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0
이장욱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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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겹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읽으면서 겹이 벗겨지는 순간과 마주하면 짜릿함을 느낀다. 작가가 만든 겹을 독자가 걷아내는 일, 벗겨내는 일을 재독이나 삼독에서 가능할 것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겹을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읽은 이장욱의 소설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은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겹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나는 그 겹을 걷어내지 않았다. 아니 걷어낼 수 없었다.

대체로 인간은 복잡하지만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시스템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자의로 누군가는 타의로. 이장욱의 소설 속 인물도 그렇다. 소설을 이끄는 화자 ‘연’과 ‘천’은 연인의 죽음과 부재로 남겨진 사람이다.

연은 남편 ‘모수’와 함께 ‘해변 여관’을 운영한다. 말이 운영이지 조만간 철거가 예정된 곳이다. 바다가 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곳의 허름한 여관을 찾는 이가 없다. 모수가 병으로 죽고 연은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낸다. 모수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고 모수의 짐을 정리한다. 연극배우인 천은 연인인 ‘한나’가 떠나자 방황하다 해변 여관에 투숙한다. 연과 천은 종종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는다.

‘연’과 ‘천’이 번갈아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모수와 연, 한나와 천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모수는 도청 공무원이었고 기록하는 자였고 방송국에 제보했고 파면당했다. 연은 이혼 후 모수를 만났고 인연을 맺었다. 천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한나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한나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옛 연인에게 돌아가면서 헤어졌다. 해안선이 침식되는 섬, 그곳의 해변 여관처럼 연과 천은 폐허의 삶을 살아간다. 연은 사라질 여관을 떠나지 않고 천은 그곳에 머문다.


모수는 일기를 쓰는 사람이고 말이 없었고 정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았다. 사실만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연은 생각이 말로 흘러나오는 사람이었고 모수의 말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모수가 떠나고 그가 남긴 노트는 정리하지 못한다. 모수의 유령이 볼 수도 있으니까. 그것이 연이 모수를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돌아오지 않을 한나를 그리워하는 천도 다르지 않았다. 국지전이 일어나고 지구는 뜨거워지고 무서운 태풍이 오는 세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국가는 개인의 상실이나 상처 따위는 관심이 없고 바다는 밀려왔다 쓸려가고 세상은 점점 더 나쁘게 돌아가니까. 모수가 일기를 쓰는 일은 그런 세상을 견디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똑같은 하루는 없잖아요. 매일이 다르잖아요. 일기를 쓰면 그런 게 느껴지는데.” (87쪽)

매일 같은 날씨는 없으니까. 똑같은 하루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하루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간다는 건 분명 매일은 다른 삶이니까. 한나는 천이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천이 배역의 삶이 아닌 천 스스로의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천이 한나를 따라 사막으로 취재 여행에서 한나가 한 말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에서.” (126쪽) 은 소설을 관통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

연의 중얼거림을 따라서 천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자신이 해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 말을 한 것이 한나였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연의 중얼거림이 듣기에 좋았고 듣기에 좋은 것은 따라 하기에 좋을 따름이었다. 천이 제 말을 따라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연이 그를 바라보았다. 천도 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선 너머의 망망대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은 몽상가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고 옛사랑을 추억하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천도 마찬가지였다. (154쪽)

해변 여관 옥상에서 연이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리는 말도 그것이다. 쏟아질 듯한 이 여름의 열기를 살아내는 나에게도 필요하다. 단지 살아가는 사람, 어떤 세상이 와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남겨진 자로 살아가는 모두를 위로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여전히 슬픔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남겨진 자의 곁에 머물려 떠도는 모수의 유령 같은 이들에게도.


나는 이장욱의 아름다운 겹을 벗겨내지도 걷어내지도 못했다. 봄에 읽고 여름에 다시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세계라서, 그 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그 뜨겁고 황홀한 겹에 갇히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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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할 수 없어서 좋았다‘ 는 자목련님의 구절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자목련 2024-08-08 07:13   좋아요 0 | URL
마힐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4-08-0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좋네요.
제목만 읽어도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은 책입니다.
나중에 책소개를 조금 더 읽어보고 싶어요.
자목련님,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4-08-10 10:59   좋아요 1 | URL
네, 제목이 좋지요!
입추 지나고 아주 쬐끔 달라진 것 같지만 여전히 더워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