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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돌아가신 할머니는 일본 말을 할 줄 아셨다. 나이가 많으니 전쟁을 겪었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옛날이야기 정도로 여겼다. 제목부터 기이하고 불온한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조예은의 『적산가옥의 유령』 을 읽으면서 소설 한 귀퉁이에 할머니와 비슷한 삶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통과 공포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처럼 말이다.
4대에 걸쳐 이어진 적산가옥의 이야기다. 주인공 현운주의 외증조할머니 박준영의 유산으로 남긴 적산가옥. 일본식 정원이 있고 본채와 별채로 구성된 낡은 집. 일본에서 지내던 운주는 준영의 유언대로 적산가옥에서 1년을 지낸 후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를 할 생각으로 남편 우형민과 함께 돌아왔다. 남편은 일본에서 운주가 힘들 때마다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운주는 집에 도착해 별채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보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운주가 본 건 무엇일까. 정말 적산가옥의 유령일까. 바로 그 별채가 이 소설의 가장 핵심 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잠작이 가지 않았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적산가옥을 둘러싼 비밀을 들려준다. 일제 강점기 시대 붉은 담장의 집으로 일본 무역상 가네모토와 그의 아내 하나코와 아들 유타카가 이사를 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준영은 시간이 흐른 뒤 입주 간호사로 그 집에 들어간다. 자신을 추천한 병원장은 자세한 말은 아낀다. 그 집에 도착하자 준영은 자신이 누구를 간호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준영을 맞이한 건 가네모토의 아들 유타카의 기괴한 행적이었다. 악취로 가득한 방, 물고기를 해부한 흔적만으로 정신 병동의 환자를 떠올렸다. 이상한 건 그런 아들을 대하는 가네모토의 태도였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아픈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이나 애처로움은 찾을 수 없었다.
준영은 자신의 일만 하면 그만이라 여겼다. 유타카를 치료하며 받은 월급으로 일본에 있는 오빠와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여동생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타카가 가네모토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된 후 유타카를 향한 연민을 느낀다. 유타카의 몸에 난 상처는 정신적 이상으로 자해를 한 게 아니라 양부에 의한 것이이며 그때마다 유타카는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별채의 지하에서 그 모든 게 벌어졌다. 유타카의 예지력으로 가네모토는 부를 축적했다. 유타카는 자신의 미래도 볼 수 있었다. 원자폭탄, 일본의 패망, 아버지의 죽음. 그가 기다린 건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일까.
준영이 적산가옥에서 유타카를 돌보았다면 현재의 운주는 꿈에서 유타카와 준영을 보았다. 이상한 건 꿈에서 깨어도 현실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정한 남편은 운주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나아지지는 않는다. 별채에서 본 누군가를 확인하면 아무도 없었다. 분명 별채의 바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말이다. 과거 별채에서 행해진 폭력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랬다. 운주의 사망 보험금을 목적으로 결혼한 남편 형민의 계획적인 폭력이었다. 운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유타카의 유령이 나타난 것일까. 그 모든 것을 유타카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적산가옥은 다시 타올라야 한다. 벗어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므로.
본채와 별채가, 수도관과 정원과 나무 기둥이 하나의 기관처럼 이어져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다. 그런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10쪽)
공간이 지닌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한다. 문득 공간으로 지배하려던 일제의 교묘한 악랄함에 치가 떨린다. 역사적 배경을 잘 곁들인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과하지 않고 적절하게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며 일제 강점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적산가옥을 통해 숨겨진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공간에 유타카의 유령이 나타나 그들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운주가 자신을 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