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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나라는 통증 - 비로소 나아가는 읽기, 쓰기
하재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나의 글쓰기는 결핍 속에서, 통증에 의해 형성되었다. 통증은 단순한 병리적 증상이 아니라 존재가 세계와 마찰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미세한 감각이다. 또한 말이 채우지 못한 자리에 발생한 공백이자, 말이 넘쳐 흐른 자리에 생겨난 잉여다. 이 낯선 감각은 기억과 몸, 타자와 언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내가 지극히 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10쪽)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린다. 미련하게도 참는다. 오랜 시간 약을 먹었기에 약을 줄이고 싶은 마음인지 모른다. 그러다 약을 먹는다. 통증이 사라진 이유가 약 때문인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인지 알 수 없다. 이 통증은 나밖에 모르기에,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다 한들 나의 고통을 상대는 모른다. 그걸 알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통증은 언제든 나를 습격한다. 나를 지배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이 하재영의 『지극히 나라는 통증』이 궁금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통증을 다루거나 통증의 경험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다른 지면에 발표한 글과 다양한 주제를 풀어낸 에세이다. 그건 저자에게만 닿은 고유한 감각과 생각일 수도 있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관심 있게 짚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지극히 나라는, 개인적인 서사는 타인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상처와 고통, 과거의 트라우마를 꺼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했다면 다르다. 아니, 그 이야기를 꺼낼 창구가 있다면 괜찮다. 창구가 있다면 들어줄 이가 있다는 것이니까. 저자가 12년 전의 상처를 꺼내고 정신의학과를 다니고 변호사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의미가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트라우마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잔인한 상흔으로 남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다.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쓴다는 건 복잡했던 무언가가 풀리는 순간이며 말하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태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내며 잘못된 사회적 시선에 대해 말한다.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진다. 발레를 위한 몸을 위해 감수해야 했던 시간, 그러나 끝내 발레에 적합한 몸이 아니라서 선생님에게 비난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날씬하고 마른 몸 뒤에 숨겨진 폭력의 언어와 폭식. 성년이 되면서 이어진 굶기와 하이힐의 높이로 채워진 몸.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고 여성은 주입받는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정녕 그건 당연한가.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독자라면 자신의 몸을 보게 될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지불한 시간과 돈,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한 나, 그러니 획일된 몸은 사라져야 한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은 술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알코올사용장애’라고 설명한다. 적당한 취기는 효과적인 사회적 가면이라고. 술을 마시지만 원고 마감을 어긴 적도 없고, 취재나 강연에 늦지 않았고, 집안은 깨끗하고 정리되어 있고 공과금을 연체하지 않았다고. 중독에 관해서는 ‘술’대신 다른 것들로 채워질 수 있다. 스마트폰, 연애, 커피, 쇼핑, 게임. 과연 중독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될까. 아니 가능이나 할까.

현대인은 자율적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비자율적인 쾌락에 기대 특정한 행위를 반복한다. 더는 중독을 비참하게 훼손된 인간의 징표로만 여길 수 없다. 대상과 정도는 다르지만 무엇인가에 얼마만큼은 중독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공동의 운명에 처해 있다. (92쪽)
이처럼 자신의 통증(경험)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그 경험을 터놓을 수 있는 시작,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키우던 반려견의 죽음을 통해 느꼈던 슬픔과 상실, 나아가 반려종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나는 반려인이 아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반려동물의 죽음을 통한 상실은 가족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려 한다고 해도 온전히 알 수 없다. 또한 유기견 센터에 모인 버려진 개에게 좋은 입양자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말 잘 듣는 개라는 소개는 결국 키우기 쉬운 개라는 말이며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말한다. 생명체로 대우하기는 어려운 일인지,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환경보호 정책으로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운행이 금지된 곳에서 그것들을 대신한 말의 노동력은 괜찮은가 묻는다. 그런 풍경을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할까. 관광지에서 말을 타고, 말이 끄는 마차를 타보았지만 동물노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기에. 인간의 필요와 이익이 최우선 순위인 시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는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믿음을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만났던 공간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애틋하고 울컥한다. 그것은 여성의 공간, 여성의 글쓰기로 연결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가부장제에 편입되면서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인 여자는 어디에나 있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고 자신만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사람이라 말했던 엄마의 말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침묵해야만 했다.
한때 우리는 침묵으로써 우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지금은 존재한다는 것이 곧 말한다는 의미임을 안다.나 자신으로서 말하기, 위반된 언어로 말하기, 단상 위에서 말하기. 또다시 내면의 유혈사태를 겪더라도 나는 잃어버린 것을 회고함으로써 계속 말하고 싶다. (248쪽)
무엇이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 말하고 쓰는 것. 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이 왜 두려운 것이 되었을까. 잘 쓰고 싶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잘 쓴 글이 아닌 나를 쓰는 일을 중요하다. 솔직하고 정직한 나를 쓰는 일, 나의 통증을 마주보고 나를 쓰고 싶다. 그 가능성을 믿는 일, 그게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