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과 조지 그리폰 북스 12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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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톨킨이나 R.마틴같은 작가들의 작품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는, 외국 환타지는 으레 그들의 작품처럼 진지하고 엄숙하며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 주는 소설들인줄만 알았다. 그래서 약간 유치해 보이는(?) 표지 디자인을 자랑하는 '드래곤과 조지' 를 집어들었을때는 이 책 역시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뭔가 심오한 관계를 묘사한 묵직한 환타지 소설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 전혀 그런 소설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여태 읽어 본 외국 환타지 소설들 중에서는 제일 가볍고 유쾌한 작품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줄거리 소개며 다른 분들의 서평에 실려 있으니 생략. 이 소설을 읽으며 받은 느낌은 단순하다. 그냥 재미있었다. 이리저리 치이는 삶을 살아오던 힘없고 연약한 주인공이 갑자기 엄청난 힘을 소유한 드래곤이 되어버리고 약혼녀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험담은 '반지의 제왕' 에서 프로도가 세계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목숨을 건 모험이나 '얼음과 불의 노래' 의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정치적, 군사적인 모험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마치 한편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보다 훨씬 똑똑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말하는 늑대나 과연 마법사인가가 의심될만큼 황당한 마법사 역시 글에 유머를 더해주는 양념들이다. 물론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목숨을 내놓고 위험한 모험을 벌였겠지만, 미안하게도 내 눈에는 '..나도 저렇게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유쾌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책의 결말.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는, 주인공과 그의 상대역인 여주인공은 힘들고 고난스러워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주인공과 약혼녀는 시간에 쫓기며 고달프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 세계 대신 위험에 가득차 있긴 하지만 더욱 매력적인 환상의 세계를 택한다. 현대의 복잡하고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나를 포함해서) 어딘지 모르게 부러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약간은 덜 세련된 구성과(옛날 작품이니 어쩔 수 없다;) 중간중간에 부비트랩처럼 도사리고 있는 지루한 부분들이 거슬리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유쾌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모험의 세계로 소풍다녀오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환타지 소설이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는 골치를 앓는 분들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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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혜원세계문학 21
E.A.포우 / 혜원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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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초자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재미있어한다. 그런 인간의 심리 때문에 여전히 온갖 귀신에 관한 이야기, 과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들이 영화와 소설로 다루어지며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현대에서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 를 가장 잘 이끌어내는 작가는 스티븐 킹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환상적인 분위기의 공포물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에드거 앨런 포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검은 고양이' 야말로 그런 류의 작품들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하는 소설 중 하나라고 본다.

특히 이 소설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은 주인공이 담담하게 술회하는 구성으로 자신이 타락해 나가는 과정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직접 묘사해 나가면서, 독자들이 직접 주인공의 처지가 되어 검은 고양이의 끔찍한 복수를 당하게 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비바람 몰아치는 새벽녘에 읽었는데, 책장을 덮었을 때 귓전에 고양이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아서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생생한 느낌을 받으며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무너져 내린 회벽 안에서 나를 노려보는 시체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우는 새까만 고양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오싹함을 느끼며 저절로 몸서리를 친다. 사실 현대에는 어느 정도 진부해진 스토리이고, 내용이 워낙 잘 알려져서 무서울 것이 없어야 할텐데도 불구하고 '검은 고양이' 는 읽을 때마다 으시시하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포우가 쓴 공포물 모두가 그렇다. 포우의 글이 말초적인 공포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무언가' 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검은 고양이' 말고도 '적사병의 가면무도회' 나 '어셔 가의 비극' '아몬틸라도의 술통' 등도 훌륭하면서 무서운(?) 단편들이다. 그리고 '도둑맞은 편지' 나 '모르그가의 살인' 은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들로 뒤에 나온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능가할 만한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무덥고 잠 안오는 여름밤에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픈 작품들이다. 아마 책 한권이 선풍기나 에어컨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에도, 바깥에서는 고양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게 환청인지, 아니면 실제로 고양이가 울부짖는 소리인지... 글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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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코담배케이스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9
존 딕슨 카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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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슨 카는 정말 훌륭한 추리작가이다. 작품 활동을 한 기간도 매우 길 뿐만 아니라 내놓은 작품의 수도 엄청나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기발하고 멋진 작품들을 잔뜩 내놓으며 영국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 못지 않은 인기와 명성을 얻었던 작가이다. 특히 그는 '불가능범죄의 대가' 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겉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살인이나 기괴한 트릭을 즐겨 썼다.

아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추리작가 10명을 꼽으라면 꼭 들어갈 사람이고, 다섯 사람을 꼽으라고 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작가인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선 도대체 딕슨 카의 작품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화형법정' 이나 '흑사장 살인사건' '모자수집광 사건' 등등은 예전에 자유추리문고와 동서추리문고 등을 통해(..70~80년대다-_-) 번역된 적이 있었으나 이미 절판된 지 옛날.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딕슨 카의 작품은 달랑 이것,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뿐이다.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는 딕슨 카의 작품 경향이 바뀐 뒤에 씌어진 작품이라, 범죄의 기법과 트릭,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 묘사에 치중했던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특히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쓰게 되어버린 가련한 주인공 이브의 초조한 심리상태 표현이 잘 되어 있다. 또한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생겨나는 로맨스까지. (..로맨스와 추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것을 보면 딕슨 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크리스티의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막판의 대반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의 매력이다.

딕슨 카가 이전에 내놓았던 작품에 비해 스릴과 서스펜스는 확실히 떨어진다. 대신 거기에 치밀한 설정과 로맨스가 추가되었다. 딕슨 카가 '괴기 추리소설(?)', 즉 이해할 수 없는 범죄현상과 거기에 따르는 불가사의한 징조들, 그에 따른 사람들의 공포를 기가 막히게 표현하는 작품들을 많이 썼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어찌보면 작품 내용보다 딕슨 카 자신의 반전(?)이 더욱 놀라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역시 딕슨 카의 위대한 전작들 못지 않은 수작이고, 크리스티의 소설을 많이 보아서 이런 식의 전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친숙하게 딕슨 카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덧붙여 정말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딕슨 카의 다른 작품들을 '제발' 번역 출간해 달라는 것. 언제까지나 홈즈와 뤼팽, 포와로만 보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추리소설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추리문학 장르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선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제대로 완역되어 출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선두에 딕슨 카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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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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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은 크리스티의 소설 제목으로 유명해진 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환상의 여인' 의 줄거리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된다. 사건 시각, 자신과 함께 있었던 여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사형당하게 되는 절박한 입장에 처한 사나이. 그런데 증인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과 함께 있었던 여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사형날짜는 시시각각 임박해 오고,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와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인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나이를 위해 발벗고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물론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다. 3대 추리소설의 선정기준은 '놀라운 반전' 인 것인지, 이 작품 역시 결말에 그야말로 뒤집어질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통 추리소설의 생명이라 불릴 만한 절묘한 트릭과 탄탄한 구성은 3대 추리소설의 다른 작품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와 'Y의 비극' 에 조금 뒤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중반까지의 숨막히는 전개에 비해, 결말은 허무감마저 들 정도로 약간은 어정쩡하게 처리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구성상의 단점을 극복해 주는 것은 이 소설의 뛰어난 문학성이다. 간결하면서도 우수가 짙게 담긴 문체는 읽는 사람을 매료시킨다. 또한 글 전체에 당시 미국 사회의 특징이나 분위기가 고스란히 살아나 있다. 뛰어난 문학 작품은 당대의 사회상을 잘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환상의 여인' 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는 통속소설의의 범주를 확실히 뛰어넘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윌리엄 아이리시를 참 좋아한다. 스릴과 서스펜스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 물씬 풍겨나오는 미국 특유의 정서, 서민층 삶의 애환 등등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아이리시의 작품은 많지 않다. 추리소설을 '추리문학' 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을 앞으로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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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비극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
엘러리 퀸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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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비극' 을 한 줄로 표현하라면 저렇게 말하고 싶다. 세계 3대 추리소설이며 가장 완벽한 추리소설 중 하나라는 거창한 수식어들을 모두 제외해 버리고, 소설을 읽어 가면서 실제로 느꼈던 감탄들 역시 하나 하나 제거해 버리고 나면 마음 속에 덩그러니 남는 것은 아릿한 씁쓸함 뿐. 엘러리 퀸의 소설들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해도 전체적으로 명랑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 편인데----그것은 등장하는 탐정들인 엘러리 퀸이나 드루리 레인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겠지만----'Y의 비극' 에서는 사건의 무대인 해터 집안의 암울한 그림자가 작품 전체를 덮어 버렸다. 따라서 엘러리 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뛰어나긴 하지만, 또한 가장 우울한 작품이라고 보아도 될 듯 하다.

뉴욕 최고의 부호 중 하나인 해터 일가는 그 숱한 기행과 악명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 해터 집안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 집안을 지배하는 것은 폭군이나 다름 없는 여왕 해터 부인. 남편인 요크 해터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비극의 전주곡이 울린다. 그리고 얼마 뒤 폭군 해터 부인이 불가사의하게 살해되고 비극이 본격적으로 상연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전직 연극배우인 귀머거리 탐정 드루리 레인. 그렇지만 아무리 암울한 사태에 처해 있다 해도 쾌활함을 잃지 않았던 이 매력적인 노인을 슬픔의 늪에 빠뜨린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해터 집안에 저주처럼 깃들어 있는 어떤 사실 때문이었다. 어쨌든 결말은 추리소설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기상천외하게 지어지지만,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 버린다. 가장 완벽한 범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교묘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그러나 사실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범인 자신이었을지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소설이다. 드루리 레인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왜 해터 집안은 그렇게 끝없는 비극을 겪게 된 것일까. 마치 괴물처럼 묘사되어 있는 그 집안 식구들은 일그러져 있던 미국 사회를 비추고 있는 또 다른 거울이 아닐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을까----트릭의 정교함과 탄탄하고 완벽한 구성과 같은 추리소설적인 요소와는 상관 없는, 인간성과 유전에 대한 씁쓸한 질문들이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작품이다.

'Y의 비극' 외에도, 엘러리 퀸은 어떤 특정 집안에 얽힌 가족사적인 미스테리를 자주 썼는데 '재앙의 거리' 와 '폭스 가의 살인' 이 그 대표작품 중 하나이다. 특히 '재앙의 거리' 또한 'Y의 비극' 못지 않은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극적인 효과와 반전의 재미는 훨씬 덜하다는 느낌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잘 알려진 대로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인데, 개인적으로 세 작품들 중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생각한다. 가장 짜임새 있는 추리소설이라고 불리워도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 완벽한 작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모양인지, 작가의 엄청난 실수가 하나 있다. 그 옥의 티는 읽으면서 찾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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