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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살인사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
S.S. 반 다인 지음, 김성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추리적 능력은 몰라도, 박학다식함과 거만함을 따지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이래 나타난 모든 탐정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파일로 밴스 씨..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당신을 좋아할 수 없소. 난 똑똑하면서도 인간다운 탐정에게 호감을 지니는 편인데 당신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기보다는 아시모프의 작품에 등장하는 완전무결한 로봇 같소이다. 하지만 내가 '도무지 정이 안 가는군!' 이라고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당신이 나온 책은 꼬박꼬박 다 사서 읽는 점을 보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가 버린 정은 아무래도 미운 정 같구려.
<비숍 살인사건>에 나온 당신의 모습은 이전 소설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참신했소. 마치 처음엔 무미건조한 기계였다가 나중에 조금씩 인간의 감정을 알아가는 아시모프의 사랑스런 로봇 다닐 올리버처럼(아, 당신은 아시모프 선생을 모르겠구려, 죄송하오) 이 작품에서 밴스 그대는 드디어 뭔가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소. 솔직히 정말 놀랐소. 당신은 화도 낼 줄 알고 급한 상황에서는 행동을 할 줄도 아는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에 말이오. 여전히 독단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드는 모습은 못 미덥습디다, 그래도 고백하자면, 여기서의 당신의 활약은 다른 사건에서의 활약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들었수다.
그대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간에 당신이 등장하는 소설은 무조건 사서 읽고 본다는 말은 앞서 했었소. 이유는 간단하오. 밴스 당신의 충실한 친구 반 다인씨가 쓰는 당신의 전기는 추리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수수께끼 풀이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오. 너무나도 우매한 인간인 나는 그저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눈을 맡기고 '어어어어..'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을 수 밖에 없지만, '탐정 양반은 저렇게나 똑똑한데 나는 대체 뭘까?' 하는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연역적 논리가 지배하고 사건과 탐정, 이 둘만이 주인공인 당신의 소설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는 생각이 드오.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엉뚱한 이야기들을 제외하면 말이오. 심지어는 당신이 먼 훗날에 등장할 움베르토 에코라는 작가의 시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했었소.
난 이 책의 수수께끼 자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소. 마더 구즈를 인용한 발상은 좋았다고 보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참신한 건 아니잖소. 미스테리한 사건을 풀어 나가는 재미는 <카나리아 살인사건> 이나 <그린 살인사건>, <벤슨 살인사건> 이 낫다고 생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책 중반 이후를 넘어가니 드디어 범인이 빤히 보이더이다. 그대의 작풍에 익숙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패턴을 읽어 버렸나 보오. 사실 시체가 많이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오. 시체가 늘어 갈 때마다 느껴지는 스릴감이나 공포감은 점점 감소하는데다가, 등장 인물 하나 하나가 제거되면 범인은 결국 뻔해지지 않소이까. 그래서 전체적인 내용을 그다지 높게 평가할 마음은 나지 않는구려.
그래도 내가 비숍 살인사건에 후한 점수를 쳐준 건, 비록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다 해도 사실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오. 당신의 색다른 모습을 본 것도 재미고, 그대가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별로 자랑하지 않은 모습도 재미였으며, 상당한 의외성을 가지는 이중의 반전 또한 재미있었소. 과장된 묘사는 여전히 거슬렸지만(도대체 어찌 된 동네길래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공포스럽고 잔혹하며 전율스럽'단 말이오!)익숙해지다 보니 이젠 그러려니 하오. 아니, 그런 어구가 나오지 않으면 심심해지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소.
결국 애거서 여사의 명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처럼, 당신네 탐정들의 영원한 모델인 셜록 홈즈가 나오는 소설처럼, 나도 그대와 반 다인에게 길들여져 버린 듯 하오. 당신을 좋아하는 탐정 리스트에 올려주긴 싫소. 때로는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한다오. 그러나 당신이 갑자기 겸손해져서 브라운 신부님처럼 변해 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이상하오. 투덜대면서도, 불평하면서도 계속 찾아 읽는 건 역시 미운 정이 들어 버렸기 때문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듯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