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방 박노해 사진에세이 4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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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말이다. 복잡해진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 같은 개념이면 더욱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삶을 누리는 이는 적다.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를 다스리는 일, 심연 깊은 곳으로의 침잠은 절실하다.


인간은 몸으로 사는 존재이자 욕망의 관계로 사는 사회적 존재이며 동시에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갈수록 소란하고 위험하고 급진하는 세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지켜낼 독립적인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내면의 장소, 내 영혼의 깊은 숨을 쉬는 오롯한 장소가 필요하다. 내 작은 방은 하나의 은신처이자 전망대이다. 이 은신처에서 나는 영혼의 파수꾼이 되고 상처 난 인간의 위엄을 가다듬어 세우고, 그 순간 이 은신처는 희망의 전망대로 전화轉化한다. (11쪽)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 『내 작은 방』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작은 방이 된다. 이 작은 책이 우리의 영혼을 달래고 쉴 수 있는 작은 방이라는 거다. 37장의 흑백사진으로 만난 삶, 그 안의 작은 공간에 담긴 사연과 시인의 사유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인도한다. 내가 소유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지 묻는다. 고요하고 아득한 작은 방을 채운 쓸데없는 상념들을 하나씩 지우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작은 동굴이 필요하다.

지치고 상처 난 내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어둑한 방.

사나운 세계 속에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고요한 방. (52쪽)






어느새 나는 흑백 사진의 그 방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터전을 잃어버리고 길 위에서 살아가지만 언젠가 돌아갈 집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 부모, 그곳이 어디든 가족과 함께 있다면 작든 크든 불편하든 상관없이 지상 최고의 집이라는 게 내게로 전해진다. 지친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힘겹고 고단한 시간을 어떻게 건너고 어떻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 놀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진이 말하지 않는 어떤 슬픔과 고통에 동참한다.


집이란 언제든 말없이 나를 받아주는 이가 있는 곳.

다친 새처럼 상처받은 존재들이 그 품 안에서

치유하고 소생하고 다시 일어서 나가는 곳이니. (42쪽)


살아가는 일은 때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이라는 걸 알기에. 그럼에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 자리를 가꾸고 단장하며 살아가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아프고 힘든 이들에게 나의 작은 집, 나의 작은 방을 내어줄 수 있는 삶의 고귀함을 배운다.





그 모든 시간이 내 소중한 인생이고

이 인생길의 주인은 나 이기에. (86쪽)


과연 나는 내 한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내게는 슬픔을 위로하고 포옹할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을까. 어쩌면 거기 그 자리에 있던 그 방을 모른 척 외면하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더 넓고 더 따뜻한 집에 살면서도 어느 시절 반지하의 방, 겨울에도 아무리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한기가 가시지 않던 날들보다 감사할 줄 모르는 미성숙한 나를 본다.


‘어찌할 수 없음’ 투성이인 우리 인생에서 내가 ‘어찌할 수 있고’ ‘어찌해야만 하는’ 것은 내 마음 하나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목적지는 내 마음의 빛이고, 내 마음의 방으로부터다. (15쪽)


여기 내가 쉴 곳이 있는데, 하루를 마치고 누울 곳이 있는데, 무엇을 더 갖고자 욕심내고 불평하는가. 진정한 내 마음의 방 하나를 꾸리지 못한 지독하게도 가난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라도 고요와 환한 빛으로 채울 수 있는 내 마음의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나를 돌보며 살아가고 싶다.





지상에 집 한 채 갖지 못한 나는

아직도 유랑자로 떠나는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나만의 작은 방이 하나 있어

눈물로 들어가 빛으로 나오는 심연의 방이 있어

나의 시작 나의 귀결은 ‘내 마음의 방’이니.

나에게 세상 모든 것이 다 주어져도

내 마음의 방에 빛이 없고

거기 진정한 내가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너를 만나고

무슨 힘으로 나아가겠는가.

이 밤, 사랑의 불로 내 마음의 방을 밝히네. ( 내 마음의 방, 119쪽)


메마른 우리 영혼을 따뜻하고 보드랍게 채워줄 에세이가 당신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팍팍한 삶으로 치진 당신에게 작은 여유를 선물하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쉴 곳으로도 충분하니 마음의 방을 이곳에 마련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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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1-10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라카페 갤러리 가서 보고 싶어요 ^^

자목련 2022-01-11 09:09   좋아요 1 | URL
직접 보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mini74 2022-01-10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은 참 단아하고 좋습니다. *^^*

자목련 2022-01-11 09:10   좋아요 1 | URL
음, 단아하지 않지만 단아란 말은 좋아합니다. ㅎ

Falstaff 2022-01-1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까도 댓글 썼다가 지웠는데요....
지금 시대 대표적 운동권 소설가이기도 한 이인휘의 <건너간다>를 보면 요즘 박노해가 그쪽 사람들한테 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저도 왜 그런지 모릅니다. 혹시 이젠 이런 책을 낸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어서, 댓글을 달았다가 왼쪽 오른쪽 따지는 게 싫어서 말입니다.

자목련 2022-01-11 09:14   좋아요 1 | URL
같은 길로 간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가늠할수 없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책으로 만난 박노해의 글과 사진이 좋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