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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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한다. 세금을 떼고 월급을 받는다. 취업을 할 때는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았다. 노력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지급되는 게 급여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근로조건, 수당, 상여금에 대해 잘 몰랐다. 취업이 우선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는 최저시급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몰라서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내가 부끄럽다. 그냥 숨죽인 ‘을’이었다는 게 말이다. 당시에도 나의 일자리는 내가 아니어도 일한 사람이 많았다. 한국 노동 현장의 현주소를 알려준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 기자의 취재기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는 동안 조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모두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저마다의 계약 기간은 다르고 조카 한 명은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과 입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생각했다. 뉴스나 언론 보도에서 갑과 을, 병으로 이어지는 착취, 원청과 하청, 파견과 용역에 대해 잘 몰랐다.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해지를 했다가 다시 재계약을 하는 행태를 친구에게 들었을 뿐이다. 책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나의 일상과 밀접한 이들이었다. 은행 업무를 도와주는 경비원, 꼬박꼬박 사모님이란 호칭을 쓰는 가스 안전 검침원, 청소 아주머니, 소독원, 경비 아저씨까지. 아마도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분야에도 많은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나라 340만 명의 간접고용노동자가 그들이었다.


원청에서 지급한 돈을 용역업체에서 떼어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순진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최저시급만 맞춰주면 끝이라니. 정해진 업무가 아닌부당하게 과한 업무까지 시켜놓고 노동자의 인권이나 권리는 나 몰라라 하고 불만을 제기하면 불안한 고용시장을 빌미로 계약 해지라는 카드를 들이미는 용역업체. 그 방법이 너무도 다양해 기가 찼다. 관리비, 피폭비, 안정 용품비란 명목으로 노동자의 월급을 착취한다. 기사가 나가고 언론에서 보도를 하자 업무에 그제서야 필요한 물건을 지급(생명과 직결된 분진마스크- 현대차 사내 하청업체)하는 게 현실이었다. 아예 통장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들어오 돈을 다시 인출하고 연차 수당과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폐업을 일삼는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최저시급으로 인해 월급이 인상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고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최저시급만 맞추고 각종 수당을 줄이고 휴게시간을 늘리고 한국말이 어눌한 외국인 노동자(아프리카, 고려인)를 상대로 수수료를 착복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수수료를 법으로 정해진 1%로 아니라 10%를 받는 인력사무소. 농사를 짓는 오빠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며 지급하는 급여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직 돈뿐일까. 무료 서비스를 시작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유료로 전환하는 가사도우미, 배달, 택시, 대리운전 등의 플랫폼 기업도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노동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깔려있는 앱을 유심히 보게 만들었다.


거기다 대기업 임원이나 원청의 퇴직자들의 하청업체 사장이라니. 상부상조하듯 원청이 원하는 대로 계약을 하고 노동자의 몫을 가로채고 착취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모든 걸 하청에 일임하는 원청의 무책임,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원청과 하청의 계약서, 열악한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고 나서야 밝혀지는 금액. 책장이 넘어갈수록 100명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대한민국의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노동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은 한국일보 기자들이 입법을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면담을 요청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기조차 힘들고 발의된 법안은 방치와 폐기의 수순으로 몇 년째 이어진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원청이 아닌 파견 노동자를 위한 법, 중간 노동 착취를 방지하는 법은 검토가 아닌 제정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도 알 텐데.


“제조업에 노동자 파견을 금지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그럼에도 이로 인해 종종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에요.” (137쪽)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개선할 수 있을까. 부동산 문제로 고생한 친구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때 부동산 정책으로 판단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입법이 중요하다는 게 느껴졌다. 이 책이 아니라면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냥 모르는 채 이용하고 수많은 용역과 파견 노동자들을 대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사실을 알고 느끼고 공감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으면 한다. 우선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올바른 이용자가 되는 것도 시작일 것이다. 결국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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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1-09-08 2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장이 넘어갈수록 100명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대한민국의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제조업에 노동자 파견을 금지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그럼에도 이로 인해 종종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에요.” (137쪽)

감명 깊게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1-09-10 09:16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coolcat329 2021-09-0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막힌 행태들이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네요. 저도 읽고 주변에 알려야 할 책 같아요.

자목련 2021-09-10 09:15   좋아요 0 | URL
네,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나쁘고 나쁜 사람들의 존재가 더 화가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