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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테일러스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7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추리 소설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얼마나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투영하고 있는가?' 이다. 수많은 통속소설들이 그 작품이 씌어진 시대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만큼 시대의 모습을 잘 그려 낸 장르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테리물에서는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 창출해 낸 악의 그림자, 즉 범죄를 주된 소재로 다루고, 대개의 경우 작중 인물의 범죄는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과 밀접하게 연관지어져 나타나기 때문에 작품은 그 사회를 마치 거울처럼 비추게 된다.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GK 체스터튼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당시의 런던, 나아가서는 당시 영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범죄에만 초점이 맞추어 진 것이 아니라, 그 때 사람들의 생활상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나타나 소설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독자의 기억 속에 남겨 놓는다. 정말 오래도록 명작의 반열에 꼽히는 추리소설의 모습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의견이고, 우리 나라에선 정말로 접하기 힘들었던 <나인 테일러스> 에 주저 없이 별 다섯 개를 헌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 소설에서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구성 - 범죄의 발생, 탐정의 등장, 탐정이 단서를 따라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 이 명확히 드러나있지 않다. 탐정 피터 웜지는 펜 지역(영국 남동부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의 저지대) 주민들의 생활 속에 뛰어 들어가 그들과 부대끼며 사건을 해결해 가려고 노력하지만 일은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건만으로도 복잡한데 여기에 배수로 공사와 같은 자잘한 일들까지 겹쳐 소설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 마을에 닥쳐오는 대 홍수와 함께, 사건은 전혀 의외의 결말을 맞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이어즈의 명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중함을 느끼게 하는 필치는 펜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잘 그린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보여 준다.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울려퍼지는 무거운 종소리 속에서 주민들은 죽음을 생활 속의 일부로 조용히 받아 들인다.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정체 불명의 시체를 보고서도 주민들은 처음엔 조금 놀라다가도 나중에는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심지어 시체를 가지고 농담을 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죽음과 시체는 별 세계의 일이 아닌, 삶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나타나는 모습들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비교 - 만약 크리스티의 탐정 미스 마플이 사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이었다면 과연 이런 반응이 나타났을까? 아마 마플의 마을은 뒤집혀도 단단히 뒤집혔을 것이다. 주민들은 모두 시체 얘기만 하지 않았을까나. 세이어즈와 크리스티의 작풍의 차이인지, 작가가 설정한 주민들의 계층의 차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이어즈의 <나인 테일러스> 에 감동을 받은 것도 바로 그 점이다. 사실보다 더 커 보이는 리얼함. 아마 실제로 어딘가에서 시체가 발견된다면 주민들은 저런 태도를 취할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시체와 범죄가 주역이 아닌, 오래 된 교회가 있는 유서 깊은 작은 마을 전체가 주인공인 추리소설.. 어쩌면 추리적인 면에 만점을 주기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다음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장엄한 감동은 이 책에 주저없이 만점을 주고도 남았다. 그리고 도로시 세이어즈라는 또 다른 거장의 작품을 계속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하게 되었다.
여기서 사족 하나. 책 서두에 제시되는 전좌명종술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전좌명종술은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범인을 일찌감치 알고 싶다면, 전좌명종술이 나오는 파트를 주의 깊게 읽어 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