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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울리히 벡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삶을 영위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회의 관습과 색깔에 젖어들어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여기' 가 어디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 보자.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가지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대다수는 부정적인 답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 공통점은 존재한다. 사회가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아직 커서, 대개의 사람들은 사회라는 우물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개구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산다. 사람들이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하면 거기에 대해 회의하는 대신 그냥 수긍하는 태도를 취한다. 생각이 조금식 커져 가면서, 우물에서 뛰어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좁아 터진 고정 관념의 우물에서 탈출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한 가지는 책을 읽는 것이다. 흔히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책이 존재한다고들 한다. 울리히 벡의 저서들이 그러한 것들 중 하나다. 그는 기성 정치인들을 포함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회의 보수 세력들에게 질타를 가한다. 그리고 흔히들 '가치관의 붕괴' 라며 안타까워하는 여러 현상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하면서 거기에서 어떠한 가치관들이 새롭게 탄생하는지, '적이 사라져 버린' 사회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새로운 적을 만들어 내는지를 밝혀 낸다.
모든 챕터들이 가치롭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챕터는 역시 가장 첫장인 '자유의 아이들' 이었다. 벡은 여기서 자유의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정치를 '정치적으로' 거부하는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정치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과연 어떤 것을 문제로 삼을'것인가에 관한 관점의 차이이다. 기존 정치 세력들은 여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자유의 아이들' 이 정치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국회에서 따분한 토론이나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다루는 의제들을 완전히 뛰어 넘는 다른 주제들이다.
요즘 아이들이 흥미가 없는 일에 관심을 둘 리 없다. 결국 '자유의 아이들' 은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고리타분한 정치를 거부한 채, 자신들 스스로가 각종 조직을 만들어 아래에서부터의 정치를 시작한다. 기존 정치세력들은 '요즘 아이들은 영 정치에 관심이 없어' 라고 푸념하지만, 팽배한 무관심을 낳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현실을 간결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말들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파트를 복사하여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에게 돌리고 싶을 정도다. 국민의 혈세로 지급되는 세비를 깎아먹고 있는 그들이여, 반성할 지어다!)
이 밖에도 우리가 단순히 '사회 문제' 라고 뭉뚱그려 버리는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을, 통념을 깬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울리히 벡의 놀라운 통찰력은 책의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다룬 상황들 중에서는 비단 외국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나라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도 해당되는 것들이 많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 이야기' 라고 한가롭게 생각하면서 읽기엔 가슴 한 구석이 몹시도 찔린다.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를 읽고 난 후, 우물 속에 갇혀 우왕좌왕하던 작은 개구리 한 마리는 우물 언저리로 뛰어올라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바깥을 흘끔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 있음을. 생각과 가치 체계를 굳건히 지배하는 고정 관념을 깨 버리고 난 후 둘러보는 세계의 모습은 또 다르다는 것을. 새로운 것을 알았을 때의 지적인 기쁨과 환희가 그 무엇보다도 클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