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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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상실과 슬픔을 배운다. 아니, 배우는 게 아니라 체득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상실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는 이가 없다. 자신의 슬픔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고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른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의 감정을 돌볼 여력이 없다. 아이는 눈치껏 감정과 말을 숨긴다. 사랑하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누군가 그게 성장하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아지고 괜찮아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 곁에서 그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래줘야 한다. 『눈부신 안부』속 어린 ‘해미’는 스스로가 그런 역할을 자처했다. 1994년 가스 폭발 사고로 중학생이었던 언니를 잃고 엄마와 아빠는 슬픔에 침잠한다. 해미와 다르게 동생 해나는 마냥 즐겁다.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했고 해미는 유학을 결정한 엄마와 해나와 함께 ‘행자’ 이모가 있는 독일 G시로 향한다. 행자 이모는 파독 간호사로 일하다 지금은 의사가 되었고 같은 처지의 다른 이모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곳에서 ‘마리아’ 이모와 ‘선자’ 이모를 만나고 조금씩 독일 생활에 적응한다. 언니를 잃은 슬픔이나 낯선 독일에서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해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건 엄마가 아닌 행자 이모다. 한 번씩 산책을 하면서 해미를 웃게 하고 본연의 모습을 찾게 만든다.


해미가 독일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안정이 되기 시작한 건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를 만나고부터다. 가족끼리 만나고 왕래를 하면서 서로가 독일어와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친해진다. 그러다 한수의 부탁으로 셋은 단단한 사이가 된다. 한수의 엄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다. 아픈 엄마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은 한수의 부탁에 레나와 해미는 적극 동참한다. 광부로 일하며 엄마와 결혼하고 이혼한 아빠가 아닌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첫사랑. 단서는 ‘K.H’란 이니셜 하나다.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몰래 읽으며 이모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애 소설을 쓸 거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기 위한 해미의 거짓말에 다른 이모들은 선자 이모에 대해 아는 걸 알려준다.


선자 이모를 비롯해 이모들이 처음 독일에 왔던 이야기, 각자 독일로 온 사연, 독일에서 일을 하면서 겪은 서러움과 향수병, 휴일마다 고추장, 간장을 차에 싣고 이모들을 찾아온 파독 광부들. 그 안에서 단서를 찾으려 온갖 추리를 하고 상상하는 하면서 해미는 레나와 한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국의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해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엄마와 아빠의 별거는 끝났지만 여전히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들다. 당연 한수와 레나와의 연락도 끊기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 기자 일을 하다 그만둔 해미는 우연히 사진작가 전시회에서 대학 동기 우재를 만나다.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약국을 운영하는 우재와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만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낸다. 우재는 오래전 해미가 이모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기억을 꺼낸다. 해미는 우재의 말에 독일 G시에서의 시간과 선자 이모와 한수를 떠올린다. 선자 이모의 죽음과 한수가 보낸 택배, 독일에서 걸려온 한수의 전화를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한수가 보낸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상자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다. 선자 이모를 위해 ‘K.H’를 찾았다는 거짓말과 ‘K.H’인 척 편지를 보낸 사실까지.


해미는 다시 하나씩 이모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국회도서관에서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간호사의 기록을 찾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독일로 온 사연, 취업과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건너간 이들도 많았지만 선자 이모는 아니었다. 선자 이모는 본인이 원해서 독일을 선택한 것이다. 해미는 선자 이모의 고향인 인천과 다녔던 교회를 수소문하면서 ‘K.H’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그러다 이모가 문학잡지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독일에서 처음 읽었을 때 그냥 지나친 문장이나 선자 이모의 감정을 온전히 읽게 된다. 선자 이모가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속 문장(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의 의미를 말이다.


『눈부신 안부』는 독일 파독 간호사를 통해 그 시대의 여성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와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가 중요한 소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상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어린 해미가 사고로 언니를 잃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어른이 되면서 겪은 감정은 큰언니를 떠나보내고 언니의 나이를 지나 살고 있는 나와 겹쳐졌다. 선자 이모가 첫사랑과 이별하고 독일에서 지낸 시간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일, 그 모든 걸 나누며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해미가 언니에게 전한 말처럼. 서툴다고 여기며 전했던 그들의 안부와 위로가 이제 와 보니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109쪽)


백수린은 여전히 고요하고 담담한 어투로 다정함을 건넨다. 그 다정함은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그건 내가 그 다정함을 어루만져 누군가에게 건네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이별과 작별을 맞이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에 있어 그런 다정함이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k.h의 존재가 짐작을 벗어나지 않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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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02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별 하나 빼신 건가요? 스토리는 보니까 재밌어 보여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3-06-03 15:20   좋아요 1 | URL
네, 첫사랑의 존재는 예상한 대로 흘러서요.
재미도 있었고 백수린의 문장이 좋았어요. 이모와 친구들과 보내는 해미의 일상이 아름다웠어요.

책읽는나무 2023-06-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함이 마냥 부드러운 건 아니어서 때로 모나고 뭉툭하다!
오....갑자기 더 기대 상승입니다^^

자목련 2023-06-03 15:21   좋아요 1 | URL
다정함에 대한 문장은 개인적인 느낌을 표현한 거라 ㅎ
책읽는 나무 님도 즐겁게 만나시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23-07-26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다시 자목련 님의 리뷰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정성가득한 글로 새롭게 다가왔어요.
근데 자목련 님은 K.H의 존재를 짐작하셨군요?
전 짐작을 못해 그 부분에서 와 반전!! 그리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자목련 님의 유추하는 섬세함에 놀랐습니다.^^

2023-07-2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3-07-26 16:36   좋아요 0 | URL
전 완전 샛길로 새어 혹시 우재 아버지인가? 엉뚱한 생각을 했었네요.ㅋㅋㅋ
여성, 연대....선자 이모의 성격으론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었겠구나! 공감은 가는데...막상 여자였다는 결론을 확인하고 나니까, 조금 맥이 빠지긴 했어요. 더군다나 그 분은 평범하게 잘 살아왔었기에 선자 이모의 삶이 비교가 되어 좀 더 시원섭섭한 마음도 들었었구요.
뭔가 좀 더 강력한 한 방이 있었더라면? 그런 아쉬움도 들었네요.
이제 첫 장편이었으니 다음 장편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