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손가락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마치 시골 마을은 '악의 고향(?)' 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통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게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에서 그토록 사악한 일이 벌어진다니, 말이 되는가? 그렇지만 시골이든 도시이든,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처럼 '타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하고 예의바름의 가면 속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는 경향이 강한 곳에서는 더욱 그럴 수도 있다. 크리스티는 그런 점을 날카롭게 꼬집어 냈다. (나인 테일러스에 대한 서평을 쓸 때도 언급했지만, 잉글랜드의 시골 지역을 보는 세이어즈와 크리스티의 눈은 확실히 다르다)

<움직이는 손가락>에서 처음에 등장하는 범죄는 이런 시골 마을에서야말로 떠돌기에 적합한 명예 훼손성 익명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마을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배달되고, 이 동네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주인공은 몹시 기분나빠한다. 경찰에게 신고해도 경찰은 시골 사람 답게(!) '뭐, 그럴 수도 있지' 라는 태도를 취하며 미적미적.. 그러다가 결국, 그 중 한 명이 편지의 희생자가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걸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사건에 얽혀 계속되는 살인, 크리스티의 주특기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긴장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로맨스.. 전반적으로 크리스티 작품의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설이다.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한다. 안정적이면서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말은 되지만, 뒤통수를 때리는 강렬한 느낌은 없다는 말 또한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졸작도 수작도 아닌, 평범하고 읽을 만한 책' 이었다. 전개 과정이나 결말 역시 그렇다. 크리스티의 일반적인 스타일에서 거의 변형되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이 책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모두 접한 독자 중 하나인 나는 '무난하네' 이상의 어떤 감정을 이 책에 갖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까만 건 글자요 흰 것은 종이인지라~' 라고 흐늘흐늘하게 넘겨 버리는 것은 너무 허무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애써 찾아낸 의미는 '역시 인간은 사악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이었다.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범인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높은 평판을 받으며, 여성들에게 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들이다. 즉 대개의 사람들이 통념 속에서 '저 사람일 리는 없어' 라고 여기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도, 미스 마플이 살고 있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도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크리스티 여사의 날카로운 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화요일 클럽의 살인' 에서 미스 마플이 언급했던 멋진 표현처럼, '고여 있는 물 웅덩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수없이 많은 미생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골 마을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 누구도 자신만큼은 범죄에 대한 성역으로 물러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크리스티의 책을 한권 한권 읽어 나갈 때마다, 자꾸 머리속에 이런 질문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과연 너는 어떠하니? 넌 저런 범인들과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리고 아직, 그에 대한 대답은 찾지 못했다.

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