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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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는 자매가 있다. 투정 비슷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어머니가 죽기를 바란다. 제발 모든 걸 끝내고 떠나주었으면 한다. 그게 어머니를 위해서도 자매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라고. 설마 그런 딸들이 있을까 싶지만 오랜 시간 자식들 집을 오가며 지냈던 할머니를 떠올리면 고모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즈무라 미나에 장편소설 『어머니의 유산』 속 ‘나쓰코’와 ‘미쓰키’도 그랬다. 자신밖에 모르는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자매의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녀를 위해 희생하거나 인내하는 어머니가 아닌 모든 일의 우선이 자신이었다. 허영과 사치가 가득했고 자신이 원했던 삶의 욕망을 딸들에게 투영시켰다. 그럴 수 있다. 그 덕분에 자매는 피아노를 배우고 파리로 유학도 다녀왔다. 언니 나쓰코는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 부유하게 살고 미쓰키도 교수인 남편을 두고 자신도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늙은 어머니를 챙기고 다치면 병원에 모시고 간병을 하는 일, 당연한 자식의 도리 같지만 미쓰키 혼자서 감당하는 일은 벅찼다. 어려서부터 언니만 예뻐하고 차별했던 어머니를 어쩌다 자신의 몫이 되었을까? 어머니를 ‘그 사람’이라 칭하는 언니 나쓰고.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소개한 남자와 결혼한 나쓰코는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른 남자가 생겼다.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지 않았고 나무랐다. 그 이후로 둘 사이는 거리가 생겼고 대신 미쓰키가 어머니를 더 챙기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곁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자식에게 닥친 남편의 외도로 고민하는 오십 대 미쓰키의 복잡한 내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막대한 유산을 남긴 어머니, 어머니의 유품을 챙기며 자매는 어머니를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틋함이나 그리움 따위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어머니, 외할머니의 인생을 떠올리면 같은 운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 게이샤였던 외할머니, 사생아로 태어난 어머니를 위해 하녀처럼 살았던 외할머니와 그런 엄마에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영악했던 어머니. 첫 결혼에서 낳은 딸을 버리고 아버지를 선택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버린 어머니. 노년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사고로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


인생에는 계절이라는 것이 있다. 인생의 봄에서 한여름까지는 뭔가를 요구하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어머니에게 미래를 주고 있었다. 그것은 딸들에게도 미래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단풍이 짙어지고 나서는 어머니의 강한 욕망이 겉돌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이 되어도 계속해서 허덕이는 어머니는 어쩐지 섬뜩했다. (197쪽)


미쓰키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비유를 맞추고 음식과 필요한 물건을 사 나르고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위한다. 강의와 의뢰받은 번역도 쉬지만 미쓰키는 그런 어머니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고 어머니와 같이 왔던 호텔에 시간을 보내면서 미쓰키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프랑스 유학에서 만난 시간, 다락방에서의 프러포즈, 몇 번의 외도와 현재의 외도까지.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있어 남편과 이혼을 해도 괜찮다. 지금처럼 좋은 맨션에서 살 수 없고 강의도 해야 하고 번역을 하면 살아야 하지만 충분하다고 여긴다.


젊은 때는 추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늙음’이 두뇌와 전신을 덮칠 뿌만 아니라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모두를 덮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을 향해 살아갈 뿐인 인생인 것인가. (491쪽)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걸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납득하지 못하고 포기한 기억은 응어리처럼 남는다. (533쪽)


『어머니의 유산』은 처음에는 어머니와 딸의 지지부진한 관계가 식상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점차 읽을수록 여성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이며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진하게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의 죽음과 모녀 삼대의 이야기를 『이방인』과 『마담 보바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녹아낸 점도 인상적이다. 노년을 향하는 삶, 노년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감정이 이 소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유산』이란 제목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의미, 절대 단순할 수 없는 특별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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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2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한 리뷰를 느낄 수 있네요.

자목련 2023-06-28 12:28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 그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3-06-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지만 그러지 않는 부모도 많으니까요^^

자목련 2023-06-28 12:29   좋아요 2 | URL
딸은 엄마의 마음을, 엄마는 딸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겠지 싶어요. 부모와 자식,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관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