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기억이 다를 때가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누구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나는 친구의 기억 속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건 맞는데도 말이다. 기억이란 이처럼 완벽하고 정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지우고 싶은 기억은 그것을 아는 모두가 완전히 지워주기를 바란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큰 기대 없이 읽은 소설 『너의 이야기』이 자꾸만 기억에 대해 묻는다. 인생을 만들고 채우는 어떤 기억, 인생을 부수고 비우는 어떤 기억, 기억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만화 주인공을 떠올리는 표지 때문일까.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에 대한 조금은 뻔하고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게 소설은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서툴고 어설픈 감정을 마주하는 스무 살 두 주인공의 마음이 아프고 그들의 쓸쓸하고 고독한 인생이 어느 시절의 우리와 닮아 먹먹했다. 나노로봇에 의한 기억 개조 기술을 통해 가공의 기억을 만들 수 있다는 기발한 접근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SF나 판타지를 예감하기에 충분하다. 소설의 주인공 치히로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 실재하지 않는 자녀와의 기억을 구매한다. 현실이 아닌 가공의 기억인 ‘의억’의 가공인물인 ‘의자’에게 대리 만족을 한다고 할까. 그런 부모를 보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스무 살 치히로는 다른 선택을 한다. 아름답고 행복한 의억이 아닌 그 시절의 기억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전부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공간에 아무것도 없기에 허무해진다. 차라리 그 공간 자체를 지워버린다면 이 허무도 안개처럼 사라지리라. 텅 비어 있다는 것도 이를 담을 그릇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완전한 제로에 가까워지고 싶었다.(14쪽)

​어쩌면 치히로는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치히로는 행복하고 소중한 청춘 시절의 의억을 복용한다. 첫사랑의 소녀 도카란 의자까지 말이다. 너무나 생생한 의억 덕분에 치히로는 혼란스럽다. 가공된 기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카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녀를 그리워한다. 도카와 보낸 어린 시절, 학창 시절, 함께 들은 노래, 같이 보낸 서재, 그 모든 것이 치히로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놀라운 건 현실에서도 도카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다정한 도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치히로도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도카를 외면할 수 없는 마음. 그건 독자인 나의 마음도 같았다. 어쩌면 치히로와 도카는 진짜 친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할 정도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니까.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기억을 다투며 치히로와 도카가 더 가까워졌다면 청랑하고 예쁜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도카의 진실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제 치히로가 아닌 도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치히로의 예상대로 도카는 의억을 만드는 ‘의억기공사’가 맞았다. 치히로가 의뢰한 이력서를 보고 도카는 청춘시절의 새로운 기억인 ‘그린그린’을 만들었다. ​도카는 누군가에게 아름답고 예쁜 기억을 만들어주는 완벽한 스토리 텔러였지만 정작 그녀의 어린 시절은 치히로와 비슷했다. 천신을 앓고 있었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이 아닌 방치된 채 혼자 지냈고 학교에서도 양호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 가상의 친구를 만들면서 보낸 시간이 그녀를 의억기공사로 만든 것이다. 의뢰자의 상황에 맞게 완벽한 기억을 만든 그녀가 신형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 AD)에 걸린 건 운명이었을까? 점점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소멸하는 인생, 도카에게도 아름다운 기억, 소중한 인연이 필요했다. 도카 스스로 치히로의 ‘그린그린’ 속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이 된 것이다.

정체성의 존립 근거가 기억의 일관성이라 한다면, 나는 매일매일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해 겨울로 접어들며 나는 나 자신을 의뢰인과 의억 사이에 설치된 여과 장치와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단련에 따른 사적 감정의 소멸과 다른 점은, 나라는 인간이 글자 그대로 소멸함에 따라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에 불과했다는 점일 것이다.(282쪽)

나를 잃어버린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을 매일 마주하고 확인하는 삶이란 얼마나 무참한가. 모든 걸 알고 매일매일 도카를 찾아와 자신을 부정하는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치히로. 서로의 기억 속에 상상이나 환상이 아닌 진짜로 살아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너무도 절절하게 전해진다. 붙잡고 싶은 기억과 기억 사이를 걷는 느낌을 나는 알지 못하기에 더욱 마음이 아리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더 빨리 서로를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더 반전이 있기를 바랐다.

나는, 나만은, 도카를 구원했어야 했다. 나는 그녀의 고독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절망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공포를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321쪽)

기억을 다루는 소설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색다르고 신비로운 소설은 처음이다. 서로의 삶을 지배하는 기억는 갖는 일, 치히로는 도카에게 마지막이자 단 하나의 기억이 될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우리가 마주하는 건 어떤 기억일까. 끝까지 붙잡고 싶은 기억은 무엇일까. 소설 속 의억과 의자가 허무맹랑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왜일까. 우리 주변에서 마주하는 질병 알츠하이머병 때문은 아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하나의 기억을 지우고 하나의 기억을 쓰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쓸지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남아 있는 건 사랑하는 이와의 기억이 아닐까.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사랑하는 이와 보낸 순간에서 생기니까.

운명의 상대는 존재한다. 그것은 당신의 연인이 될 상대일지도 모르고, 친구가 될 상대일지도 모른다. 파트너가 될 상대일지도 모르며, 호적수가 될 상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만나야 할 ​상대’가 한 명씩 할당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상대를 만나지 못하고 불완전한 인간관계를 묵묵히 받아들인 상태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370쪽)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말이다. 그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별을 반복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면 완벽한 삶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이는 얼마나 될까. 운명의 상대를 모르기에 삶은 비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치히로와 도카의 삶이 그런 것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이 나에게로 왔다.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려고 한다. 누군가 나를 지치게 만들고 외롭게 할 때마다 나를 다정하게 안아줄 테니까.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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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2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이 책 표지만 보고 만화책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소설이었군요.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19-06-26 16:54   좋아요 0 | URL
그쵸? 표지에 좀 더 공(?)을 들였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어쩌면 그래서 기대하지 않게 점수를 많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고요. ㅎ

서니데이 2019-06-2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표지 보고 라이트노벨 같은 책 같았는데, 쌤앤파커스에서 나온 소설이었네요.
기억이라는 것이 소재가 된 이야기는 많은데, 이 책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모양이네요.
리뷰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시원한 하루 되세요.^^

자목련 2019-06-26 16:53   좋아요 1 | URL
보편적으로 다루는 기억과는 다른 접근이 아닐까 생각해요. 드라마 <바람이 분다>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서니데이 님도 남은 하루 평온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