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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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죄송하지만, 이 Review는 그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일정관계 상 핵심논지만을 거칠게 요약 제시하기로 합니다.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0.

우선, 혁명적 좌파의 철학은 명확하고 일관되며 방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를 분리하고자 하는 모든 경제주의, 정치주의 조류들은 좌충우돌하며 불안하게 흔들려 온 근대 Bougeoisie의 분업적 세계관과 이에 오염된 다양한 편향의 변종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Nancy Fraser에 대한 결정적 최대비판으로서 Judith Butler도 원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Marx주의 사회재생산론의 핵심과도 완전히 일치하며 속류화된 경제결정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Freud주의 계보에 대한 Marxism의 비판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의 실재로부터 유리된 정신 영역만의 고립적 분석과 대안은 공허하고 근거없는 관념적 유희와 궤변에 불과한 정신분석'질'일 뿐이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합니다.



0'.

그런 점에서 Isolde Charim의 본서는 그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혁명적 좌파 전통의 핵심 정신을 결여한 채 순수 Freudo-Lacan주의의 방법론적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적 실재와 문화심리적 현상은 긴밀히 상호 접합되어 있으며, 분리고립적으로는 결코 그 전면적 진실과 근원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분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본서는 그 인상적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운 현재 국면의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돌파해낼 수 있는 이론적 인지 지도로서는 매우 불충분한 또하나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은, 아직 국내에서 그 숨은 가치만큼 완전히 평가되지 못하고 있으나 과학적 Marxist Analytics의 계보를 잇는 Giovanni Arrighi를 경유하는 model이 제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하는 Arrighi의 결론을 Kondratiev 파동론 등 여타 경제사론과 통합하여 독자적 통찰로 확장한 하나의 작업모형으로 제국주의론, 세계체계론과 최근의 제국론 등 모든 좌파적 국제관계이론들을 통합하는 paradigm도 함께 제시할 것이다. 경어는 생략]



Nik(h)olai Kondratiev(-Schumpeter) 장기파동론 계열은 10년 주기의 예외없이 반복되어 온 기계적 경기순환을 반영하는 Juglar 파동( 및 Kitchin 파동) 등과 달리 총체적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사회경제적 내부모순과 특히 계급투쟁의 결과로 실현되는 구조위기를 반영한다. 이 모든 파동론들은 각각 실물경제 또는 금융-부채 부문들에서의 순환과 변동을 부분적으로 modelling하여 도출된 것들인데, 이들을 모두 종합하면 기본적으로 Kondratiev 파동에 동조되면서 종합도에 따라 미세조정되고 정교화되는 Ray Dalio의 Economic Machine Theory와 같은 Pattern을 얻게 되는데, 이를 다시 엄밀한 Marx주의 이론에 따라 해석하면 그 어떠한 경로를 채택하든 결국 Arrighi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에 의하면, Arrighi가 잘 보여주듯이,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혁명 이후 뿐 아니라, 그 이전의 Netherlands( Holland), Portugal/Espagna, Venezia/Genova 등 12~13세기 이후 세계경제 뿐 아니라 심지어 10세기 남송/북송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변동/순환과 지구적 중심이동 현상을 모두 설명해내는 장기근대론이 입론될 수가 있다. 






(참고로 좌파 내부의 첨예한 일쟁점과 관련하여 첨언하면, Michael Roberts 등 전통적 구좌파들의 경제(위기)사론이 가진 결정적 문제점이자 Arrighi 세계체계론 등 최신 이론 계열들과의 핵심적 차이는 구좌파 이론들이 금융자본(주의) 영역을 충분히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윤율 변동만을 고려하는 등 전반적으로 기본 성격이 산업자본주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Arrighi, Dalio 등으로 대표되는 최신 경제사 model들은 산업자본 중심의 이윤율 추세 뿐 아니라 금융자본 영역의 변동과 순환에도 촛점을 맞춰 통합적 설명을 완성한다. 덧붙여, 거의 국내 최초의 정통 위기론/공황론 전공자라 할 수 있는 김수행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사태를 특별히 염려하시며 돌아가시기 직전 행하신 강의들에서 유언 격으로 강조하신 내용 중 하나가 '이윤율 저하'는 추세적 경험칙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음. 그러나 궁극적 이윤율 저하는 (초)장기적으로는 결국 실현되는데 이것이 구조적 축적 위기를 초래하는 근원적 압박이긴 하나, 이를 상쇄하기 위해 자본은 모든 노력을 경주하며, 다양한 변칙들을 시도하는데 금융적 전환, 기술혁신과 구조 '조절regulation[레귈라시옹]', 새로운 지리 및 산업=노동 부문으로의 끊임없는 식민지 개척과 확장, 그리고 전쟁 등등의 순으로 가능한 모든 시도들을 감행하고, 이 때문에 이윤율 저하는 단조감소곡선을 따라 단순하게 예외없는 '구조적 인과법칙'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며, 지금껏 이러한 시도들이 그럭저럭 성공해 왔기 때문에 심지어 붕괴를 극복하고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변신하며 유지생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자본가의 이윤 동기는 생산력의 모순적 발전으로서 노동절약적이고 자본소비적인 편향적 기술진보를 추동하고 이는 결국 자본생산성의 저하(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이윤율 저하를 초래한다. 자본축적의 한계를 의미하는 이윤율 하락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의 두 가지 결과로서 자본의 과잉(금융화)과 노동의 과잉(궁핍화와 그 결과로서 과소소비), 즉 ‘착취와 억압의 증대’를 야기한다. 이러한 기제로 이윤율 저하는 Rosa Luxemburg-LeftCom계열의 과소소비론 등과 대립하는 배타적 유일 원인이라 볼 수 없으며, 위기의 요소들은 이와 같이 복합적이고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2. Arrighi 세계체계론의 내용


Arrighi는 '1960년 당시 신고전파 경제학의 강자였던 Milano Bocconi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Zimbabwe의 Rhodesia와 Tanzania 등지에서의 교육 및 민족해방 관련 연구활동을 하면서 Immanuel Wallerstein을 만났고, '69년 귀국 후에는 좌파 노동운동과 연계된 ‘그람시 그룹( il gruppo Gramsci)’에서 활동하다, 다시 Wallerstein과 합류하기 위해 '79년부터 미국 Public Ivy 중 하나인 뉴욕주립대(SUNY Binghamton) 페르낭브로델센터에서 전세계로부터 몰려든 다양한 제3세계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가운데 Wallerstein, Andre Gunder Frank, Samir Amin과 더불어 세계체계론 4인방으로 불리며 '98년 Johns Hopkins 대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센터(The Fernand Braudel Center for the Study of Economies, Historical Systems and Civilizations)를 세계체계론의 총사령부로 만든 인물로, 놀랍게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언했던 그의 주저는 이미 그 14년 전인 '1994년에 초판이 발간된 바 있다.




체계적 축적 순환에 대한 Arrighi의 분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든 세계적 축적체계가 최종적 붕괴를 맞기 전 금융부문이 일시적으로 팽창하면서 ‘반짝 호황’을 누린다는 점이다. 축적체제가 활력을 잃게 되면 자본이 과잉축적되면서 생산·유통 부문의 이윤율이 금융수익률보다 하락하고, 유동자본을 얻으려는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데, 그 결과 실물부문의 자본이 금융으로 전환/이탈하면서 두 부문 모두에서 이윤율이 일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의 ‘belle epoque’,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금융부문의 투기적 활황과 생산부문의 부분적 경쟁 완화를 통해 달성된 것이기에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이런 분석은 정보기술(IT) 거품[ 소위 'dot com bubble' 등]과 과열된 주택경기 덕에 지탱되던 미국 금융호황이 결국 파국을 맞은 것에서도 입증된다.




Arrighi는 미국 세계hegemony의 최종적 위기가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이와 같은 진단은 1970년대부터 미국의 금융적 팽창이 본격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인데,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존재했던 체계적 축적 순환들( 특히 Genova, Netherlands, 영국, 미국)을 분석함으로써 그 실증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각각의 체계적 축적 순환은 노동과 기계 같은 실물 부문의 투자가 증가하는 실물적 팽창 국면과 이윤율 한계와 저하에 따라 실물 부문의 신규 투자를 점차 중단하고 금융 부문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는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구성되는데, 금융적 팽창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축적 순환의 쇠퇴와 다음 축적 순환으로의 이행이 진행되는 양상을 반복해서 보인다. 197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계를 재편했던 Bretton Woods system이 붕괴되면서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고, 이동자본에 대한 규제가 제거되었으며, 공공채무의 증권화가 진행되는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미국이 자본의 수익률이 하락하고 20세기 초반의 실물적 팽창이 끝나면서, 이를 금융적으로 해결하려 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앞선 세계hegemony의 쇠퇴 국면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우에도 자본의 핵심 사업은 점차 금융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금융으로의 전환은 한편에서 세계적으로 금융위기를 전파하는 동시에, 하락하던 자본의 수익성을 반전시키는 효과를 동반하였다. 하지만 수익성의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앞선 체계적 축적 순환에서도 등장했는데, 언급했듯 Arrighi는 이를 19세기 후반 유럽에 등장했던 belle epoque가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재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축적체계의 근본적 전환이 아닌 단순한 자본수익성 하락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기 때문에 hegemony의 전성기에 비해 그 지속 기간이 매우 짧고, 세계체계를 거대한 불안정으로 이끌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종료된다. 






하지만 쇠퇴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미국의 금융적 팽창은 이전 순환과는 다른 특징들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금융화한 세계의 이동자본이 새로운 축적의 중심지로 집중되기보다 기존의 쇠퇴하는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고,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있을지라도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서 도전할 수 있는 나라가 없을 만큼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가 새로운 축적의 중심지로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체계적 축적 순환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의 전면적 변신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며, 국가간-체계의 위기가 수시로 출현해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이 더 늘어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례적 상황은 미국이 쇠퇴하는 헤게모니를 반전시키기 위해 앞선 헤게모니 국가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런 미국의 노력이 체계유지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면서, 체계의 구조적 위기를 감소시키기보다 오히려 그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이라크전쟁의 실패와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 현재 확인되고 있다.




3.

Charim의 본서와 관련하여 Arrighi 세계체계론이 주는 핵심적 시사점은 


첫째, 역사 속에서 (Kondratiev 파동으로 modelling된) 이 연속적 구조위기들이 k차 실물경제 위기 이후 k+1차 금융 위기로 쌍을 지어 하나의 체계순환 주기를 완성하면서 이에 따라 유사한 사회현상들이 '반복'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대략 100년 주기의) 초장기 '체계(적 축적) 순환 주기'를 우리는 (특히 수리정치경제학적 접근을 위해) 'Arrighi 파동'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며 소위 '장기 20세기'는 그 연속 파동에서 최근의 cycle에 해당한다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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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feminism은 자유경쟁 증기기관 산업자본주의기 섬유업 등의 경공업 분야에 노동자로 대거 진출하며, 이를 위한 대중교육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역량이 축적된 여성계층이 1865~1900년 연간에 걸쳐 진행된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발생해 특히 1873~1896년 상간에 정점에 오른 제1차 구조위기 대불황을 전후로 공격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참정권--suffrage--’ 이쓔를 중심으로 소수 명망가 중심 Suffragette들의 우파적 LF와 노동대중 중심의 좌파적 MF가 동시 부상했던 것이며, 이후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고 3차 구조위기기까지는 기본적으로 2차 산업혁명에 의한 석유-전기동력 기반의 대규모 중화학공업 중심체계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1929~1945년 상간의 제2차 구조위기 대공황기엔 독자적 feminism 물결로 가시화하진 못했으나 연속되는 세계대전의 포화와 지구적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 (대부분 극우 fascist세력에) 흡수된 애국 feminism[1]의 형태로 동시 출현했었다고 보아야하고, 독점자본주의는 fascism과 Keynesian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한다.


1970/74~1982/85년 연간의 제3차 구조위기 불황기를 전후로 68혁명에 뒤이어 2세대 feminism이 부상했으며, 그 원인은 이 직전 3차 호황기이자 자본주의 최대번영기에 건설중화학공업중심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핵심으로 하는 가족임금제를 본격화, 전사회화하며 오히려 그 정점에 달함으로써 여성계층의 체제불만 또한 역사상 최대화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최근역 『집안의 노동자』에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도 지적했듯 복지국가의 주도적 기획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다른 글들에서도 계속 설명해 온 바와 같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단계 상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 가부장제가 복지제도와 함께 위기에 처하고 점차 축소-붕괴해가면서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체제로 전화되어 나아감으로써 이 붕괴기에 폭발한 제2세대 페미니즘은 일반적으로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격렬한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었다.




이 위기를 계기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체계로 다시 한번 전화하게 되고, 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다가 이번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의한 장기침체라는 제4차 신자유주의 구조위기로 세 번째 feminism 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기존의 3세대 feminism의 정체가 사실은 2세대 post-feminism에 불과했고 이번이 진짜 3세대 feminism이 될지, 아니면 그냥 4세대 feminism이 될지는 이번 물결의 크기와 구체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3세대 페미니즘을 post-feminism으로 규정하려는 반동적 ’여성주의’--이건 멸칭이다. 이런 자각없이 과용, 남용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유는 후술한다--적 시도가 종종 있어왔으나 이것이 Queer들에게는 그렇게나 고대하던 감격적인 ’물결’이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명백한 ’여성’중심주의, ’여성’이기주의적 퇴행이고 반동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이번 구조위기를 통해 드디어 페미니즘에서 ’물결’과 ’세대’ 개념이 분리정립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즉 이번 물결은 4세대 페미니즘을 발명해낼 제3물결이다.)








이런 패턴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경제위기에 따른 중간계층 몰락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위기!!"에 의한 피부양 약소계층 혐오, 위기 시 제1 취약대상으로서의 여성계층에 대한 자본과 사회의 수탈, 착취, 공격 집중 같은 두 번째 계열 3원 메커니즘이 반복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은 극우파시즘의 부상에 의해 촉발되고 촉매되는 ’반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들 지역, 국가와 겹치는 경향이 있고 또 그만큼 보편적 현상이다.


극우파시즘과 페미니즘 부상의 공통 원인은 사회양극화와 복지제도 축소, 가부장 경제(생계부양자-가족임금제) 위기라 할 수 있다.



(경제문제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분들만을 위해 첨예한 쟁점 하나만 짧게 부연하면 신자유주의는 내부식민화와 노골적 차별 및 배제를 통해 얻어지는 (내부)식민지 초과이윤을 포함한 각종 초과이윤 부스러기들을 통해 이윤율하락과 축적의 위기를 타개하면서 독점을 극적으로 강화하려는 plan을 그 메커니즘의 한 핵심축으로 탑재하고 있고 이것은 일정한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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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요약될 수 있는 장기 20세기 경제사에서 1차와 3차 위기는 실물경제위기, 2차와 4차 위기는 금융(자본)위기로서 1차 위기 후 belle epoque를 거쳐 2차 위기로 하나의 체계순환이 완료되었던 것과 같이, 각종 사회적 저항과 계급투쟁에 의해 '60년대 후반 부터 본격화되어 '70년대 정점에 오른 3차 위기로 대대적 금융화에 의해 금융자본이 주도해 온 belle epoque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며, 2007~8년부터 본격적인 4차 위기가 시작되어 체계붕괴기로 접어들면서 대순환 주기가 완료되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최근 100년 전 상황이 계속 반복 출현하고 있는 듯한 deja vu를 겪게 된 근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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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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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작성중으로, 특히 이하는 개인적 memo들에 불과하므로 아직 읽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세 분석의 방법론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과 같이 상황과 시기/국면의 역사적 기본 성격을 규정한 다음 객관적 요소들의 구체적 기제와 양상들을 분석하고, 이어 주체들의 대응 방식




체계의 한계와 붕괴



주체들의 (심리적) 대응 양상




4. 체계와 체계 ideology 붕괴기 각종 방어기제로서의 반동 현상들




4.1. 대안 정립 전에 기존의 공동체구성 ideology를 포함하는 지배적 체계 ideology가 붕괴하는 혼란기에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가장 먼저 등장해 온 개인주의; 각자도생의 ideology


퇴행/소극/감소적 개인주의가 득세하고 다시 정체성( 정치학)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는 것은 기존의 신념과 ideology 체계를 지탱해 온 hegemony가 붕괴되는 혼란의 과도기(/잠재적 이행기)라는 징후임을 가장 먼저 지적하지 않는 모든 논의는 이미 궤변의 입구로 걸어 들어가는 첫 발을 뗀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자기 내면세계에 집중하며 침잠해 들어가는 Hermann Hesse가 매우 잘 대표하는 수많은 전후 문학들에서도 곧잘 목격되듯, 이렇게 구조붕괴기 또는 최소한 구조전환기마다 제일 먼저 작동하는 원초적 필수방어기제로서 반복 출현해 온 개인주의가 Charim에게 '2세대'라며 특히 '60~70년대 유형만이 유독 인상 깊게 각인된 이유는 그것이 획일적 대중(소비)사회를 핵심적 특성으로 하는 Fascism등 전체주의와 Keynesian 복지국가, 현실사회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소품종 대량생산 Fordism기반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붕괴기 전후에 그 반립으로 출현한 진보적/공세적/대안적 개인주의였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적 기능과 역할이 매우 적확하고 절실했었기 때문이다.




4.2. 기존의 고도한 가상/상상/추상/구성적 세계관과 자아(정체성) 이념들의 허구성이 폭로되며 붕괴할 때, 다음으로 등장하는 방어기제는 단순명쾌한 근본주의들, 특히 외모 (피부색, 성sex, 연령) 같은 확실하고 직관적인 생물학적/신체적 근본주의이다.

  

Charim의 주장을 한국처럼 인종적 외모 다양도가 낮은 사회들에 적용하려 할 때 드러나는, 아예 전혀 적용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가장 큰 모순점이기도 한데, 왜 한국 등에선 인종-민족이 아니고 대신 성별과 세대가 계층갈등의 주 전선으로 현상하는가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선


직관적 표지(/)식별자




4.3. (금융자본(가 계급)의) 세계화/다문화/다원화 ideology 및 hegemony 붕괴와 그 반동으로서( 산업자본주의(부문) (기본=노자) 계급들)의 보호무역주의, 국수주의

     : Brexit와 Trump를 지지하는 Rust (Belt) 노동계급들[2]


국제적 규모에서는 실물경제 팽창기부터 점차 자유무역의 촉진을 위해 국제주의, 세계화 ideology가 서서히 각광받기 시작하다가 실물경제가 축적위기를 맞게 되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 급격한 금융화가 이루어지면서 금융자본의 자유롭고 신속한 국제이동성을 위해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 ideology와 정책들이 대대적으로 본격화된다.



바로 이 금융자본(가 계급)이 주도해 온 금융팽창의 체계(/) ideology가 Fredric Jameson의 후기 자본주의, Postmodernism, 탈산업/탈공업 사회 같은 한 축의 관념들의 실체로서의 신자유주의 체계이고, Charim 수준에서 사회 변화의 근본 원인으로 주장된 다원화의 실제적 주요 동인으로서의 세계화 '정책'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문화사적으로는 avant-garde 운동에서 발아하여 전기 la belle epoque 때를 '정점으로' 꽃피워 이후 Fascism에 융획되고 마는 사조가 futurism, surrealism을 포함하는 modernism이고, '68혁명을 motif로 발화하였으나 후기 bellle epoque에서 지배계급의 역습이자 포섭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에 혼종교착되고 착종교란되며 결국은 포획당한 채로 결탁과 협작공모를 통해 시대를 풍미한 것이 postmodernism이라 할 수 있는데, '68혁명과 신자유주의는 양자 모두 국가(독점)자본주의/독점자본국가주의 체계에 대한 (좌우) 대안 운동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수주의적 보호무역주의는 국내적 복지축소 및 긴축정책과 함께 만연한 대중적 혐오감정을 연료로 추진되면서, 상호결합해 synergetic한 폭발적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결국 세계경제의 침체와 수축을 급격하게 가속시켜 한 체계의 구조적 순환주기를 파국적으로 완결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4.4. 






5. 기술혁신이 몰고 오는 대량실업과 경제공황





6.




7




8. 




9.1. 항상 독점자본 승자독식과 그에 의한 극단적 양극화 및 경제공황, 시장의 실패로 귀결하는 ((신))'자유주의'의 (총체적) 위기와 붕괴, 그리고 그 종말




9.2. 다시 돌아온 "자유로부터의 도피" : (새로운) Charisma 갈망과 Fandom화



9.3. 독점자본 (신)자유주의기 혐오의 응축과 그 최종적 폭발로서 후속하는 Fascism



9.4. 연성 Fascism이자 맹아로서의 우익 Populism






10.

Fascism화의 속도와 강도는 전적으로 경제위기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며, 지금까지는 사상 유례없는 전무후무 전대미문의 대규모 양적 완화에 의해 간신히 지탱해 오는 와중에 때맞춰 발생한 (소위 (축약된) 반도체 supercycle로 마무리 되는) Juglar 파동 하나의 융기로 여지껏 버텨올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 3중 위기, Thucydides 함정까지 고려하면 4중 위기가 동시에 중첩된 골짜기를 곧 지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흔한 예측처럼 미중 단독 경쟁으로 상정되는 Thucydides 함정은 시기상조로 보이고, 요동치는 국제정세와 경제위기 정도에 따라 북중러 동맹을 기본으로 Iran, Syria 등 중근동 및 Venezuela, Cuba 등 중남미 국가들[3]이 참여하는 신 추축국 bloc에 의한 함정은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다. 




11.




12. 기존 체계의 기만적 elite 운영/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로서의 반elite주의, 반권위주의, 반지성주의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국면에서 주체 대응 양식의 기본 요소는 대중들의 분노와 (파괴적) 행동 energy이며, 이것이 자신을 장악하고 그 흐름을 인도할 paradigm power의 홈을 따라 긍정적 진보로도, 부정적 반동으로도 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3.




14.




15. 



16. 대안 문제


66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다. 중립성은 구역, 공간, 공적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다양한 문화, 종교, 정체성이 한 사회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만나면 중립적인 공공 영역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다양하고 다원화된 상태로 동등할 수 있는 영역, 중립적인 만남의 장소로서 공공 영역과 공적공간이 필요하다. 이 만남구역bebegnungszone은 다름이 동등할 수 있는 다름의 공간이다..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실현된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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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Charim이 제시하는 대안이란, (재미있게도 거의 유사한 주제에 대하여 內田 樹 선생이 최근간 [[소통하는 신체]]에서 아직 지극히 동양적인 동네 훈장이나 도장 사범 같은 시야에만 갇힌 채 사태의 세계사적 심각성을 철저히 통감하지 못하고 얇은 이해와 섣부른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그러나 실은 이미 l'epoque postmoderne의 끝자락에 서서 처절한 문제의식 속에 제기된) commonwealth나 commons 이론의 매우 초보적 맹아 형상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Charim의 bebegnungszone[만남구역; 중립적 공공영역]도, 內田 樹와 보다 진일보한 '부대끼는' 신체들의 공통장도 모두 서로 대립하는 불상용적 대안들이 아니라 이 초장기 탈근대 대안체계로서의 commonwealth-commons(론)의 시원적 일형들prototypes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X.1. 좌파적 국제관계이론들의 통합 모형


협의의 세계체제


Arrighi의 독자적 세계체계론은 근대세계체계, 특히 실물부문은 기본적으로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결합이라고 보는 Wallerstein의 These를 체계적 축적 순환과 국가간체계의 모순적 결합으로 발전시킨다. 세계경제를 독창적인 개념인 체계적 축적 순환으로 구체화하는 주목적은 중세 말부터 현재의 전지구적 차원까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그것을 통해 팽창해 온, 연이은 체제들의 형성, 공고화, 그리고 해체를 묘사하고 밝혀내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원리상 국가를 초월해 팽창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자본들의 경쟁은 이런 경쟁을 지원하는 민족국가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에서 독특한 역사적 특성이 발생하게 되지만 이러한 특성은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체계적 축적 순환은 국가간체계와 결합됨으로써 본격적으로 근대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근대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특정 시기 강력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자본은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축적체제를 수립한다. 동시에, 강력한 군사-정치-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가간체계에 자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고이윤 부문을 독점할 수 있는 hegemony 국가를 등장시키게 된다. 이때 헤게모니 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적 축적체제를 주도하여 이윤율 동학의 궤적을 주도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과, 체계의 chaos에 빠져 있는 세계질서를 hegemony 국가의 축적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보편성’에 기반을 둔 국가간체계를 수립해 내는 역량이다....................




세계체계의 질서와 무질서











X.2.

Hannah Arendt의 평악(/악의 평범성)론과 Stanley Milgram의 복종실험, Philip Zimbardo의 SPE[4] 이래 여러 모의 교도소 실험 등에 의해 반증된 사실을 정면위배하는 전문가주의의 거대한 삽질연구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시기는 여성/Gender 및 Feminist History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나 의외로 그 중요성에 비해서는 수행된 연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그간의 연구가 밝혀 낸 핵심적 결론 중 하나는 여성들이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이 국면의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롭거나 결백한 무죄의 피해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남성 만큼이나 많은 여성들이 fascism에 투표하고 적극적으로 동의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fascism 치하의 여성 관료조직들을 지원하고 참여했다.


이를 중심 주제로 한 Feminism 내 대표 연구로는 (특히 그 심리 분석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다음이 참조된다.



Italia 사례로는 다소 기만적인 Victoria De GRAZIA (1993) 보다 

MACCIOCCHI[마치옥희], Maria-Antonetta (1979). 'Female sexuality in fascist ideology'. Feminist Review no.1. : Italian 원본은 '1975년 Milano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

MACCIOCCHI, Maria-Antonetta (1976). La donna "nera"-"Consenso" femminile e fascismo. Milano: Feltrinelli.

Maria-Antonetta MACCIOCCHI는 저명한 feminist이자 지도적 좌파 이론가로 Letters from inside the Italian Communist Party to Louis Althusser (NLB. '1973)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전간기 Gender사 연구에서 Fascism과 여성, 그리고 여성의 sexuality가 맺었던 관계가 오랫동안 침묵과 은폐의 대상이 되어온 점을 가차없이 질타하는 관점을 제시한 문헌 상 거의 최초의 연구자로 보인다.


독일 사례로 유명한

KOONZ[콘:츠], Claudia (1987). Mothers in the Fatherland: Women, the Family and Nazi Politics. London: Methuen.


영국 사례는

GOTTLIEB, Julie V. (2000). Feminine Fascism: Women in Britain’s Fascist Movement 1923–1945. London: I.B. Tauris.


특히 영국에서는 Suffragette들의 이후 Fascist화가 각별히 주목해야 할 핵심 사례를 이루며 최근에도 이를 압축적으로 제시한 문헌(용)으로 다음도 참조할 것.

CALDICOTT, Rosemary (2017). Lady Blackshirts: The Perils of Perception - suffragettes who became fascists. Bristol Radical History Group.




근년의 주목받은 종합 연구로는

DURHAM, Martin (1998). Women and Fascism. (Oxfordshire &) London & N.Y.: Routledge.


PASSMORE, Kevin (2003). Women, Gender and Fascism in Europe, 1919-45. New Brunswick, N.J.: Manchester UP.


LIM Jie-Hyun & PETRONE, Karen et al (2010). Gender Politics and Mass Dictatorship: Global Perspectives. London: Palgrave Macmillan.

(: 이 출판사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MASSD로 약칭되는 5권 짜리 Mass Dictatorship In The Twentieth Century Series로 간행된 야심찬 기획의 일부로 이전 edition은 편제도 전혀 다르고 Series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과 이론 구도)는 그 야심 때문인지 과도 일반화와 무차별 동질화/평행/대칭화 등 다듬어지지 않은 주장이 섞여 국내에선 크고 작은 논란도 빚었으나, 편저자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합리적 핵심을 CPR하는 발전적 논의 구도는 분류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 작동원리와 구현기제, 장치들에 대한 정교한 (Gramsi-Althusser-Foucault적) 미시분석으로의 확장계승에 있다고 봄. 

왜냐하면, 모든 dictatorship은 기본적으로 가능(만)하다면 mass dictatorship을 이상으로 추구하지만 체계 전체의 가장 우선적인 절대 목적과 운동 동기가 언제나 자본 축적과 이윤 보호이기에 자발적 복종과 동의, 참여 여부는 항상 이 조건에 제약받는 부차요소로서 이에 의한 이상 도달 정도에 따라 명쾌한 분할이 불가능한 연속적 spectrum으로 분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한 분류학이란 애초에 별 의미가 없고 (fascism 등 dictatorship이라는) 문제의 본질도 아님.)




[*] 이 시기의 연구량에 관한 사실 자체까지 부정하려는 듯한 일부 시도자와 그 주변은 

우선 이 분야의 국제적 연구자 중 한 명인 상기한 영국 Cardiff 대학교 역사학과(modern European history) Kevin PASSMORE 교수의 2011년 논문 'Theories of Fascism: A Critique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s and Gender History' in PINTO, Antonio Costa ed. Rethinking the Nature of Fascism: Comparative Perspectives. (Basingstoke &) London: Palgrave Macmillan, pp. 119-140을 참조할 것. [2010년 원본 논문 'Theories of Fascism: A View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s and Gender History'의 단행본용 수정논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66

Nearly 40 years after second-wave feminism first challenged academe,

theorists of fascism have yet to engage seriously with women's or gender

history. This neglect is not entirely their fault: neither women's nor

gender historians have systematized the implications of their work for

understanding fascism as a category of analysis, perhaps seeing fascism

studies as a domain of positivist model building, dependent upon the

universalization of the male subject. (From the other side, fascism theorists'

neglect of women's and gender history stems, in a few cases, from

a wider unfamiliarity with historical research on fascism.

It is not difficult to find abstract models based entirely on dialogue

with other equally abstract models, with hardly a glance at research into

the movements and regimes they discuss, let alone at the writings of fascists

themselves; some cite Adorno on the nature of Nazism more readily

than they do Hitler. Of course, most theorists do read historical works,

yet too often they see in them only 'historical detail'-to be reworked

into a theoretical interpretation. Perhaps they are influenced by the old

adage that 'historians collect the facts while sociologists and political

scientists provide the theory'. They appear unaware of the theoretical

assumptions intrinsic to historical research, and still less of the contribution

of women's and gender historians towards developing those

methods.

In my view, theorists of fascism could learn something from women's

and gender history. Although not my concern in this chapter, the

reverse is also true; for those who write about women and gender in fascism

ought to think carefully about the nature of fascism. Returning to

my own purpose, I do not mean merely that theories of fascism would be more 'complete' if they included an understanding of gender relations

(although it would be pleasing if they did); rather, the critical method

honed by gender historians and others allows us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nature of fascism. This in turn exposes inherent weaknesses in

those theories-not just in terms of their exclusion of women, but of

their very assumptions about the nature of society and of the methods

of the human sciences.

:  제2물결 feminism이 (기성)학계에 도전한 지 40년이 지나도록 fascism 이론연구자들은 여성사나 gender사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은 fascism 이론연구자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여성사가나 gender사들 역시 대개는 fascism 연구를 단지 남성 주체의 보편화에 종속되는 실증주의 model 구축의 영역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작업이 분석 범주로서 fascism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갖는 함의를 체계화시키지 못했다. (다른 한편 fascism 이론연구에 있어 여성사와 gender사 무시는 어떤 경우엔 역사 연구 일반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기도 했다. 사료의 검토는 차치하더라도 fascism 운동이나 정권에 대한 기존 연구도 훑어보지 않고, 추상 수준이 같은 다른 model과의 대화만을 통해 추상화 model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fascism 이론 연구자들은 여성사와 gender사의 성과에 무지할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 내재된 이론적 가설조차 모르는 듯하다.)

   필자[Kevin PASSMORE]가 보기에 fascism 이론은 여성사나 gender사로부터 배워야 할 뭔가가 있다. 이 논문에서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반대로 여성사나 gender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fascism하의 여성이나 gender에 관해 글을 쓰는 자는 fascism의 본성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99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이대 지구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김용우 선생님이 '이탈리아 파시즘과 파시스트 신여성'이라는 논문에서 파시즘과 여성: 페미니스트 역사 서술의 성과와 한계라는 제하의 도입부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서술도 참조할 것.

66

   파시즘이 남성의 독재 체제라는 시각은 오랫동안 페미니스트 역사 서술을 지배했다. 사실상 여성의 긍정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대부분의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에게 수많은 여성과 남성의 자유를 압살하고 생명을 빼앗은 파시즘은 그다지 매력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파시즘 자체, 나아가 파시즘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이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간혹 파시즘이 논의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남성의 독재 체제로 쉽게 등치되고, 여성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가혹한 남성의 지배 체제 아래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꾸려갔던 수동적인 희생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파시즘이라는 가장 극단적 유형의 가부장제의 대대적인 탄압 아래에서 온갖 권리와 힘을 박탈당한 수동적 희생자로서 여성을 규정짓는 입장은 다른 한편으로 행위자로서의 여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 행위 주체(agent)로서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여성의 상을 모색했던 페미니스트들에게 파시즘과 여성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입증하는 사례였던 셈이다.

   따라서 여성과 파시즘이라는 주제가 역사가들 사이에서 새롭게 부각되었을 때,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관심이 주로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여성 전사들에 집중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파시즘에 맞서 헌신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여성 전사들은 많은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에게 적극적인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연구가 이들 여성 전사들의 영웅적 저항운동에[만] 바쳐지고, 그들을 '성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남성의 독재 체제에 굴복한 무력한 희생자에서 오히려 폭압적 체제에 헌신적으로 저항하는 역동적인 행위 주체로서 여성을 복원하기 위한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노력이 거둔 결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여성들이 여성 해방의 전사로, 반파시즘 문화의 수호자로, 그리고 전후 사회 재건을 위해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고 북돋우며 보존할 모범으로 간주될수록 오히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더욱 부각되었다. 적극적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오로지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서만 존재하는가? 파시즘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역시 때로 파시즘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와 환경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전유하지는 않았던가? 여성은 적극적 행위자로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것을 지지하고 후원한 것은 아닌가? 가부장제의 감옥에 갇힌 무력하고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적극적 행위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인식이 저항운동에서는 귀중한 장점이지만, 파시즘을 지지한 여성들과 결부되었을 때는 치명적 약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Koonz의 저서와 그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뒤이은 연구들은 나치 시대의 여성들이 더이상 무력한 희생자 또는 수동적 공모자가 아니라 나치의 학살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한 적극적 행위자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최근의 한 저서[JOSHI, Vandana (2003)]는 나치 시대 여성사, 젠더사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뒤셀도르프 지역 여성들의 밀고를 다룬 이 연구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Gestapo)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사회 통제에 성공했다는 기존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어서 있다.현재 혹은 전 남편의 폭력성에 맞서 그들을 좌파, 공산주의자, 인종적으로 의심스러운 자[ 즉, 비-Aryan]로 비밀경찰에 밀고했던 현재 혹은 전 아내들, 심지어 다른 남성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남편을 은밀하게 고발하는 아내들은 사실상 밀고라는 수단을 이용해 비밀경찰로 매개되는 나치 국가 권력을 오히려 여성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활용]했던 것이다.99







이상의 역사적 실재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태극기 집회를 열렬히 좇아 다니며 '햇님 복권'을 끊임없이 외쳐대고, 최근 Trump Tower가 있는 New York Midtowon Manhattan의 Times Square 근처[ 54번가]에 박근혜 석방 요구 광고까지 게재하면서, 반대로 난민 문제에는 목숨 걸고 반대하고 전태일 열사를 한남 통구이라 조롱하는 자신들은 절대 페미니즘 단체가 아니라 강변하며 오히려 기회 있을 때 마다 페미들을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는 Womad 같은 단체들과 관련하여서도 그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데, 흔히 운동 내 많은 분들이 막연히 기대하고 계시는 바와 달리 구조 위기기에 여성 계층을 포함한 피지배 대중은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고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Ranciere도 강조하듯 많은 경우 이처럼 그 활성화 결과가 자동적/자연발생적으로 반드시 진보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Womad의 경우는 특히 우파 정보조직들에서 운동(권)에 대한 각종 황당한 가짜뉴스 생산유포 등 집요하고 주도적으로 여남분열과 극우화 공작을 펼치고 있는 여러 정황이 포착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아무리 그 미정형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는 정파나 분자라 해도) 최소한 적극적 견인경쟁이라도) 노력을 경주해야 할 이유로도 좋은 참조를 제공해 줌.

((하지만, 그 경쟁도 철저히 노골적인 동물 감정과 욕망, 이익으로 선동되는 극우적 특성에 고도의 이상과 윤리,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대항해야 하는 좌파의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음.)) 



다음 사항도 일별할 것.

66

친미시위도 하면 좋겠노. […] 다른 외국인들이 알게 이태원, 미군캠프에서도 하는거노.이태원 시위는 좀 더 가벼운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도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하자노. 그리고 미대사관 앞에서는 적극적이게 친미를 어필하는거노. […] 성조기 두르고 미대사관 앞에서 이니으니사진 인공기 오성홍기 다 불태우고 찢는 퍼포먼스 하는거노. […] 그리고 전에 웜에서 나왔던 얘기인데 박 터트리기에 재앙이 얼굴을 넣어서 그걸 깨는 퍼포먼스를 하는거노. 좆불시위때 햇님 얼굴로도 했었노.

99

¶ slownews.kr/72259에서 재인용.

이런 극우성향이 일부 구성원만의 특수편향이라느니, 심지어 '흔한 인터넷 놀이 문화' 정도로  무책임한 오해를 하고 있거나 그들의 반문재인 구호 핵심 사유가 박근혜 탄핵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분들은 기사 전체를 숙독할 것.






[2] 이들 특정계층의 독특한 행동양식을 설명하고 반복지칭하기 위한 계층분류개념으로 우리는 Rustariat나 Corrodentariat 같은 술어를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Brazil은 현재는 중도우익으로 분류되는 사회자유주의를 표방해 온 사회자유당(Partido Social Liberal) 출신 자이르 메씨아스 보우소나루Jair Messias Bolsonaro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정치경제 정책은 좌우 간에 우왕좌왕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반면 기록적 범죄율 속에서 치안을 회복하고 만연한 정치적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약속과 전통적 가족 가치관 수호 등 강경한 입장으로 급격히 대중의 지지세를 넓혀 가며, Trump와 유비되는 극우 populist라는 구미 언론의 성급한 평가 속에 ('2018년 10월 7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46.03% 49,277,010표 득표로 당선을 위해 필요한 유효 투표의 과반을 얻지 못한 관계로) 결선 투표에서 PT(노동자당)의 페르난두 아다지Fernando Haddad와 맞붙어 55.13% 57,797,847표 득표로 신승하며 제38대 대통령으로 '2019년 1월 1일 취임한 상태이나, 소속 정당의 전반적 지지율은 의석수 등에서 5~10%를 넘지 못하고, 특히 전국 시의회 의석수는 겨우 1.5%에 불과한 군소정당에 가깝고, 상하원 등 모두에서 나머지 대부분은 진보좌파 계열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4] 최근 한 유명 media에서 SPE에 대한 review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이미 초고 memo 작성 이전부터 충분히 비판적인 심층 검토 하에, 평악론과 일상/미시 fascism론, 구조주의 환경론, Tabula rasa론과 告子의 性無善無不善論 등 정연하고 정합적인 Core 이론 집합들과 이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엄격하게 검증된 다른 많은 실험들, 그리고 특히 이런 비정상적 동조현상의 발생은 무엇보다 생활반경, 시야각, 준거계 등 장(場) 범위와 폐쇄성, 장내 권력/위계의 장악강도와 크기, 피실험자의 그에 대한 장-의존도[: 이 제3 인자를 집중 천착해 항상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비판적 자율이성/의식의 훈련을 강조한 것이 바로 Arendt(적 경로)]라는 요소들에 의해 지배 규정된다는 확립된 정설에 의거해 종합적으로 판단컨대, SPE 수행 과정에서 비록 다소의 과장이 있었더라도 그 결론 자체까지 완전한 날조로 평가되지는 않았기에 인용했던 것이므로 혹여라도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저의 졸고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따듯한 연관언급들에 대하여는 감사하고 있으며, 그에 보답드리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정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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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믹솔로지에 대하여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유와 미학
데이비드 건켈 지음, 문순표.박동수.최봉실 옮김 / 포스트카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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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memo 작성 중]





I. Baudrillard는 어떻게 완전히 포획당한 Impotence로 전락해버렸는가?


1. 편견

이런 류의 논변들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모순은 첫째 그것이 도대체 실재계란 무엇인지조차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한 채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탁상공론에만 빠져서 신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나마도 아직 고스란히 전적의 세계 안 Platon(주의)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로 그것을 중심문제로 설정하고 싸우려듦으로써 그 공리계 안에 적과 함께 갇혀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복제(자)가 열위의 epigonen이라는 부당한 편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매우 불쌍한 존재들이 더이상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이미 그 복제(자)와 Remix가 완전히 새로운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착취의 기본 골격과 구조(를 형성하는 지배자)들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면 그 모든 한심한 예찬론들은 도대체 어찌 되는 것인가?


2. 인지 착취

인지자본주의 시대 Platform 경제를 구축하는 (새로운) 노동 착취의 구조 및 mechanism과 생각없이 그것들을 정당화해주는 피상적 논리들

2.1. 문제는 생산과 노동이 아니고 유통판매와 Marketing이다??
: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 모든 문제적 유형들


표절

대학원생들을 혹사시키고 착취하는 교수들
조영남 유형

가난한 예술가/창작자들에 기생, 착취하는 중개상들과 그 Platform화(, 특히 음원site들)

Remix의 본격/본령으로서의 언론 방송

Remix의 궁극으로서의 Coordination과 Curation
그리고 그 Portal(,) Platform화

Remix의 Remix로서의 인수합병M&A와 구조조정


Media Portal이 Remix해내는 Spectacle (/) Phantasma(goria)로서의 세계와 Reality, Ideology
: Remix된 Mosaic Stained-glass 세계상

새로운 조절양식과 통치술; 행정(/)치안의 technology로서의 Remix



2.2. 인지 착취의 주요 양식과 기본 구조들

2.2.0. Media노동과 Platform (인지) 노동 (/) 생산 양식
: 벌집에 꿀을 채워주는 일벌들의 무급/부불노동( 비가시화=감추기와 자연)화

생산과정에 참여한 모든 기여노동을 무시하고 오직 유통망에 성공적으로 올라탐으로써 거래/매매 가능하게 된 최종 가공/유통상품(; 주로는 상장상품으로서의 유통망과 Platform 그 자체)에만 모든 과실이 독점적으로 전유되는 Platform경제의 전형적 문제를 정당화해 줌으로써 최대폭으로 악화시키는 논리


2.2.1. 모든 인지 노동과 생산물들의 분절과 파편화, 분업적 배치의 지구체계(화) 및 초미세화

2.2.2. Remix : 채굴mining과 조립가공, 재배치, 유통logistics

2.2.3. 그 모든 공정의 초미세분절 및 초거대규모화와 자동화, 인공지능 Program화

2.2.S. 전형적 (인지) 노동 소외의 반복으로서의 Remix
: (인지 생산물 및 생산자/주체로서의) text 내적 주체 논리와 PLAN, 의지의 무시, 왜곡/곡해, 해체와 파괴 및 수탈, 탈취로서의 Remix의 소외성 측면들




II. 발로 뛰며 현장을 누비던 ’빚나는 기자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떻게 기레기로 전락해버렸는가?

갖다쓰기/복제(행위)들의 복잡다양성을 무차별화하는 단순논리들
; 모든 복제와 재배치 행위들은 등가적인가?


1. 갖다쓰기들의 다층다양성1
---원본자원의 인지등록
1.1. 누구나 알고있는 공유지에서 공유자원 나눠쓰기와 상대가 모르는 비밀정원에서 나만 훔쳐쓰기
; Sampling과 표절의 본질적 차이로서의 인지/정보 비대칭

1.2. 생산력의 공유를 위한 철저한 자원공개와 자원등록의 의무윤리



2. 갖다쓰기들의 다층다양성2
---그 모든 복제들, 특히 그 효과와 보상에서의 평등과 대칭성 검증
2.1. 효과
복제-편집의 다층성과 독창성 및 예술성 가치/평가 상의 격차들
; 게으르고 값싼 표절과 인지균열로서의 충격을 자아내는 ’예술적’!! 재배치를 구별 못 해내는 무능한 복제론

2.2.보상 ; 화폐 또는 상징자본의 분배체계
인지상품의 복제와 유통망을 관통하는, 건재하거나 오히려 격화되는 비대칭 구조들
유통 수단들에의 접근성 및 사용-소유권 격차와 이를 추동하는 주목 경제

(인지)노동의 집단화-복잡화 경향에 역행하는 양극화 논리로서의 인지적 노예근성과 식민성, 사대주의,권위주의, (개인적) 영웅주의, 대의대표주의




단순한 기술복제시대를 넘어 극단화된 자동화, 인공지능화, 초연결시대가 요구하는 복제행위의 새로운 (노동)’윤리’에 대한 고찰이 원천적으로 박약한 데다 번역진들의 특정 연고와 의도에 의해 이러한 경향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윤리’가 ’사유’로 대체되는 등의 작심한 오역과 해설 등을 거치며 극대화된다. 이 정도 수준의 작정이라면 원본이 그대로 보전된 완역인지 (특히 ’윤리’ 관련부가 집중) 훼손된 Remix인지 의심하지 않을 길이 없게 되어버리며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훼손되는 것은 원본이 아니라 신뢰와 우애(의 가능성)이다.




III. 인지노동의 집단화 시대를 촉진하는 분배체계

Platform 경제의 착취양식을 돌파하는 최초의 일경로인 Block-chain technology의 본질

Block-chain technology의 고전적 형태인 복제(거래)장부로서의 각주와 참고문헌목록, ending credit



Remix와 가치법칙 ; Copyright와 Copyleft

그리고 Copyfarleft와 communism으로의 섬세하고 성공적인 이행을 위한 물적 (선행)조건들

: 결론적으로 현재의 지적재산권 법체계가 철저하게 최종상품의 저작권 보호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에서 Remixology류가 주류 담론과 ideology로 확산되면 모든 (과정 및 요소적) 인지노동은 철저한 착취와 혹사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점에 대한 각별한 주의와 경각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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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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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릴 적 가끔 들르던 동네에서 초연(하고 그래서 조금 불결도 )해 보이는 외모에 갖가지 성경 구절들을 섞어가며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어 외쳐대는 한 사나이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광야에서 외롭게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 세례 요한이라는 image에 사로잡혀 그와 대화를 시도하다 곧 가까이 있던 그의 집으로 초대되기에 이르렀다.

집안은 다소 어수선했으며 입던 여자 팬티 한두 장이 나뒹굴고 있었고, 넓지 않은 방은 처음엔 몰랐지만 장롱 2개를 약간의 틈만 두고 연이어 세운 뒤 얼기설기 교묘하게 위를 막고 담요를 덮어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개구멍 같은 통로만 남겨 놓고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금 있자 그 어두운 구멍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좀 놀라서 그 구멍 속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안은 좁은 침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이불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놀라서 안을 들여다 보느라 잠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 했더니 그는 분명치 않은 몇 마디 뒤에 "그럼 거기 들어가서 자."라고 내뱉으며 누워버렸다. 


놀랍게도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와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는 나에게 아내는 나중에 저녁이나 사줄테니 다시 한번 들르라고 은근한 유혹을 덧붙였다.



(원래 사람들을 잘 쳐다보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 그때서야 기억해보니 나는 전에도 지나가며 그를 얼핏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 등교 시간 무렵 근처 여대앞 역 주변, 사람들도 적잖이 오가는 좁지도 않은 모퉁이 길 초입부의 빌딩 앞에, 거기서 밤이라도 난 듯 박스 판지를 펴고 팔베개를 한 채 모로 누워 windbreaker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냥 야수가 된 광인에 불과했고 그의 아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남편과의 합방을 그렇게까지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1.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기묘하게도 나에게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엔 [전두환 회고록]의 ’사고실험Gedankenexperiment’이 떠올랐다가 전형적인 Logos중심적 남근주의라는 생각에 김수창을 거쳐 그 광인에게로 생각이 모아지자 그간 궤변론을 늘어놓을 때마다 종종 잘난 척 비판해왔던 Feminism 진영의, 대모님들께 너무나도 부끄러워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1]



Groys의 말대로라면 언어의 왕국이 건국된 지도 어언 100년, 붕괴한 지도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며 애초 출발선부터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언어 자체가 부재함을 절규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유교라는 ’언어’로 짠 용포와 도포자락을 Marxism, 아니 Stalinism이란 서양복식으로 갈아입은 언어의 연금술사, 언어와 문자의 지배자 씹선비로 비판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전존재를 내던져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자성하고 가장 먼저 자기자신과 사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Groys 주장의 전제들 너머까지를 다시 돌이켜보면 소위 그 ’언어의 왕국’, ’철학의 왕국’은 심지어 태초부터 있었다고 주장되며 최소한 전근대까지는 동서양 모두를 강고하게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데, 그때까지 지배계급이 의존할 수  있던 그나마 합리적인 거의 유일한 통치술이자 Technology인 말씀과 언어의 지배가 도대체 무슨 대수라고 이 호들갑이란 말인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붕괴해버린 세계의 문제점과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한 사고와 언급이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을 죽일 정도의 뼈를 깎는 처절한 반성과 성찰을 계속해 진정으로 부활하지 못 하는 한, 폭력과 패배라는 운명의 순환회로는 영원히 반복될 뿐이며, 따라서 이 책은 일말의 자기비판도 회개도 개선대안도 없이 고스란히, 아니 잘못된 원인분석을 통해 오히려 더 퇴행적으로 반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전시장일 뿐이다.




2. 언어의 지배는 더욱 거칠고 끔찍하며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억압사회일 뿐이다.

언어는 매우 거칠고 성긴 인식의 원시적 그물망일 뿐 아니라, 선불교의 불립문자 정신이래 Roman Jacobson, 그리고 Lacan과 Deleuze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통찰들이 있어왔음에도 이 무수한 가르침들을 모두 깡그리 지워버린 채 위기에 처한 Homo sapience종의 불안과 공포를 등에 업고 기계파괴선동으로 위장하여 시도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식론에서의 Stalinist Nomenclatura 반동 Coup d’Etat일 뿐이다.


섬세한 언어(화) 능력과 세련되고 부드러운 accent와 번역능력에 기대어 체제를 지배해왔던, 반면 동시에 언어화되지 못 한 실재와 진실들, 더구나 모든 비언어적 존재와 생명과 인식과 소통과 행위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언어권력의 전횡과 횡포가 만연하며 따라서 독립적 (자기) 언어화 능력이 부족한 개인과 계층, 부문은 번역당할 때까지 전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비)의도적 오역과 왜곡이 수반되어 왔던 대리발화의 이 전형적인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이란 말인가!!!




3. 시대착오

Linguistic Turn의 오래된 종말과 
Post-linguistic Turn 지배(의 붕괴)기에 이은 
(New) Materialistic/Ontological Turn의 도래

아직 (국내에서는 특히 더) 흔히 ’생물학주의의 귀환’이나 Biological Turn으로의 역주행처럼 오해되는 이 도래는 사상사의 장기파동[LT(E) Wave]이며, 현재의  speculativeness는 그 초기 도입/생성기에 발생하는 일시적 과도 현상의 하나일 뿐(으로 보임).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과거.



원래 비기표적 기호, 도표적 기호계란 수학적 기호만을 지칭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영상문화 기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Groys의 본서는 이 외에도 가장 엉성하고 성기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존재를 지배하는 (Cognitive) System II 로서의 감응-정동계 전체를 통째로 삭제해버리고 억압하고자 하는 가장 질 나쁜 전형적 Logos-이성-논리중심주의의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등 심각한 반동을 자행하고 있지만, 이하에선 최근의 기술경제적 추세와 이를 문제화한 [대량살상수학무기] 등의 계기에 주목해 언어(학)과 수리(/)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만 고찰하기로 한다.




4. 과연 언어/논리계산과 수학계산은 대립하는가?
;잘못된 대립구도와 이분법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해 대립시키고 과장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경제와 정치,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정신병적 ’증상’에 도달함으로써 결국, 언제까지나 자신의 동물성과 기계성을 부인한 채 언어(III)로서만 자기자신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Homo sapience 종의 낭만적, 목가적 환상에 편승해 전형적으로 다시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고 선동한다.

자본주의가 절대악인 이유는 그것이 수학의 왕국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거울쌍인 줄 알았던 Stalin주의가 절대선인 이유는 언어의 왕국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수학과 언어(학)의 대립이란 왕립과학과 유목과학의 대립보다도 허위적인 순전한 기만이며 차라리 농담이고 희극일 뿐이다. 
언어가 지배하던 악의 체제들은 벌써 다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5. 언어인가 변증법인가?

그럼에도, 본서의 거의 유일한 합리적 핵심이라 할 만한, 서로 다른 이질적 network( / )system들 간 동시 중첩/간섭과 과잉결정 현상의 정신적 반영인 변증법의 특별한 위상에 대한 재고찰은 절실하다.

Marxism 전체에 고유/특별한 ’가치Eigenvalue와 우월성Eigenstärke’이 있다면 그것은 고래의 구습인 언어의 지배가 아니라, 저항과 혁명(의 정신)을 실현하는 인식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지배에 있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총체성의 논리’란 다름 아닌 이 ’변증법’의 한 부분이자 측면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변증법’이란 광의로는 기존 지배 언어, 논리, 인식체계와 정신-Ideology 구조의 모순/틈/공백을 ’포착’해내고, 특히 그 체계가 의문의 여지 없는 자연적/천부적 진리로 환상하는 전제들을 재검토해 허위를 드러내어 해체하고 전복해 붕괴시키려는 끊임없는 (인지적) 저항 운동에 대해 붙여진 다른 이름[3]이며 협의로는 그 한 정식화 시도를 일컫는 이름이다. 

언어가 곧 변증법인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어서 언어를 초과하고 넘어서서 결국 (기존의) 언어와 논리체계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것이 변증법이며, 이렇게 해서 종국에는 인식 체계 자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을 도래케 하고 처음부터 다시 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변증법이기에, 그러므로 단적으로 ’언어로 사회를, 그래서 타자를 지배하는 것이 결단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의 요체라 말할 수 있다.

Groys의 말대로라도 언어에 그토록이나 열중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해버리고, 상대적으로 언어에 전혀 열중하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오히려 살아남아 건재하다는 현실조차 가장 강력하게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모든 인간의 정신은 이 운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6. 변증법의 전망

사실 수학을 포함한 강박적 미세분할과 국소적 인과론의 차이 논리학은 유사변증법일 뿐 본질적으로 배중률은 전혀 위반하지 않고 모순률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엄수할 뿐 아니라 극대화하고 최대화하기 때문에 형식논리학의 충신 중 충신이자 일등공신에 불과하며 아니 오히려 형식논리학 그 자체인 반면, ’양자현상’은 전형적인 변증법의 일례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차이의 형식논리학은 0과도 매우 비슷하고 1과도 거의 같지만 완전히 0은 아니고 그렇다고 1도 아닌,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그간의 인지그물망으로는 그 사이에서 우리가 걸러내 보지 못 하던 0.5를 찾아내고, 다시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하며 0.54와 0.548과 0.5483들을 찾아내는데 몰두하며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 사이에서 LGBTQIAK를 찾아내는 Queer feminism은 물론이고 감각의 재분할을 역설하는 Ranciere를 포함해 모든 소수자 정치학의 주창자들도 여기에 포함되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근본적으로 형식논리학을 전혀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학은 성긴 언어의 그물로는 도저히 걸러지지 않는 무수한 미세 data들의 대량발생과 그 흐름/이동을 인식하고 처리해내는 데 유용성이 있는 기계화가 용이한 규칙적 미세분할과 무한 반복, 확장의 방법론을 추가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발생, 생성, 변화, 변이의 단순 변증법을 초월하는 완전히 0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1인(, 그래서 오직 바로 그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0도 아니고 1도 아닌) 존재들의 동시성 역설 변증법이고 이것이 바로 ’양자 현상’이며 모순률과 배중률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요구하는 문제의 새로운 지평이다.





국소인과론과 미세분할의 차이 논리학을 넘어서는 다중(성)/중첩 논리학을 요구하는 양자현상과 변증법

특히 비국소적 ’얽힘’을 포함한 이런 모든 자연,사회적 양자현상들은 형식논리학의 근본 규칙들을 동시에 전복하면서 (Homo sapience적) 사고방식의 근원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도구들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차이의 논리학을 넘어서는 인식론이 필요하고, (논리/인식론적으로만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현단계 변증법의 당면과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요약하면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형식논리학의 본질은 (시간을 무시/극복한[2]) 고정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동일률의 (원자적) 강체론으로 정의할 수 있고, 언어학의 혁신은 물론이고 수학의 혁신까지를 요구하는 변증법은 이 단계를 넘어 형식논리학을 모든 정립/정식화된 지배의 논리학과 인식론으로 정의하고 그 헛점과 한계를 ’비판’하며 ’해체’하고 붕괴시켜 근본적으로 새롭게 ’구성’/건설해 나아가는 아래로부터의 모든 (비/반-형식적) 저항논리의 종합학이자 인식-논리의 영속혁명론으로서 새롭게 발전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7.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1
----언어의 지배로 포장 미화된 단일언어주의 

   이런 혁신된 확장 관점에서 보면 항상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진심어린 진정성 넘치는 따뜻한 대화랄 대화는 없었던, 언어의 지배로 미화되고 포장된 단일언어주의를 벗어나 갈등의 대화 정신으로서 Bakhtin의 복수(언어)주의가 차라리 변증법에 훨씬 더 가까우며, 나아가 차연의 윤리와 사건의 정치, 해체의 철학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제까지의 변증법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3].

다만 양자 모두!! 이러한 차이의 초월과 접합/종합을 통한 새로운 ’구성’과 실천적 연대협력의 공통되기에 도달하지 못 하는 한 결국 분열과 배신의 이분법을 무한반복해대는 사이비 변증법에 불과할 뿐이라는 깨달음을 골수 깊히 각인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롭게 접합하고 구성해내지 못하는 반복분할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형식논리만을 강화할 뿐이며, 이것이 ’차이의 정치’가 자본주의에 착종교란되고 공모함으로써 오히려 지배체제를 섬세-유연화, 교묘화하면서 완성시키게 되는 철학적, 인식론적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변증법적 대화상대는 바로 유일한 대타자이자 검증의 시금석이고 누빔점인 실재 밎 현실이며, 이것이 바로 유물론의 정신이다.
유물론이 빠져버린 변증법은 파괴와 해체, 분열 자체가 목적일 뿐인, 흔해빠진 관념론적 급진주의 비판철학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또하나의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총체성의 논리’도 결국 이 실재와 현실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분절되고 파편화된 부분만을 떼어내어 그 작은 알 속/이불 속에만 도피해 파묻혀 있고자 하는 postmodern의 오타쿠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관념과 세계의 전면적/총체적 대질을 일컫는 가장 강력한 "Fact Check" 방법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8.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2
----인식의 도구와 인식의 주체; 인식과 권력

그러나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으로 위험한 문제는 이런 논리적, 인식론적 논의가 전혀 아니다.


Groys가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잘못된 이분법과 대립구도로 진짜 노리는 것은 인식 주체와 권력의 문제를 지워버리고 인식 도구와 방법론의 문제로 바꿔버리는 치환술이다.
이러한 치환술에 속아넘어가 권력과/의 주체 문제는 전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기계와 수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의 소유자와 용법이 문제라는 교훈도 완전히 망각한 채, 다시 관념들 간의 대립으로 치환하여 거칠고 성긴 원시적 인지 그물망인 언어에 비해 인류사 최근년의 좀 더 촘촘해진 그물망에 불과한 애꿎은 수학과 계산을 비난하면서 무능한 향수와 싸구려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전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ostmodernism의 상투어 중 하나였던 ’계산 불가능성’이란 언어에만 하사되는 예외적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게 아니라 ’진리의 일반적 인식 불가능성’을 목표로 의도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Cognitive) System I, II, III, IV의 허구적 대립 선동과 그를 통한 Hegemony 시도가 아니라 인지자원과 도구, 방법론들의 총체적 동원과 그 협응이 중요하며, 언어든 수학이든 계의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에서도 (단일) 지배가 아니라 그 발화의 복수-민주주의적 평등과 만개, 즉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이 바로 그 생명인 것이다.




S.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 거부되고 붕괴해버렸으며 그 내부인들에게는 기념하고 싶은 그리움도 되지 못 하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 자체가 전혀 없고,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사유와 언급이 더 없다.

결정적으로 문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구좌파의 이런 비겁한 변명들과 자위 공연은 새로운 저항주체들을 Marxism화/(으)로 인도하는데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Marxism과의 협력을 촉구하기 위해선 Marxism 내의 선과 악을 모두 솔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기 내부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제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기타 정파(들)의 세부이론들에 쏟아지는 그 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Marx-Leninism[4]보다 차라리 그나마 그들의 ’정신’을 기꺼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이 Sovjet Ideology에는 아예 이런 작업들을 철저하고 근원적으로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기 위한 언어와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Stalin과 그 체제의 공과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공정한 평가도 필요하나 결벽적 신중성으로 Stalin(주의) 자체와 특히 그 내/외인에 대해 완전히 판단을 중지하고 변론술로서만 평가해도 아직 Lenin조차 혐의를 거의 벗지 못 한 상황에서 Stalin을 변호하고 나서는 건 박근혜 변호인단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변론 자체만 검토해도 기만성이 너무 강해 ’실질적’ 설득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
처음엔 이 책의 지적 도발과 도전에 대해 (세계와 특히 Feminism을 향해) 내보일 한국((그래서) 남성)지성계의 ’실체적’ 반응이 너무너무 궁금해 일찍 작성을 대충 마쳐 놓고도 일부러 침묵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아무리 기다려봤자 아마 누구도 이렇다할 응답을 내놓지는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고, 그래서 기다림으로 한국사회가 얻을 공익보다 잃을 손실과 혼돈이 훨씬 커 보이기에 그냥 몇 자 적기로 한다.

더구나 이 책은 최근의 연작 [대량살상수학무기], [기호와 기계], [사건의 정치], [차이의 정치와 정의] 등과 기막히게 시의적절히 쟁점을 공유하면서 반대편향의 전형을 잘 형상화하고 있기에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국면이 조성됐을 때 집중적 논의를 촉발시키고 활발히 전개하는 것또한 최선의 실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과도한 노파심에 혹시 연관의 줄기를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부연요약하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공론장 등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이고, 광인의 아내는 그들이 배신한 Feminism과 하층계급들을 상징하기도 하다.))


[2] 여담으로 덧붙이면, 이를 부정적으로 볼 땐 시간을 전혀 이해/고려하지 못 하고 무시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시간을 초월해 그 모든 변화와 변이의 간계를 극복하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있다. 이는 마치 산을 넘기 전과 넘은 후 지금은 모두 산 아래에 있는 두 사람과도 유사한 것이다. 


[3] 다중성 양자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를 하나의 맹아가 오히려 반-변증법 진영으로 매도돼 온 Deleuze의 적극 주목-발굴에 의해 유명해진 ’다양체Mannigfaltigkeit; man’I’fold; multiplicite’ 개념일 수 있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강력하게 증명해준다. 
(즉, n차원 국소 Euklid(ean) 공간에서 입자와 파동 같은 다중성은 n+k차원 위상 공간에서 통(합된 단)일 다양체의 n차원으로의 서로 다른 사영들일 뿐일 수 있다는 idea이다.)


[4] 문외한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는 문자 그대로의 Leninism과 Bolshevism 일반을 지칭하기보다는 구소련의 공식 Ideology였던 Stalinism을 일컫는 용어로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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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18-03-0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출간 당시 1주 간 게재 후 삭제하였으나, 최근의 몇 민감한 내외부 정세 때문에 복구되었으며, 현재로선 향후 유지 여부는 미정임.
 
사건의 정치 - 재생산을 넘어 발명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57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이성혁 옮김 / 갈무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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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리뷰는 기본적으로 Lazzarato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에 작성된 것이며, 전작까지 보여준 근원적 통찰에 비해, 본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저작이라 아니 할 수 없으나, 그 원인은 문헌 자체보다도 번역의 역주행에서 오는 탈맥락성의 증가 때문으로 현재와 미래의 Lazzarato에는 해당사항이 그만큼 직접적이라 보이지 않음[1].


1.
어쨌든 본서는 신자유주의의 공포스런 작동기제에 대한 탐구가 불충분한 반면, Marx만큼이나 실패하고 더구나 포섭될 대로 포섭된 Deleuze 노선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적 성찰과 재검토도 없이 더구나 (이미 Deleuze, Derrida 등 본인들이 Marxism으로의 복귀를 역설한 시점도 훨씬 지나서) 너무 뒤늦게 고스란히 답습만 하고 있음.

세계(/)사상사적 관점에선 Ranciere 및 급진민주주의 노선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별성은 미미하고 (더구나 이들의 역사적 급진성을 좀 오해하고 있으며,) 모두 소수자 정치학으로 포괄될 수 있는데다, 이 거시관점에서는 그보다 급진좌파 내부의 강력한 이론적 자원들의 양대 계보를 단순한 이분법적 양자택일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전통적 관점을 극복하여!! 종합하고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전환하고 변신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에, (전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Hegel-Marx와 Heidegger-Lacan-Derrida를 중심으로 이 통합을 모색해내고 있는 Zizek의 분투가 이런 세계사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시의적절한 많은 영감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정세임[2].

(이 통합관점에서 Marx는 물론이지만 Hegel조차도 ’사건’을, Lazzarato도 예외 없이 흔히 (속류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단순한 ’객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차이와 ’지연’을 포함한) 모순과 틈/공백의 폭발, 난입으로 정의하고 있음.
따라서 Lazzarato식 구도에서 양자의 정확한 차이는 단지 이 모순을 긍정/낙관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비관적으로 볼 것인가에 차라리 좀더 가깝고, 그래봤자 Hegel-Marx가 이 차이와 모순을 부정/비관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전혀 아니며 오히려 변화발전의 유일한 동인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Lazzarato가 결코 말하지 않고 있는, 장막 뒤에서 이를 결정해 줄 진짜 중요한 관건은 단순히 이렇게 과(도)일반화된 관점차의 문제가 아니라 Spinoz(i)an Maoism식으로 말해서 구체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각 개별 (사건의 원인인) 모순이 적대적인 것인가 아닌가; 즉 타자로서의 그 손님은 궁극적으로 이웃인가 적군인가; 개인가 늑대인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도 객체로 바라보는 동일성의 주체철학"이란 결코 단일한 범주가 아니며 오히려 Plato-Hebraic 보수 형이상학 전통과 그 거울쌍인 '전도된 Platon주의'로서의 Sophisto-Bergsonian[3] 인간/생물학주의적 주의주의 주체철학 등등의 혼합 image일 수 있음.)


(최근의 Communnale 사태를 포함해서) 양대 계보는 본질적으로 Hydra이자 Medusa였던 저항주체가 수많은 전투경험들을 곱씹으며 자라나 도달된 한 몸뚱아리의 Siam(ese) 쌍생아인 것이므로 이들을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서로 자기만이 이 몸뚱아리의 유일한 주인인 진짜 본인이라 주장하며 상대방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고 그 결과는 굳이 말을 할 필요조차도 없음.
(특히, 이 상황에서 17년 혁명 이후 100 년, 68 혁명 이후 이미 50 년 간의 노력이 충분히 보여 준 교훈은 더이상 단지 어느 한 노선의 고집만으로는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악화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며, 더구나 이 관점으로는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세계사적 및 사상사적 격변[4]조차도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속류화에 기반/동반하는 불필요한 대립의식은 지양돼 나아가야 함.)


2.
문제는 뿐만 아니라,

소수자-되기와 소수자(/)정체성 인정투쟁의 일환으로서의 Queering과 비체되기Abjectivation as Self-abjection[Le]/Auto-abjection[Lfr.오또-아브젝시옹],
그리고 그 상위범주인 발명으로서의 Hacking/Cracking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새로운 저항전술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이 관점에서 Queering은 단지 본인도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정체성일 뿐이라는 기존의 소극적 피해자 호소 관점을 넘어서 정체성 체계 Hacking/Cracking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 발명 작업으로 더욱 적극적, 진취적으로 전진/전환해 나아가야 할 강력한 필요성은 있음----),

그럼에도 여기서 더 큰 문제이자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이에 대한 지배 bloc의 대응전략이 이미 너무나 오래 전에 완성되었고 완비되었으며 완숙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전술한 1990년대 Deleuze, Derrida 등의 Marxist Manifesto/Confession의 (당시에도 아직 충분히 자각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음.

따라서 이러한 선회가 Foucault에겐 훨씬 더 일찌감치 더 극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들의 전-중기 노선으로서의 hacking/cracking을 넘어 최소한 이런 산발적 hacking/cracking들을 체계적으로 집적 설계 인도하여 상호협응하는--COMMUNicative-- 지속적 흐름과 운동의 일관된 거대 회로로 만들어 내는 ((total)) re(verse)-engineering[5]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바위를 뚫을 수 없다는 반성적 문제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국면이나 단순한 개별적 소수자-되기만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1].

아무리 각고의 노력을 통해 희한하고 기묘, 기발한 정체성 전환으로서의 소수자-되기를 계속해봤자, 체제는 단지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고’ 혼자 애쓰다 맞고 지쳐 쓰러지고 천천히 죽어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아니면 그 중 살아남은 효용가치가 있는 것들만 일부 포획해 자원을 공급해 주고 좀 성가신 것들은 모두 신용평가 등등의 방법으로 조용히 배후에서 밥줄/돈줄을 지그시 밟아 죽음을 재촉할 수 있으며, 저항이 약할 때마다 종국적으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들만의 성벽 밖으로 내던져버려 죽어가도록 내팽개쳐 둬도 된다. 이때 이들의 ’특이성’은 체제에 전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 하고, 오히려 때마침 이러한 노골적 차별과 배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기막히게 좋은 빌미가 될 뿐 아니라, ’자발적 가난’이란 자발적 낙오, ’탈주’란 (성벽 밖 황무지, 불임/불모지로의) 자발적 추방과 배제로 적극 이용될 뿐이며, 신자유주의는 그 모든 '차이'들을 교묘하게 곧 차별과 배제로 전화시키는 강력한 장치들을 탑재하고 있는 평등 분쇄 체제이기에 다시 분배를 위시한 평등과 보편주의가 절박해지는 것이고, Ranciere는 이 절규에 성실히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3. 주체 변이와 다양화의 속도를 압도하는 통치 technology 발전의 '특이점과 Eigenvector'

최근간『대량살상수학무기』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치 technology는 중세, 근대까지의 고정되고 반복하는 (정체성(들의)) 체계로서 언어논리와 고전역학 및 사회원자론의 단계도 넘어선 지 오래고 이미 쉴 새 없이 유동하고 변이하는 체계로서의 열역학적 고도 수리통계 단계를 거쳐 서로 다른 장과 차원들 속에 산포한 상황과 맥락별 network체/파동들이 중첩되고 간섭하는 총체적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network으로서의 개인조차 철저하게 분할하고 해체하며 예측하는 social subatomic quantum engineering과 Big Data 복잡계 network 공학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다양체로의 변이를 거듭해 봤자 상기한 쓸모없는 '탈주'도 애초의 기대 효과조차 급감해 나갈 수 밖에 없음.
그 개인 주체 자신보다 그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이해하며 예측하고 미리 기다리는 체제와 'AI'!
그조차도 포기할 순 없는 상황이겠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적 문제를 거의 해결할 수 없음.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왕립과학 대 유목과학이라는 Deleuze적 도식은 완전한 허구적 대립구도에 불과하며, 이를 연장한 'Newtonian 고전물리학=절대왕정과 Fascism의 과학' vs '상대론과 양자역학 등 현대물리학=자유인의 유목과학'이라는 도식은 더욱더 순전한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 잘못된 대립 도식 관념이 Deleuzianism이 결국 포획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 원인의 하나이고 그와 Foucault의 결정적 차이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현대성과 자유!!--차라리 신자유--, 그리고 해방의 근원적 차이와 이(에 대한) FOUCAULTIAN TURN[6]의 의미를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채, 현대성의 황홀경에 압도당해 탈근대만을 갈망하고 있는 근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차이의 정치'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라는 오류에도 동시에 빠져 있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탈근대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고 그 유연/유동성과 액체성을 찬미하기에만 여념이 없지만 현실의 변화는 이미 이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Lazzarato의 국역 전작『기호와 기계』는 마치 생각을 통째로 도둑 맞은 것과도 같은 충격을 좀 받았었는데, 주제가 언급된 김에 간략하나마 특히 연관성 높은 2~3 가지 이견 정도만 약술하면, 무엇보다 전작에서의 결론적 대안도 결국 범주적으로는 여전히 hacking/cracking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기표적 기호와 비기표적 기호--Guattari[7]식 용어로는 특히 도표적 기호--의 차이는 사실 예전 Judith BUTLER(『젠더 허물기』)와 언어논리계 ’내!!’에서의 탈주 시도만을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Queer 정치학에 대한 논평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실 (Cognitive) System III와 System IV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고,
셋째, 양자 간의 차이가 기호와 기호적 기계, 그리고 기계 그 자체 간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특히 기호적 기계와 기계 그 자체(의 차이)를 혼동하면 궁극적으로 Qbits와 Quantums 그 자체를 혼동하며 신흥 Digital교의 수렁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마는 (특히 Hologram 우주론 등등 일부) 양자물리학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너무나 우습게 보고 맘대로 주무르고 주물하며 이렇게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과학들을 고려하면, 그에 비해 이에 맞서려는 저항의 과학에 대해서는 (아직 언어논리의 세계 속에 갇힌 채 더구나 구좌파적 패배주의 Trauma에까지 파묻혀) "가소로운 짓"이라며 그 (성립)가능성 자체를 회의하고 극구 (사라지는) '번역'자로만 머물려 하며 독자적 조직화마저 주저하고 망설이는 Balibar 관점과 태도의 소극은 성직자처럼 겸허해 보이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별로 사실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싸움이라고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졌다고 할 수 있고[8], 특히 국내 한 유력 Deleuzian 본좌 중 또 한 분 등이 근년에 바듀Badiou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사건'의 철학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사건을 도저히 예측불가능한 (순간에 갑자기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만 강조하며 객관적으로 "관조"하기 위해 한사코 사건( / )현장 밖에 멀리 머무르는 사건 감별사 되기를 흉내내고자 했던 움직임 등과 비교할때, 감히 기꺼이 사건을 발명해내려는 자율주의자들의 이 빛나는 투혼과 혁명 정신이야말로 ('사건론' 자체(만으)로는) 가장 적확한 대응이자 가히 최고의 사건론으로 평가할 수 있음.

『대중들의 공포』가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신격화가 문제적인 것이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체의 번역과 사건의 감별이 아니라 그들의 발명과 생산이다!!![8][9]
(일찌기 Marx의 일갈에 따르면 심지어 철학의 임무조차 그러할 진대 하물며 예술과 정치와 교육과 정치신문을 포함한 매체(비평)활동가들 등등에 대해서라면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능한 순교자나 비굴하고 굴종적인 내시가 아니라 차라리 Machiavelli적 King-maker이자 기사단과 호위무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신을 대신해 이번엔 선험적 대중으로 정신의 빈 중심을 메우고 있는 이들을 보면 미군과 비행기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태평양 군도의 작은 섬 원주민들이 생각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자신의 숭배 대상이 원래 그렇게 이미 주어진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존재로서 출현하기 이전에 어디서 어떻게 어떤 기제로 발생/생산되어 오고 있는 것인지는 결코 생각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주체와 대중은 형이상학적으로 완벽하게 고정된 채 이미 주어진 신성한 Text여서 오로지 정확한 번역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대상이라 생각되어 이런 주체생산공정과 technology의 발명 같은 건 엄두도 낼 줄 모를 정도로 아무리 위축되고 소심해진 겁먹은 좌파라 하더라도 최소한 주체의 변이와 새로운 주체(형)의 발생을 '가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정도의 개입과 실천은 시도해보려는 발상을 감행해야만 할 것이다.
원래 인간 자체가 그렇지만 너무나 강고하게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된 채 주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대중도 의외로 ’빈 서판’[10]에 불과할 수 있으며, 현실과 '미래' 또한 예측하거나 감별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 Text, 즉 성전의 번역이 아닌 '빈 서판'[10]에 Code를 기입해 새겨 넣는 Programming과 창조/창작의 글쓰기 시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5.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Lazzarato에게 ’1996년--영미권에선 ’2010년--의 공동 저작『Le Bassin de Travail Immatériel』(일명 BTI)로 대표되는 post-Fordism과 비물질 노동 연구를 넘어, "(신)자유주의(와의 착종교란) 현상에 대한 ’각성과 깨달음’"으로 요약할 수 있는후기 Foulcault적 대선회가 일어나는 것은『Le Gouvernement des inégalités. Critique de l'insécurité néolibérale』(Éditions Amsterdam.’2008)나, 이를 확대 개정했던, 영미권에서 내년 1월에『Experimental Politics: Work, Welfare, and Creativity in the Neoliberal Age (Technologies of Lived Abstraction)』이란 제목으로 출간 예정인 그의 ’2009년 저작 『Expérimentations politiques』(Éditions Amsterdam. ’2009)부터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이 저서를 구상하면서 그는 2004~5년에 France에서 그가 당시 불안정(/)유연 노동자라 개념화했던 연예산업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실업보험 급여를 둘러싼 신자유주의 개혁 반대투쟁을 model로, 모든 노동자들의 행동양식과 이동성 등 자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결정적 노동통제 수단으로 부상하는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에 촛점을 맞추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빈곤화와 더불어 부채 문제 등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제와 예속 기제 연구로 전환하게 된다.
(영미권에선 immaterial labor 개념과 precarious labor 개념의 선후관계를 좀 오해하고 있음.)


[2] 이러한 통합을 위한 영미권의 노력으로는 최근 『차이의 정치와 정의』로 국내 번역된 ’1990년 저작『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정의, 그리고 차이의 정치)』의 Iris Marion Young(US)과 이를 (교묘하게) 뒤집어 반복하며 정정하는 Nancy Fraser(US)***, Bob Jessop(UK)** 등이 각광을 받고 있음.
(*이 정정은 Iris Marion Young이 기본적 논조와 시대적 한계를 본서와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후기 Foucault적 자각이 전혀 없어 엉뚱한 나무에 대고 짖어대다 결국 신자유주의에 착종교란됨으로써 포획되어버리고 마는 진보 강아지의 운명(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기만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주의에 불과했던 복지국가와 자유주의적 평등조차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동원되고 원용당하기를 시작으로... .
소위 이 '차이의 정치'란 기본적으로 소품종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던 Fordism과 특히 국가독점자본주의적 3차 구조에 조응하는 억압/규율적 획일주의 대중사회( 등)의 적극적 관리체제에 대한 저항전략으로서 (가장) 유효했을 뿐이다. 상기한 신자유주의 방치전략 때문만 아니라 대중, 군중과 공동체 자체가 사라지고 서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통[통약!]불가능의 고독한 모래( / )원자로 스스로를 환상하는 Narkissist 개인들만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라면 어떤 새로운 전략이 모색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미 사회의 기본적 Platformat(ion) 자체가 전환되었다는 이 사실이 (정체성) 다양화 전략이 비록 잠시나마 약간의 긴장은 초래할 지언정 더 이상 어떤 본질적 위협과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근본적 이유인 것이다. 이미 체제는 이 다양화를 수용해낼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를 새로운 이윤과 경쟁력의 원천이자 동력으로 전유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공통적으로 양대 계보를 대립적 이분법의 택일 관계로 사고하는 수준은 다 벗어나 있는데 이러한 세계(사)적 노력들과 비교하면, ’2004년에도 아직 여전히 ’차이의 정치’에 대해서만 일방적 찬미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본서의 한계가 더욱 극명해지고, 그 한참 뒤늦은 번역소개의 의미도 좀더 드러날 것이다.

**『Towards A Cultural Political Economy. Putting Culture in its Place in Political Economy』. Cheltenham: Edward Elgar'2014.
: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걸친 역작인 Putting it in its place 3부작이랄 수 있는 자본주의 정치-국가 이론, 경제이론, 문화이론서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며 그 모두를 통합결산하는 각별한 의미도 있음.

*** 이에 대해 Fraser와의 논쟁으로도 유명한 Judith Butler의 입장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데, 물론 SF분파로서 Fraser의 통합 Solution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거의 유일한,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구조의 융접합/단일화 차원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 하는, 이 경우 문화(적 인정), 정치(적 대표), 경제(적 분배)라는 3원/3중 교차론적 단순 병합/병치 사고방식인 건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하여 Butler는 단지 자기 정당화와 분파 보전을 위한 변명에만 급급해 그간 자신의 (정치)경제적 무관심, (그로 인해 촉진된) 신자유주의와의 공모 등에 대해선 어떠한 반성도 없이 구조적 얽힘과 '인지적 분별', 실천적 통합( 즉 연대와 협력)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마구 뒤섞은 채 갑자기 SF적 분리/병치 교차론에 대한 최대 비판, (그러나 마치 자신의 정반대 분파인 듯 취급해 왔던) 사회재생산론자 코스프레로 도피할 뿐, 분파 간 실질적 연대와 협력을 위해서는 그 어떤 다른 대안도 내놓지 못 한다.
그에 비한다면 최소한 Fraser는 실천적 진정성에 기반해 언제나 사회와 운동 전체를 조망하며 무엇보다 연대와 협력의 방안을 고민하고 있을 뿐 아나라, 줄곧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인정하고 수정을 계속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Butler가 이 주장을 진심을 다해 실천했더라면 양대 계보 통합의 또 한 경로가 확보될 수 있는데, 자율주의의 Lazzarato 계열, 특히 본서의 결론부에서도 개진되었어야만 마땅할 (신)QMF; 즉, Queer Marxist Feminism이 그것으로 이 노선에서는 적극적 Queering과 비혼, 비출산 등의 재생산 파업을 통해 무급 분업 재생산양식을 위험에 빠트리고 실질적으로 파괴해 나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체제는 초기엔 이성애 출산 가정에만, 위기가 심화되면 비혼/동성혼 불문 출산(/입양) 가정 모두에 선별적 장려/지원금 공급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재생산노동 유급화 및 '사회화'는 일정 정도 달성되는 국면으로 전개되어 나아갈 것이나 여기서도 결정적 장애는 세계화와 기업 해외 이전, 결혼이민과 이주노동자 유인, ’기계화’, 그리고 여차하면 전면적인 ’일코노미’ 체제로의 전환 카드 등이고 따라서 재생산 영역도 (특히 모든 gender의) 단결된 총파업이 아니라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3] 베륵손


[4] (Hungary와 Czech Prague의 봄에 이은) 68 이후, Keynesian 복지국가체제 및 동구권 Stalin주의 체제의 붕괴 등을 모두 포괄하는 50년 간의 이 세계사 국면은 (신)자유주의 initiative epoch로 정의될 수 있고, 자본주의 4차 구조(기)에 의해 규정/조응되며, 이 종말 국면의 격변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전 세계적인 반자유주의, 반의회주의 물결이 모두 포괄되며 소위 populism의 부상과 Carl Schmitt 연구 Boom, ’시진핑 사상’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체제 전환 (시도), 각주 [1]에서 다룬 현상 등등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5] 여기서 저항의 (주체) technonolgy, 반체제 공학으로서의 hacking/cracking과 re-engineering은 본질적으로 소발명과 대발명의 관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예술작품으로서의) 개인적 ’되기’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 발명의 관계를 포함한다.
통속적 Foucaultian[6]들이 흔히 빠져버리는 가장 큰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개인단위의 사고수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며 작품으로서의 개인만큼, 또는 보다 더, 다른 모든 작품, 즉 타자들을 아우르고 보살피며 훼손을 막아주는, 총작품이자 박물관으로서의 사회도 중요하다는 자각의 부재이다.


[6] 발음 문제로 ’Foucauldian’도 빈용되나 Narkissism과 마찬가지로 어원을 밝혀 적는 원칙에 따름.


[7] Guattari의 정확한 발음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유독 오해가 심한데 모든 경로로 근거들을 종합할 때, France 토착민 출신이었다면 '가따리'여야 했겠지만, Italia계(; 즉 본질적으로는 외국인)이므로 '과따리’.


[8] Althusser의 가장 충직한 제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Balibar의 근년 저작들에 대하여 국내에서 현재 집중적인 번역과 소개 작업이 준비/진행 중인 것은 우리 사회와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의미있는 일이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앞으로의 면밀한 연구 검토와 실천을 약속드리는 바이며, 본고에서의 짧은 논평은 이 작업 전체에 대한 총평이나 최종평가는 전혀 아니고 단지 현 정세에 긴밀히 연관된 최대 논점 한 가지만을 급한 대로 잠깐 언급하고, 또한 이를 통해 먼저 이 작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촉발하고 본격적 논의와 공론화를 시도한 것에 불과하므로 오해 없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만, 이 작업 훨씬 이전부터 Althusser로부터의 (일정한) 후퇴라는 Balibar의 어떤 측면들에 대하여는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던 편이라, 마침 이런 저의 소회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윤소영선생님의 최근 Balibar 평가가 직후에 발견되어 이를 간략히 덧붙임으로써 진행 중인 향후 작업에서의 사전 고려에 미력이나마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발리바르가 최근에는 이상한 발언을 많이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2007~08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물론연구집단(GRM)을 결성했는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알튀세르주의와 오페라이스모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주요 성원 중 한 사람인 카바치니(Andrea Cavazzini)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알튀세르의 '최후의 투쟁'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을 모색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 유물론연구집단이 2012년에 창간한 반년간지 Cahiers du GRM (http://grm.revues.org)의 7호['2015]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 출판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을 기획하면서 알튀세르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발리바르와 뒤루*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초반에 발리바르가 [['자본'을 읽자]]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스탈린주의'의 핵심은 역사과학이라는 '당황스럽고'(effarant) 또 '터무니없는'(absurde) 야망이었다고 선언하면서 뒤루*와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넓은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뒤메닐도 지난 ['2015년] 6월에 파리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한 50주년 기념학술회의( http://www.ens.fr/actualites/agenda/article/althusser-1965-la-decouverte-du)에서 발표한 논문( http://www.jourdan.ens.fr/levy/)에서 [['자본'을 읽자]]가 실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본]]은 경제이론이지 역사이론은 아닌데, [['자본'을 읽자]]는 양자의 '긴장'(tension)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경제학과 달리 역사유물론은 이론이 아니라 테제일 따름이라는 것이고요. 달리 말해서 역사과학은 불가능하고 그 '희미한 그림자'(fre^le ombre, [[독일 이데올로기]])인 역사철학만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에요.
발리바르의 지론은 알튀세르학파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진정한 스승은 진리일 따름이거든요.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승을 떠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경우에 '진리 속에 존재하는'(e^tre dans le vrai) 사람은 발리바르가 아니라 오히려 알튀세르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

윤소영('201510).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사회성격 논쟁 30주년]] 공감. p96~97.


* '1965년 당시 양 seminar의 전체적 관리자로서 Althusser나 Balibar는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론가적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곤 했다고 함--인용자.

본서를 포함해 윤소영선생님 주도의 과천연구실세미나 공감시리즈는 거의 운동의 총노선이라 할 기념비적 노고이고 운동의 전반적 침체기를 견뎌내며 나름대로 돌파해온 또하나의 경로로서 치하되어야 마땅하고 그만큼 다양한 타 정파들에 대한 견해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견해들 모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국내 최초 Balibar 전공자이자 소개자이며 또 최장기 연구자로서의 Balibar에 대한 언급은 중요하게 참고할만한 충분한 권위를 가진다 아니할 수 없음.


[9] 이런 점에서도 다시 한번 더!! 자율주의자들과 bio-capitalism론이야말로 진정한 Foucault 좌파로서 그 모든 Foucault의 적자들 중 적자이자 가장 탁윌한 장자이며 아마도 Foucault로부터는 도출될 수 있었던 최선의 형태이며, 이들에게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Foucault 본인의 본원적 한계에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다.


[10] Tabula rasa not the blank slate









[초고용 memo
(→긴급과제가 발생해 이쯤에서 대충 일단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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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주디스 오어 지음, 이장원 옮김 / 책갈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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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 자체는 (한심하게 만연된 무지의 red complex 때문에 과도하게 저평가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가장 정통한 분석에 입각해 최근의 국제 상황들까지 페미니즘 역사와 최신 이론 정세들을 거의 모두 꿰뚫고 있는 현재까지 나온 가히 최고의 입문서 중 하나라 해도 흠잡을 데가 없는 저작이다.
번역도 매끄럽고 가독성도 좋으나 다만 한 가지, Radical feminism을 굳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오역하고 있어 그 의도와 태도에 의구심을 갖게 하고 다른 부분들까지 절대적 신뢰도를 의심받게 만드는 아쉬움이 있다.
원래 학술적으로는 거의 예외없이 ’~적’과 ’~주의적’이라는 용어 사이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고 심지어 종종 대립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이 분들이 신성시해 마지않는 ’Marx적’과 ’Marx주의적’이란 용어의 관계사가 그 비근한 일례를 구성하는데, 특히 ’Marx주의(적)’이란 말이 공식화된 교조로서의 Stalin주의 Soviet Ideology만을 유일하게 지시할 때 이에 ’대립’하며 이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다양한 ’비정통적’ 사유와 방법론을 시도하는 사상체계들이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것이 바로 ’Marx적’이란 용어였듯이 이 경우도 ’Radical’과 ’Radicalism/Radicalist(ic)’은 큰 차이가 있고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당대에 ’Radical’은 차라리 ’과격한’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던 어법인 반면 ’급진주의’나 ’Radicalism’은 사용하고 싶다면 동일한 text 안에 반드시 엄밀한 학술적 정의를 적시하여 대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이 기초과정을 빼먹으면 최근의 제1어법으로 (후기) Judith Butler의 3세대 feminism을 포함하는 급진민주주의 소수자정치학, 좀더 전통적인 제2어법으로 사회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내 좌파(나 때로 반자본주의 급진좌파), 미국색 짙은 제3어법으로는 Saul David Alinsky로 대표되는 Progressiv(e Liberal)ism 내 좌파를 지시하게 되어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Marx주의 내에서는 전통적으로 급진주의라고 하면 거의 제2어법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로 그 Marx주의 저작에서 원문의 훨씬 넓은 외연과 단순어법을 가진 ’radical’을 민감하고 risky한 학술 용어인 ’급진주의’로 번역한 것은 가장 아쉬운 오역적 개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태도가 운동의 다른 단위들로부터 이 정파에 필요 이상의 반감과 비난을 불러오고 있는 일원인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이 후기는 사랑하는 동지들의 노고를 존중하여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까지 상당 시간을 기다려 작성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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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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