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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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한다. 비밀번호가 엄마의 생일과 기일이기 때문이다. 잊고 싶지 않아서 더 잘 기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어떤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애쓴다. 자꾸 말하고 자꾸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모두가 알아야 할 일들은 숨겨져있다. 비밀 아닌 비밀로 존재한다. 역사의 한 장면이 그러한 것처럼. 역사의 진실이 그러하다. 뒤늦게 우리에게 실체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 (창비, 2014)의 연장선에 있는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는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소설이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구체적인 폭력을 사용하거나 그것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장치로 혼이 등장했고 이번에는 삶을 휘감는 고통을 눈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눈은 흩날리며 사라지고 녹아 없어진다. 하지만 쌓인 눈은 삶을 고립시키고 세상과 단절시킨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 것처럼. 부끄럽지만 나 역시 몇 년 전에야 당시의 참혹함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소설은 차마 말할 수 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그것은 인고의 세월을 버티면서도 오롯이 진실을 향해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인선의 어머니, 죽음과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도 친구 인선을 부탁을 받고 제주에 온 경하, 손가락 절단 사고 후신경을 살리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바늘을 찔러야 하는 고통보다도 새를 살리고자 하는 인선의 간절함이 흩날리고 쌓이는 눈의 절경과 함께 우리에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감히 알 수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들의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결국 진실 그 하나였다는 걸 알기에.


인선이 경하에게 맡긴 새는 실재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다. 그러나 인선에게는 새는 지켜야 할 존재였고 그것을 빌미로 경하에게 다시 삶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바람과 눈을 헤치고 인선의 외딴 집에 도착한 경하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암막천에 싸인 새장 속 새를 살피고 인선과 대화를 나누고 작은 소녀 같았던 인선의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듣는 과정은 결국 독자인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그 안에 내재된 강렬한 사랑이야말로 역사를 지탱해온 지독한 것이라는걸.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빰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1부에서 새로 상징되는 죽음을 통해 슬픔과 애도의 거쳐 눈과 바람으로 가득한 2부 밤에서는 꿈으로 이어지는 내밀한 대화의 끝에서 3부 추위와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맺는 제주 여정은 경하가 인선과 계획했던 프로젝트가 멈추지 말아야 함을 알게 한다. 경하와 인선의 죽음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는 제주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폭력으로 인해 부당한 죽음을 맞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한강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런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며 기억하는 것이다. 나와 밀접한 관계가 아니면 그저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무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단단하게 쌓였던 눈은 반드시 녹는다. 다시 내려도 녹게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눈에 환호하고 눈을 기다린다. 눈의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겨우 제주 4·3 사건을 안다. 알기에 기억해야 한다. 한강의 소설을 읽는 일도 경하와 인선의 프로젝트에 작게나마 참여하는 일이라 믿는다. 기억한다는 건 잊지 않는다는 일이다. 그리하여 소설의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말을 꺼내지도,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은 채 우리는 앉아 있었다. 주전자 밑면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인선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작별 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중략)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중략)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192~193쪽)


어떤 작별은 의식이 필요하고 그 의식을 준비할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영원히 작별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때로는 고통으로 잠들지 못한 각성의 상태가 될지라도. 그것이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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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02 1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요배 작가님 그림이 떠오르는 글입니다. 전 제주 4.3을 현기영소설로 접했어요. 이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

자목련 2022-01-03 09:35   좋아요 2 | URL
미니 님 말씀하신 작가분의 그림을 찾아보니 그런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니 님은 이 소설을 더욱 남다르게 읽으실 것 같기도 해요^^
즐겁고 따뜻한 한 주 시작하세요~

새파랑 2022-01-02 1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제주 4.3에 대해 찾아보았어요. 책을 읽는 내내 작가님의 고통이 느껴져서 쉽지는 않았지만 읽고나서 많은걸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자목련 2022-01-03 09:36   좋아요 4 | URL
맞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 한강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더욱 의미가 크고요. 쉬운 소설은 아니었지만 그 여운이 오래 가시지 않아요.
새파랑 님, 환한 하루 이어가세요^^

kyj080812 2022-01-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일은 잘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