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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아홉 고양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3
엘러리 퀸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이번에 동서 미스테리 북스에서 시리즈로 발간되어 나오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는 엘러리 퀸의 것들이 상당히 많다. 이미 이전에 시공사의 '시그마 북스' 에서 나온 20권짜리 책과 여기저기서 구했던 책들로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엘러리 퀸의 웬만한 작품들은 모두 섭렵했었던 나였기에, 여태 보지 못했었던 작품인 '꼬리 아홉 고양이' 에 상당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읽기 전,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여러 서평에 따르면(?) 이 소설은 엘러리 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라이츠빌 시리즈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작품성 면에서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한 편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도 그랬다. 엘러리의 오랜 팬으로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엘러리의 무기력함이 그 어떤 소설보다 뚜렷이 부각되어 있었던 점이 아쉬웠다 --- 그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할 말 없지만 ----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옥의 티라고 느꼈던 점은, 책장을 넘길 때 마다 그렇게 시체가 쌓여 가는 데도 공포감이나 전율 대신 그저 '이쯤 되면 또 죽겠군' 이라는 예상이 저절로 되어 버렸다는 것. 스포일러가 될 테니 결말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최강의 반전을 자랑하는 추리소설들로 단련된 눈에는 이미 결말이 뻔히 보여 버렸다. 'Y의 비극' 과 '재앙의 거리' 에 깔려 있던 암울함 끝의 극단적 반전도,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과 '차이나 오렌지의 비밀' 에서 보여줬던 치밀한 논리적 두뇌싸움 끝의 반전도 없었다. 이젠 상투적이고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반전만이 책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남아, 떨어져 버린 흥미를 붙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여태 혹평들만 열거한 것 같은가? 그리고 앞으로도 비난조의 글이 계속될 것 같은가? 아니, 그와는 반대다. 난 이 책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싶다. 엘러리 퀸이 건드린 공포심리는 살인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닌, 무차별 살인사건으로 인해 군중들이 느끼는 공포, 익명의 타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도시인들만이 느끼는 공포,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을 만한 대중적이면서도 근원적인 두려움, 바로 '모름' 이었다. 살해는 벌어지고 있으나 살인범이 밝혀지지 않는다.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시체는 계속 늘어만 간다. 범인은 내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미치광이 범인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내 가족일지도 모른다... '남' 을 모른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가 불러오는 공포는 이토록 엄청나다. 그리고 안개처럼 마음을 스멀스멀 좀먹어 가는 공포는 수백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을 때 그 진가를 발한다. 누군가가 실수로 한 마디만 하면 바로 펑 터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극도의 긴장감, 엘러리 퀸은 '고양이' 라는 살인범을 통해 뉴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낱낱이 파헤쳐 주었다. '군중 심리와 공포' 에 대해 알려면, 어려운 사회심리학 개론서를 읽는 것 보다 차라리 이 책 한권을 붙들고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해 주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 오버랩되었던 이유는 무엇일지..)
예전에 추리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건 비단 범죄 뿐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쩌면 그 범죄가 발생하는 환경이라든지, 범죄가 발생하고 난 뒤의 상황 같은 것이 범죄 자체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꼬리 아홉 고양이' 는 그러한 사실을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책 전체에서 은근하게 배어 나오게 하고 있다. 미국이란 사회에 통달한 베테랑 작가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다. 전성기 때의 명쾌한 맛은 없어도,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난 엘러리 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