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겨울이니 눈이 오는 게 맞다. 어느 해 4월에 눈이 내렸을 때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자꾸만 문자를 확인하고 날씨를 검색하고 지인의 sns를 살핀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차들이 적다. 많은 차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피신을 했기 때문이다. 눈이 온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대피를 하고 대비를 한다. 어, 하는 사이에 높게 쌓인다. ‘대한’을 맞이하려는 눈일까. 쓸데없는 소리다.


겨울에는 겨울의 맛이 있다. 늦은 밤 먹는 홍시의 맛, 출출한 허기를 채우는 라면의 맛, 그리고 조금 뜨거운 유자차의 맛. 겨울의 맛을 즐기는 방법으로 영화를 보는 일도 좋겠다. 사실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어제 오후부터 자꾸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다. <부부의 세계>에서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김희애가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마음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화, 《윤희에게》.


내가 아는 윤희는 두 명이다. 한 명은 블로그를 통해 인연이 닿은 동생. 한 명은 대학 동기다. 한 명과는 안부를 나누고 한 명과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제목 때문인지 그들이 생각났다. 흔한 이름인 것 같은데도 나와 연결된 윤희는 하나뿐이었다. 그런 그렇고 이 영화는 완전 겨울 영화다. 그러니까 눈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답다. 그 안에서 눈싸움을 하는 윤희의 딸 새봄의 모습은 생동감 그 자체다. 어쩌면 ‘새봄’이라는 이름은 어떤 복선은 아닐까. 윤희가 마주할 새로운 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윤희에게 온 편지를 먼저 본 건 새봄이다. 윤희는 남편과 헤어지고 새봄과 산다. 고3 새봄은 엄마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 쥰이 엄마의 첫사랑이 짐작했으니까. 느닷없는 여행의 결정. 윤희는 직장을 며칠 쉬겠다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자신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답변을 받는다.


처음으로 떠난 둘만의 여행. 새봄은 조력자 경수와 함께 엄마와 쥰의 만남을 계획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쥰의 모습. 윤희의 고교시절 친구, 그리고 사랑한 사람. 윤희 역시 쥰을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 쥰이 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는 윤희의 모습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단절시킨 부모님,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했던 윤희.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오지 못한 지난 시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결정하는 윤희.





쥰과 윤희의 만남은 영화에서 가장 궁금했던 장면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니다. 많은 시간을 돌아왔고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만남은 어색한 반가움. 하지만 둘만의 내밀한 눈빛은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전달한다. 그들만이 간직하고 나눈ㄹ 수 있는 빛나는 파편을 말이다.


폭설로 가득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눈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아닐 것이다. 눈이 내리면 쓸고 치우고 살아간다. 언제 눈이 그칠까, 기다리면서. 누군가에게 어떤 것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정작 타인들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의 기준에 맞춰, 그들의 생각을 강요한다. 윤희는 그런 생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기로 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봄과 함께 떠나기로 결정하고 오빠에게 통보하는 윤희,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는 윤희, 쥰에게 편지를 쓰는 윤희. 그런 엄마를 응원하고 사진기로 담아보는 새봄. 윤희와 새봄에게 환한 봄이 다가오고 있다.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이 대사를 가만히 말해본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다정함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이미지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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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언급하신 겨울의 맛 홍시의 맛, 라면의 맛, 유자차의 맛 더하기 제가 좋아하는 겨울의 맛은
군밤맛-모과차 맛-모찌맛-코코아맛-율무차 맛 그리고 귤맛 ㅋㅋㅋ
윤희에게 라는 영화 상영 당시 언제가 볼꺼야 라며 다른 영화보다가 어느날 내렸져서 못봤는데
자목련님 말씀처럼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봐야겠어요.

전 겨울이면 러시아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작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보는데 ^.^

자목련 2021-01-19 09:31   좋아요 1 | URL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겨울의 맛은 무궁무진하네요.
<윤희에게>, 이번 주 목요일에 mbc에서 방영하다고 합니다.
스콧 님이 말씀하신 영화도 찾아봐야겠네요.
어제보다는 많이 따뜻한 것 같아요. 포근한 화요일 보내세요^^

stella.K 2021-01-19 18:29   좋아요 1 | URL
동치미 맛, 냉면 맛, 호박죽, 팥죽 맛, 군고구 맛도 있는데...ㅋㅋ

<윤희에게>를 mbc에서 하는군요.
보면 좋겠지만 아마 거의 못 볼 것 같군요.
꼭 보다가 자는 바람에...
그래도 기억하겠슴다.^^

자목련 2021-01-20 09:52   좋아요 1 | URL
스텔라 님, 군고구마랑 동치미 침이 고이네요.
붕어빵도 생각나는데 요즘은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