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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평점 :
너는 나와 다르다. 당연하다. 달라서 너에게 끌렸다. 달라서 너를 좋아한다. 달라서 너를 모르겠다. 그래도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젠 안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건 우리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걸. 그냥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지지하며.
천쓰홍의 『67번째 천산갑』 속 ‘그녀’와 ‘그’를 보면서 그런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확인한다. 둘은 어린 시절 침대 매트리스 광고 모델을 했다. 어려운 건 없었다. 침대에서 편하게 잠들면 됐다. 소년과 소녀는 처음부터 아주 잘 잤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잠 친구였다. 편안한 둘의 모습 덕분에 광고는 성공했고 소년과 소녀는 유명세를 치렀다. 모델을 시작으로 소녀는 방송에 자주 등장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트리스 광고 꼬리표가 붙었다. 그것은 소녀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다.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엄마를 향해, 대학 시절 남자친구와 연인에게, 모델 광고 속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남편에게도. 안타깝게도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녀의 현재도 다르지 않았다. 타이완 거물 정치인의 아내가 되었고 장성한 자식도 두었지만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타이완이 아닌 파리의 비좁고 남루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연인 J를 떠난 보낸 슬픔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이어갈 뿐이다. 도대체 그에겐 어떤 시간이 있었던 것일까. 유년 시절 그토록 친밀했던 그와 그녀는 서로의 삶을 모른 채 중년이 되어 마주하게 된다. 과거 함께 촬영한 영화 때문이다. 어린 시절 천산갑과 함께 찍은 영화로 현재 4K로 복원되어 낭트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초정 된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 등장하는 그 천산갑은 아주 예민한 동물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돈을 목적으로 천산갑 양식을 시작하지만 천산갑은 소년에게만 자신을 내준다. 마치 소년이 동족인 것처럼. 어쩌면 소년은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천산갑과 함께 잠드는 신비로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아이라면 나를 잠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 파리에 도착한 이후 그의 곁에서 그녀는 푹 잘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선 뭐든 말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을 지나 학창 시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었던 그에게 그녀는 수다쟁이가 된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1030/pimg_7630901654478027.jpg)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와 그녀의 삶을 들려준다. 그가 사랑한 J에 대해서, J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녀가 잃은 어린 딸 ‘팡싼’을 향한 애틋함과 소식이 닿지 않는 아들에 대해서. 삭제된 줄 알았던 기억의 장면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팡싼의 마지막 모습, 어린 누나를 보러 온 아들, 자신에게 돈만 요구하다 쓰레기 집에서 고독사한 엄마. 그를 찾았던 시간. 그녀의 모든 걸 아는 그에게 토해내고 싶었던 순간. 그도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녀가 찾는 아들의 소식이다. 파리에서 만난 그녀의 아들을 만났다는 것, 아들과 사랑을 나눴다는 것. 그녀의 남편은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병이라 치부하고 고치려 했지만 그녀는 아들과 함께 달아난다. 그 순간 그녀는 그를 떠올렸을까?
그의 파리 아파트에서 아들의 안경을 발견했지만 그녀는 묻지 않는다. 그의 곁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파리를 산책하고 천산갑을 닮은 미끄럼틀에서 비를 본다. 그가 만나는 이상한 사람을 함께 만난다. 요가하는 남자, 헤어숍 원장, 숲에서 맨몸으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그 모두가 그가 J를 통해 맺은 관계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아들도 함께 했을 거라 생각한다. 서로가 닮은 사람들. 이제는 그녀도 그들을 닮아간다. 그 모두가 67번째 천산갑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영화 같기도 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여행 같기도 하니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 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133쪽)
그와 그녀는 낭트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니 도착지가 낭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미 낭트여도 어디든 갈 수 있다. 그와의 작별에 미소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그의 길을, 그녀는 그녀의 길을 갈 것이다. 어디 있든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지지한다는 걸 안다. 파리와 타이완을 배경으로 만든 한 편의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를 본 기분이다. 숨은 천산갑을 찾는 느낌이랄까.
너와 나는 다르다. 너를 알아가는 중이며 조금씩 닮아간다. 서서히 스며든다. 그러다 달라서 부딪히고 달라서 반했지만 끝내 이별한다. 너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그걸 배운다. 다르다는 건 이처럼 굉장하다. 다른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