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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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릴 적 가끔 들르던 동네에서 초연(하고 그래서 조금 불결도 )해 보이는 외모에 갖가지 성경 구절들을 섞어가며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어 외쳐대는 한 사나이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광야에서 외롭게 진리를 외치는 예언자 세례 요한이라는 image에 사로잡혀 그와 대화를 시도하다 곧 가까이 있던 그의 집으로 초대되기에 이르렀다.

집안은 다소 어수선했으며 입던 여자 팬티 한두 장이 나뒹굴고 있었고, 넓지 않은 방은 처음엔 몰랐지만 장롱 2개를 약간의 틈만 두고 연이어 세운 뒤 얼기설기 교묘하게 위를 막고 담요를 덮어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개구멍 같은 통로만 남겨 놓고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금 있자 그 어두운 구멍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좀 놀라서 그 구멍 속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안은 좁은 침실처럼 꾸며져 있었고 이불 속에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내가 놀라서 안을 들여다 보느라 잠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 했더니 그는 분명치 않은 몇 마디 뒤에 "그럼 거기 들어가서 자."라고 내뱉으며 누워버렸다. 


놀랍게도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와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는 나에게 아내는 나중에 저녁이나 사줄테니 다시 한번 들르라고 은근한 유혹을 덧붙였다.



(원래 사람들을 잘 쳐다보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 그때서야 기억해보니 나는 전에도 지나가며 그를 얼핏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 등교 시간 무렵 근처 여대앞 역 주변, 사람들도 적잖이 오가는 좁지도 않은 모퉁이 길 초입부의 빌딩 앞에, 거기서 밤이라도 난 듯 박스 판지를 펴고 팔베개를 한 채 모로 누워 windbreaker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냥 야수가 된 광인에 불과했고 그의 아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남편과의 합방을 그렇게까지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1.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기묘하게도 나에게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엔 [전두환 회고록]의 ’사고실험Gedankenexperiment’이 떠올랐다가 전형적인 Logos중심적 남근주의라는 생각에 김수창을 거쳐 그 광인에게로 생각이 모아지자 그간 궤변론을 늘어놓을 때마다 종종 잘난 척 비판해왔던 Feminism 진영의, 대모님들께 너무나도 부끄러워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1]



Groys의 말대로라면 언어의 왕국이 건국된 지도 어언 100년, 붕괴한 지도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며 애초 출발선부터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만)의 언어 자체가 부재함을 절규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유교라는 ’언어’로 짠 용포와 도포자락을 Marxism, 아니 Stalinism이란 서양복식으로 갈아입은 언어의 연금술사, 언어와 문자의 지배자 씹선비로 비판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전존재를 내던져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자성하고 가장 먼저 자기자신과 사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Groys 주장의 전제들 너머까지를 다시 돌이켜보면 소위 그 ’언어의 왕국’, ’철학의 왕국’은 심지어 태초부터 있었다고 주장되며 최소한 전근대까지는 동서양 모두를 강고하게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데, 그때까지 지배계급이 의존할 수  있던 그나마 합리적인 거의 유일한 통치술이자 Technology인 말씀과 언어의 지배가 도대체 무슨 대수라고 이 호들갑이란 말인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붕괴해버린 세계의 문제점과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한 사고와 언급이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을 죽일 정도의 뼈를 깎는 처절한 반성과 성찰을 계속해 진정으로 부활하지 못 하는 한, 폭력과 패배라는 운명의 순환회로는 영원히 반복될 뿐이며, 따라서 이 책은 일말의 자기비판도 회개도 개선대안도 없이 고스란히, 아니 잘못된 원인분석을 통해 오히려 더 퇴행적으로 반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전시장일 뿐이다.




2. 언어의 지배는 더욱 거칠고 끔찍하며 주권권력과 규율권력의 억압사회일 뿐이다.

언어는 매우 거칠고 성긴 인식의 원시적 그물망일 뿐 아니라, 선불교의 불립문자 정신이래 Roman Jacobson, 그리고 Lacan과 Deleuze에 이르기까지 언어가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통찰들이 있어왔음에도 이 무수한 가르침들을 모두 깡그리 지워버린 채 위기에 처한 Homo sapience종의 불안과 공포를 등에 업고 기계파괴선동으로 위장하여 시도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식론에서의 Stalinist Nomenclatura 반동 Coup d’Etat일 뿐이다.


섬세한 언어(화) 능력과 세련되고 부드러운 accent와 번역능력에 기대어 체제를 지배해왔던, 반면 동시에 언어화되지 못 한 실재와 진실들, 더구나 모든 비언어적 존재와 생명과 인식과 소통과 행위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언어권력의 전횡과 횡포가 만연하며 따라서 독립적 (자기) 언어화 능력이 부족한 개인과 계층, 부문은 번역당할 때까지 전적으로 소외될 수 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비)의도적 오역과 왜곡이 수반되어 왔던 대리발화의 이 전형적인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이란 말인가!!!




3. 시대착오

Linguistic Turn의 오래된 종말과 
Post-linguistic Turn 지배(의 붕괴)기에 이은 
(New) Materialistic/Ontological Turn의 도래

아직 (국내에서는 특히 더) 흔히 ’생물학주의의 귀환’이나 Biological Turn으로의 역주행처럼 오해되는 이 도래는 사상사의 장기파동[LT(E) Wave]이며, 현재의  speculativeness는 그 초기 도입/생성기에 발생하는 일시적 과도 현상의 하나일 뿐(으로 보임).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과거.



원래 비기표적 기호, 도표적 기호계란 수학적 기호만을 지칭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영상문화 기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Groys의 본서는 이 외에도 가장 엉성하고 성기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존재를 지배하는 (Cognitive) System II 로서의 감응-정동계 전체를 통째로 삭제해버리고 억압하고자 하는 가장 질 나쁜 전형적 Logos-이성-논리중심주의의 오류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등 심각한 반동을 자행하고 있지만, 이하에선 최근의 기술경제적 추세와 이를 문제화한 [대량살상수학무기] 등의 계기에 주목해 언어(학)과 수리(/)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만 고찰하기로 한다.




4. 과연 언어/논리계산과 수학계산은 대립하는가?
;잘못된 대립구도와 이분법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해 대립시키고 과장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경제와 정치,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정신병적 ’증상’에 도달함으로써 결국, 언제까지나 자신의 동물성과 기계성을 부인한 채 언어(III)로서만 자기자신을 정의하고 싶어하는 Homo sapience 종의 낭만적, 목가적 환상에 편승해 전형적으로 다시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고 선동한다.

자본주의가 절대악인 이유는 그것이 수학의 왕국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거울쌍인 줄 알았던 Stalin주의가 절대선인 이유는 언어의 왕국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수학과 언어(학)의 대립이란 왕립과학과 유목과학의 대립보다도 허위적인 순전한 기만이며 차라리 농담이고 희극일 뿐이다. 
언어가 지배하던 악의 체제들은 벌써 다 잊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5. 언어인가 변증법인가?

그럼에도, 본서의 거의 유일한 합리적 핵심이라 할 만한, 서로 다른 이질적 network( / )system들 간 동시 중첩/간섭과 과잉결정 현상의 정신적 반영인 변증법의 특별한 위상에 대한 재고찰은 절실하다.

Marxism 전체에 고유/특별한 ’가치Eigenvalue와 우월성Eigenstärke’이 있다면 그것은 고래의 구습인 언어의 지배가 아니라, 저항과 혁명(의 정신)을 실현하는 인식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지배에 있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총체성의 논리’란 다름 아닌 이 ’변증법’의 한 부분이자 측면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변증법’이란 광의로는 기존 지배 언어, 논리, 인식체계와 정신-Ideology 구조의 모순/틈/공백을 ’포착’해내고, 특히 그 체계가 의문의 여지 없는 자연적/천부적 진리로 환상하는 전제들을 재검토해 허위를 드러내어 해체하고 전복해 붕괴시키려는 끊임없는 (인지적) 저항 운동에 대해 붙여진 다른 이름[3]이며 협의로는 그 한 정식화 시도를 일컫는 이름이다. 

언어가 곧 변증법인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어서 언어를 초과하고 넘어서서 결국 (기존의) 언어와 논리체계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것이 변증법이며, 이렇게 해서 종국에는 인식 체계 자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을 도래케 하고 처음부터 다시 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변증법이기에, 그러므로 단적으로 ’언어로 사회를, 그래서 타자를 지배하는 것이 결단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의 요체라 말할 수 있다.

Groys의 말대로라도 언어에 그토록이나 열중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해버리고, 상대적으로 언어에 전혀 열중하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오히려 살아남아 건재하다는 현실조차 가장 강력하게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모든 인간의 정신은 이 운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6. 변증법의 전망

사실 수학을 포함한 강박적 미세분할과 국소적 인과론의 차이 논리학은 유사변증법일 뿐 본질적으로 배중률은 전혀 위반하지 않고 모순률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엄수할 뿐 아니라 극대화하고 최대화하기 때문에 형식논리학의 충신 중 충신이자 일등공신에 불과하며 아니 오히려 형식논리학 그 자체인 반면, ’양자현상’은 전형적인 변증법의 일례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차이의 형식논리학은 0과도 매우 비슷하고 1과도 거의 같지만 완전히 0은 아니고 그렇다고 1도 아닌,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었던 그간의 인지그물망으로는 그 사이에서 우리가 걸러내 보지 못 하던 0.5를 찾아내고, 다시 이 작업을 계속 반복하며 0.54와 0.548과 0.5483들을 찾아내는데 몰두하며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 사이에서 LGBTQIAK를 찾아내는 Queer feminism은 물론이고 감각의 재분할을 역설하는 Ranciere를 포함해 모든 소수자 정치학의 주창자들도 여기에 포함되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근본적으로 형식논리학을 전혀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학은 성긴 언어의 그물로는 도저히 걸러지지 않는 무수한 미세 data들의 대량발생과 그 흐름/이동을 인식하고 처리해내는 데 유용성이 있는 기계화가 용이한 규칙적 미세분할과 무한 반복, 확장의 방법론을 추가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발생, 생성, 변화, 변이의 단순 변증법을 초월하는 완전히 0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1인(, 그래서 오직 바로 그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0도 아니고 1도 아닌) 존재들의 동시성 역설 변증법이고 이것이 바로 ’양자 현상’이며 모순률과 배중률을 동시에 무너뜨리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요구하는 문제의 새로운 지평이다.





국소인과론과 미세분할의 차이 논리학을 넘어서는 다중(성)/중첩 논리학을 요구하는 양자현상과 변증법

특히 비국소적 ’얽힘’을 포함한 이런 모든 자연,사회적 양자현상들은 형식논리학의 근본 규칙들을 동시에 전복하면서 (Homo sapience적) 사고방식의 근원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도구들을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차이의 논리학을 넘어서는 인식론이 필요하고, (논리/인식론적으로만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현단계 변증법의 당면과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요약하면 언어학이든 수학이든 형식논리학의 본질은 (시간을 무시/극복한[2]) 고정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동일률의 (원자적) 강체론으로 정의할 수 있고, 언어학의 혁신은 물론이고 수학의 혁신까지를 요구하는 변증법은 이 단계를 넘어 형식논리학을 모든 정립/정식화된 지배의 논리학과 인식론으로 정의하고 그 헛점과 한계를 ’비판’하며 ’해체’하고 붕괴시켜 근본적으로 새롭게 ’구성’/건설해 나아가는 아래로부터의 모든 (비/반-형식적) 저항논리의 종합학이자 인식-논리의 영속혁명론으로서 새롭게 발전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7.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1
----언어의 지배로 포장 미화된 단일언어주의 

   이런 혁신된 확장 관점에서 보면 항상 많은 말들이 오가지만 진심어린 진정성 넘치는 따뜻한 대화랄 대화는 없었던, 언어의 지배로 미화되고 포장된 단일언어주의를 벗어나 갈등의 대화 정신으로서 Bakhtin의 복수(언어)주의가 차라리 변증법에 훨씬 더 가까우며, 나아가 차연의 윤리와 사건의 정치, 해체의 철학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제까지의 변증법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3].

다만 양자 모두!! 이러한 차이의 초월과 접합/종합을 통한 새로운 ’구성’과 실천적 연대협력의 공통되기에 도달하지 못 하는 한 결국 분열과 배신의 이분법을 무한반복해대는 사이비 변증법에 불과할 뿐이라는 깨달음을 골수 깊히 각인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롭게 접합하고 구성해내지 못하는 반복분할은 본질적으로 철저히 형식논리만을 강화할 뿐이며, 이것이 ’차이의 정치’가 자본주의에 착종교란되고 공모함으로써 오히려 지배체제를 섬세-유연화, 교묘화하면서 완성시키게 되는 철학적, 인식론적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변증법적 대화상대는 바로 유일한 대타자이자 검증의 시금석이고 누빔점인 실재 밎 현실이며, 이것이 바로 유물론의 정신이다.
유물론이 빠져버린 변증법은 파괴와 해체, 분열 자체가 목적일 뿐인, 흔해빠진 관념론적 급진주의 비판철학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또하나의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총체성의 논리’도 결국 이 실재와 현실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분절되고 파편화된 부분만을 떼어내어 그 작은 알 속/이불 속에만 도피해 파묻혀 있고자 하는 postmodern의 오타쿠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관념과 세계의 전면적/총체적 대질을 일컫는 가장 강력한 "Fact Check" 방법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8. 논리에서 다시 현실로 2
----인식의 도구와 인식의 주체; 인식과 권력

그러나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으로 위험한 문제는 이런 논리적, 인식론적 논의가 전혀 아니다.


Groys가 경제를 돈으로 돈을 수학으로 치환하고, 정치를 언어(Game으)로 치환하는 방식의 반복을 통해 수학과 언어학, (Cognitive) System III와 IV, 자기 뇌의 한 부위와 다른 부위를 대립시키는 잘못된 이분법과 대립구도로 진짜 노리는 것은 인식 주체와 권력의 문제를 지워버리고 인식 도구와 방법론의 문제로 바꿔버리는 치환술이다.
이러한 치환술에 속아넘어가 권력과/의 주체 문제는 전혀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역사적으로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기계와 수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의 소유자와 용법이 문제라는 교훈도 완전히 망각한 채, 다시 관념들 간의 대립으로 치환하여 거칠고 성긴 원시적 인지 그물망인 언어에 비해 인류사 최근년의 좀 더 촘촘해진 그물망에 불과한 애꿎은 수학과 계산을 비난하면서 무능한 향수와 싸구려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전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ostmodernism의 상투어 중 하나였던 ’계산 불가능성’이란 언어에만 하사되는 예외적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게 아니라 ’진리의 일반적 인식 불가능성’을 목표로 의도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Cognitive) System I, II, III, IV의 허구적 대립 선동과 그를 통한 Hegemony 시도가 아니라 인지자원과 도구, 방법론들의 총체적 동원과 그 협응이 중요하며, 언어든 수학이든 계의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에서도 (단일) 지배가 아니라 그 발화의 복수-민주주의적 평등과 만개, 즉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이 바로 그 생명인 것이다.




S.

결론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 거부되고 붕괴해버렸으며 그 내부인들에게는 기념하고 싶은 그리움도 되지 못 하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해, 문제의식 자체가 전혀 없고, 내인이든 외인이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사유와 언급이 더 없다.

결정적으로 문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구좌파의 이런 비겁한 변명들과 자위 공연은 새로운 저항주체들을 Marxism화/(으)로 인도하는데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Marxism과의 협력을 촉구하기 위해선 Marxism 내의 선과 악을 모두 솔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기 내부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제거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선행되어야만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기타 정파(들)의 세부이론들에 쏟아지는 그 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Marx-Leninism[4]보다 차라리 그나마 그들의 ’정신’을 기꺼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이 Sovjet Ideology에는 아예 이런 작업들을 철저하고 근원적으로 치열하게 수행해 나가기 위한 언어와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Stalin과 그 체제의 공과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공정한 평가도 필요하나 결벽적 신중성으로 Stalin(주의) 자체와 특히 그 내/외인에 대해 완전히 판단을 중지하고 변론술로서만 평가해도 아직 Lenin조차 혐의를 거의 벗지 못 한 상황에서 Stalin을 변호하고 나서는 건 박근혜 변호인단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변론 자체만 검토해도 기만성이 너무 강해 ’실질적’ 설득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Notes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
처음엔 이 책의 지적 도발과 도전에 대해 (세계와 특히 Feminism을 향해) 내보일 한국((그래서) 남성)지성계의 ’실체적’ 반응이 너무너무 궁금해 일찍 작성을 대충 마쳐 놓고도 일부러 침묵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아무리 기다려봤자 아마 누구도 이렇다할 응답을 내놓지는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고, 그래서 기다림으로 한국사회가 얻을 공익보다 잃을 손실과 혼돈이 훨씬 커 보이기에 그냥 몇 자 적기로 한다.

더구나 이 책은 최근의 연작 [대량살상수학무기], [기호와 기계], [사건의 정치], [차이의 정치와 정의] 등과 기막히게 시의적절히 쟁점을 공유하면서 반대편향의 전형을 잘 형상화하고 있기에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국면이 조성됐을 때 집중적 논의를 촉발시키고 활발히 전개하는 것또한 최선의 실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과도한 노파심에 혹시 연관의 줄기를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부연요약하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공론장 등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이고, 광인의 아내는 그들이 배신한 Feminism과 하층계급들을 상징하기도 하다.))


[2] 여담으로 덧붙이면, 이를 부정적으로 볼 땐 시간을 전혀 이해/고려하지 못 하고 무시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시간을 초월해 그 모든 변화와 변이의 간계를 극복하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기는 있다. 이는 마치 산을 넘기 전과 넘은 후 지금은 모두 산 아래에 있는 두 사람과도 유사한 것이다. 


[3] 다중성 양자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를 하나의 맹아가 오히려 반-변증법 진영으로 매도돼 온 Deleuze의 적극 주목-발굴에 의해 유명해진 ’다양체Mannigfaltigkeit; man’I’fold; multiplicite’ 개념일 수 있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강력하게 증명해준다. 
(즉, n차원 국소 Euklid(ean) 공간에서 입자와 파동 같은 다중성은 n+k차원 위상 공간에서 통(합된 단)일 다양체의 n차원으로의 서로 다른 사영들일 뿐일 수 있다는 idea이다.)


[4] 문외한들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면, 이는 문자 그대로의 Leninism과 Bolshevism 일반을 지칭하기보다는 구소련의 공식 Ideology였던 Stalinism을 일컫는 용어로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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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izome 2018-03-0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출간 당시 1주 간 게재 후 삭제하였으나, 최근의 몇 민감한 내외부 정세 때문에 복구되었으며, 현재로선 향후 유지 여부는 미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