단 공무원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던 바라모는 작가이자 시인이 되었다. 예술의 재료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그것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바라모처럼. 1923년 부패한 파나마이라서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글쎄, 지금 여기는 그곳보다 나은가? 정답을 안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월급으로 받은 위조지폐 두 장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수많은 곁가지를 만들어 확장한다.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가장 놀라고 감탄한 부분은 카페를 나와 광장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에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무 꼭대기 위아래로 ‘8’자와 ‘Z’자를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그 자리는 바라모가 젤리를 꽂아둔 그 가지였다는 것. 그 모든 게 풍자였고 폭로였다. 암시였고 복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