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의 유언장
봅 가르시아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셜록 홈즈' 라는 이름의 마성은 어리디 어렸던 초등학교 그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한 지금의 나에게까지 여전히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알라딘에서 특별 사은 행사로 선심 쓰듯 끼워주었던 2000원짜리 쿠폰의 위력 때문일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원래 사려고 했던 다른 책에 이 책을 끼워서 주문했고, 낯익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표지에 가린 내용물이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홈즈, 도일이 탄생시킨 친숙하면서도 경외적인 홈즈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손상될까봐 두려웠었나보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는, 피곤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잠은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어질러진 책상 한 구석에 외롭게 버려져 있던 '셜록 홈즈의 유언장' 이 유달리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왜 읽어 주지 않냐고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작게 한숨을 쉬며 아이스티 한 잔을 타온 다음 책을 펼쳤다. 마치 셜록 홈즈 유언장의 공증인이 왓슨, 레스트레이드, 마이크로프트, 홀본,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인 것처럼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사건의 전개와 결말에 대한 글을 자세히 쓰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그 쪽은 생략하고 책을 덮고 난 뒤의 감상만 말하겠다. 우선 몹시 잔인하다. 살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짐짓 품위를 지켜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묘사는 피했던 도일의 책과는 많이 달라서, 살인 장면의 묘사 부분은 흡사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이 떠오를 정도다. 이것만으로도 홈즈 시리즈 답지 않은데, 작가가 애써 원전과 비슷하게 되살리려고 노력한 인물들의 묘사 또한 원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의 성격이 걸린다. 그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경솔하고 성급한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나를 무엇보다 분개하게 만든 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끌려 다녀야만 했던 무능한 홈즈의 모습이었다. ('꼬리 아홉 고양이' 에서 상당히 무기력했던 엘러리 퀸의 모습을 본 것보다 최소 열 배는 더 분개했다!) 글쎄, 혹자에 따라서는 이런 홈즈를 보고 나름대로 '인간적인 홈즈' 라고 평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최대한 원전에 가까운,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가진 추리 기계와 같은 홈즈의 모습을 기대했던 나에겐 실망스러움 그 자체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지금 왓슨이 묘사하고 있는 홈즈는 진짜 홈즈가 아니라 어쩌면 왓슨 본인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홈즈의 이름을 팔았던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하긴 진짜 홈즈가 아닌 건 맞다. 도일이 아닌 다른 작가가 재창조한 홈즈랑 왓슨, 레스트레이드이니, 사실 내가 분개해야 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냈던 건, 내가 그만큼 홈즈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를 내 마음 속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한 발짝 물러나 홈즈 팬이 아니라 일반 추리소설 팬의 시각에서 보면, 그래도 읽을 만한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크리스티 여사는 올리버 부인의 이름을 빌려 '독자들의 흥미가 떨어지려 할 때마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추리소설 작가의 고충을 토로했던 적이 있다. 허나 이 책의 저자인 봅 가르시아는 그런 고민 따위는 없었던 듯 소설 속에서 신나게 사람을 죽여 나갔다. 덕분에 잔인한 묘사에 질리지만 않는다면, 앉은 자리에서 책을 펴고 난 후 별다른 쉬임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갈 수 있다. 또 저자는 끔찍한 살인 장면에 물린 사람들을 위해 중간에 쉬어 가는 페이지 --- 레스트레이드와 왓슨의 엉뚱한 말다툼 --- 를 마련해 놓았다. 피비린내에 정신이 멍해질 무렵 왓슨과 레스트레이드의 우스운 말싸움과 그들을 지켜보며 한심해하는 마이크로프트를 보면서 적절하게 머리를 식힐 수 있다. 저자의 배려가 친절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원전보다 좀 더 구성은 잘 되어 있어서, 책 속의 사망률이 지나치게 높으며 범인의 범행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걸 제외하면 --- 나는 모리아티 교수가 살아 돌아온 거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 --- 크리스티의 장편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했던 부분은 이런 게 아니다. 패스티쉬라고 불러 주기엔 원전과 너무도 느낌이 다른 책이지만, 단 몇 페이지, 도일이 썼던 바로 그 홈즈 시리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장면이 있다. 어느 곳인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 또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나처럼 스스로 '셜로키언' 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홈즈 골수팬에게는 썩 마음에 드는 소설은 아닐 듯 싶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스릴러물이나, 색다른 구성의 추리소설을 읽어 보고 싶은 사람이나, 홈즈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지나치게 진지하게 몰두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럭저럭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21세기 이 시점에, 아직도 '홈즈' 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책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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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10-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단적으로 악평을 하자면 셜록 홈즈의 이름으로 소설의 지루함을 돌파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조금 바뀌긴 했습니다만, 과연 셜로키언이 쓴 책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Reds 2006-10-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진짜 셜로키언이라면 홈즈를 저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