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 인생 후반전에 만난 피아노를 향한 세레나데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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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 대한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건 내 나이를 떠올리고 어느 나이가 될 때까지의 시간을 헤아려 본 다음이다. 최근에 읽은 『아무튼, 할머니』의 영향도 크고 주일마다 뵙는 친근한 미소의 어르신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 일, 늙어가는 일, 당연한 자연의 섭리가 한 번씩 서럽게 다가온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블라우스를 고르면서 이 옷을 입은 몇 년 후를 생각하면서 주저했다. 나이와 옷의 상관관계가 무엇일까 싶으면서도 그랬다. 물론 나는 그 블라우스를 아주 잘 입고 있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를 읽게 된 계기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 내가 꽂힌 단어는 할머니, 그리고 피아노였다. 어린 시절 겨우 두말만에 그만둔 피아노. 부모님의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계속 배울 수 있었을까. 어른이 돼서 자립하고서 배우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여전히 피아노에 끌리는 걸 보면 조금 더 자세히 내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퇴사하겠습니다』의 작가로 이 책을 통해서도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의 삶에 대해 말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배웠던 피아노를 40년이 지난 53세에 다시 배운다. 결코 빠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늦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모든 배움에는 기준을 세운 나이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노년에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나이에 그걸 배워서 뭐 할 거냐고. 쓸모가 있어야 할까. 그냥 즐겁고 신나면 되는 거 아닐까. 


일단은 자기 자신에게 취해서 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 피아노 연주를 가장 많이 듣는 단골손님은 분명히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먼저 내가 나를 즐겁게 하지 못한다면 피아노를 치는 의미가 어디 있겠는가. (63쪽)


이 책은 피아노를 배우는 기록이자 연습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노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재미없고 철학적 사유를 전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끼는 고충(?)을 실감 나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과는 다르게 피아니스트에게 배우는 특권을(연재를 위한 출판사의 섭외) 얻어 개인 소장의 피아노가 없어 카페에 있는 피아노로 연습을 한다. 무조건 연습이 살 길이라고 여기면서 연습을 하던 그에게 닥친 난관은 하나둘이 아니다. 손가락이 아파지는 일, 눈이 잘 안 보여서 악보를 최대한 크게 복사하는 일, 절대 남들 앞에서는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다르게 발표회까지.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경험한 일들이라 생생한 에피소드는 마치 내가 피아노 앞에 앉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올 정도다. 어린 적 학원에서 바이엘, 체르니 순으로 배우고 쳐야만 하는 게 아니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피아노 학원을 검색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치고 싶은 곡을 선택해서 연습할 수 있다는 게 어른의 피아노의 매력이지만 노화로 인해 뇌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에는 속상하고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다시 이런 문장 앞에서 기운을 낸다. 정작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피아노 자리에 수많은 다른 말을 집어넣으면서. 


어른에게는 어른 나름의, 어른만의 피아노가 있다. 어른의 피아노의 즐거움은 실력이 좋다거나 없다는 등의 사소한 문제와는 다른 곳에 있다. (148쪽)


저자는 피아노를 치면서 쇼팽, 베토벤, 드뷔시 등 작곡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손에 나타난 증상을 덕분에 피아노를 치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위안을 받는다.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단순하게 기술적인 연주만이 아니라 피아노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었다. 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어떤 마음으로 곡을 쓰고 연주자들은 어떻게 연주를 하는지. 피아니스트도 실수를 하면서 연주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는 것까지.


저자는 이처럼 피아노를 배우면서 인생 후반에야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뭐든 잘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것, 빨리 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실패나 슬럼프에도 담담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늙음과 노년에 대한 막연한 무기력과 두려움 대신 순간을 즐기는 일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치매에 걸릴 사람은 걸린다. 하지만 아무리 증증 치매라고 해도 피아노만은 칠 수 있다고 한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아무리 늙고 시들어도 드뷔시의 <달빛>을 화려하게 연주할 수 있다면. 연주가 끝나면 다시 멍한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인생의 가능성은 무한대다! 나도 그런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203~204쪽)


유쾌하고 즐거운 책이다. 뭔가 배우고 싶은데 나이 때문에 주저한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물론 그게 피아노라면 적극 추천한다. 어른을 위한 피아노 설명서라고 할까. 책 속에는 직접 경험한 저자의 노하우라 할 수 있는 <‘어른의 피아노’를 시작하는 법>이 있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책을 읽어도 좋다. 


설령 아주 조금일지언정 아름답게 쳤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인생 후반전의 삶에는 ‘내일’이 없다. 그렇다면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미래가 아닌 지금 이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267쪽)


저자는 인생 후반을 꼭 집어 말하지만 실은 어느 나이를 살든 미래가 아닌 지금 이곳에 집중하는 게 가장 잘 사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좋아하는 일, 즐거운 일, 아름다운 일에 만족하며 살면 좋겠다. 나만의 피아노, 어른의 피아노를 찾아보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간직할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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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안 그래도 저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이미 다른 책 주문해서 오고 있어서 ^^;;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야겠네요. 저는 피아노를 꽤 오래 했다 그만둬서 언젠가 다시 재개하고 싶은 마음만 있었어요...

자목련 2022-12-07 11:48   좋아요 0 | URL
피아노를 오래 치시고 재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재개를 앞당길 수 있게 만들 책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여러 모로 재밌게 읽고 즐거운 책이었어요^^

거리의화가 2022-12-0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피아노를 배웠는데 지금은 다 까먹어서 피아노 치는 법은 커녕 악보 보는 법도 다 잊어버렸어요ㅠㅠ 배우고 싶은데 주저할 나이라는 것이 없음에도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데 망설이게 되네요.
블라우스 고르면서 드셨던 생각 공감이 됩니다. 더 이상 예쁜 옷을 고르지 않고 편하고 대충 입지뭐 이런 생각도 드네요^^;;; 주름이 하나 둘 늘고 거울을 보는 것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을 때는 좀 서글퍼지더라구요. 그럴수록 새로운 옷도 화장도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목련 2022-12-07 11:50   좋아요 0 | URL
도전이 점점 어려운 나이로 접어들고 있어요. 그 블라우스는 가까이 지내는 동생이 예쁘다고 잘 어울린다고 말해줘서 열심히 입고 있어요. 나이를 생각하면서 옷을 고르는 제가 참 속상하더라고요. ㅠ.ㅠ
새로운 화장,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