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靑衣)
비페이위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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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뭘 빼먹었지?"
잠시 말이 없던 샤오옌추가 대답했다.
"짚신과 총을 빼먹고 연기하셨잖아요!"
일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멍해졌다. 사람들은 곧 그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옌추......! 이 아이 정말 너무하는군!
샤오옌추는 열기로 한창 상기됐던 리쉬에편의 얼굴이 조금씩 싸늘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쉬에펀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너는? 네가 연기하는 항아는 뭐 대단한 줄 아니? 재수없는 년! 여우 같은 년! 발랑 까진 백치 같은 년이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너 같은 건 달나라에 묶여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야!"
발끝을 세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리쉬에펀의 흥분은 갈수록 더해갔다. 이제 차갑게 식어가는 쪽은 샤오옌추였다. 샤오옌추의 콧속에서는 북풍이 불었고 눈동자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스태프 한 명이 리쉬에펀의 손이라도 녹이라고 뜨거운 물을 들고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태프의 손에서 컵을 낚아챈 샤오옌추는 리쉬에펀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확 끼얹었다.
일순 무대 뒤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28쪽

그는 들고 있던 약봉지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뭔가 정말 큰일이 벌어졌구나!
아내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불길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샤오옌추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멘과! 나 다시 무대에 서게 됐어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기쁨과 반신반의가 섞인 눈빛으로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샤오옌추가 다시 말했다.
"나 정말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됐어요!"-41쪽

샤오옌추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창피한 꼴을 당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춘라이에게 한 대목 시범을 보여주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지며 쇳소리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유리를 긁었을 때 나는 소리 같았고, 발정난 수퇘지가 암퇘지의 등 위에 올라타서 내지르는 소리 같았다. 사실 노래를 부르는 연기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름 아닌 샤오옌추였다.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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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靑衣)
비페이위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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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에 딱 한 번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 그것도 시와 연극을 합친 시극의 배우로서였다.
내게 할당된 대본을 외우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어려웠던 건 감정의 몰입이었다. 나는 기형도 시 '질투는 나의 힘'의 마지막 구절을 암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지금도 이 구절이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건 정말 이 구절에 내 모든 감정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 당일, 무대에서 나는 정말 절망과 희망을 오르내리는 '시소 인간'이었고 그 속에서 생에 미움이 아니라 질투를 느끼는 시적 화자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기형도의 목소리였다.

도입이 좀 길었는데, 중국작가 비페이위의 소설 <청의>에서 나는 '배우들', 두 존재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가면의 고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동시에 언제나 힘들 때면 '나도 왕년에는' 하고 과거지香에 매혹돼버리는 나의 삶이기도 했으니까.

표제작 <청의>는 경극 여배우 샤오옌추의 신산한 삶을 그린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스무 살의 그녀는 오만하게도 자신을 자신이 연기하는 경극 <분월>의 주인공 '항아'라고 믿고 있다. 자신만이 유일한 항아일 수 있다고. 게다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대역배우에 대한 질투도 거침없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우려 속에서 자기 생의 절정을 경험한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진정한 항아가 된 것이다.

아! 그러나 그녀는 조금 지나쳤다. 후배의 앞날을 위해 대역배우를 자청한 선배를 질투하다 못해 사소한 말다툼을 못 견디고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선배의 얼굴에 확 끼얹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연실색해한 그 상황에서 그녀 역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무렵, 경극의 인기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밀려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분월>은 막을 내렸고, 샤오옌추는 연극학교 교사로 발령받는다.

이십 년 뒤, <분월>을 다시 무대에 올리려는 계획을 가진 연출자는 우연히 그 공연에 자금을 대주겠다고 나선 담배회사 사장을 만난다. 단, 조건이 있다. 이십 년 전 <분월>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샤오옌추, 그녀를 다시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십 년... 이십 년... 그 세월은 엄청난 것이다.

연출자는 고민한다. 과연 샤오옌추가 예전의 목소리,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인가. 만일 그녀가 변했다면 공연 기획은 다시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에게 갑자기 노래 한 곡을 청한다. 샤오옌추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이십 년 전의 샤오옌추, 항아의 모습이 연출자의 눈앞에 재현된다. 아! 그녀는 매일같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물음에 샤오옌추의 대답은 놀랍도록 명쾌하다.

"저는 그저 유일한 항아일 뿐인걸요."

그래... 그녀는 항아였다. 불사약을 훔쳐 달나라로 도망간 전설 속의 여인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항아였다.
다시 무대에 서게 된 그녀는 기쁨에 넘쳐 남편과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그러나 자신의 전성기, 절정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그 짜릿함, 미칠 것 같은 그 긴장감은 그녀를 서서히 옥죈다. 그 정체 모를 불안, 육체가 불러일으키는 불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흔 살인 것이다. 마흔 살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체력, 몸매, 목소리 모든 것이 이십 년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분월>의 항아는 이십 년 전 샤오옌추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샤오옌추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밤낮으로 노래 연습을 강행한다. 다시 진정한 항아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 그러나...

결말에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탄식은 정말 우주의 시간마저, 호흡마저 멈추게 한다. 몇 번을 읽어도 대단히 감동적인 소설이다.
내 생의 절정기를 되돌아본다. 나는 그때 과연 무엇이었기에 그토록 뜨거웠고 무모할 수 있었던가. 하나 더 떠오른 것은 대중의 기억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배우들, 특히나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여배우들이 읽는다면 큰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한 편의 소설만으로도 비페이위, 그는 올해 내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아, 문득 탄식이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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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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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은 다자이 오사무가 백 편의 습작 소설을 불태우고 나서 쓴  역작이다. 내가 <만년>을 읽은 것은 왕성한 식욕과 수면욕, 그 외 갖가지 욕망들에 괴로워하던 때였다.

그는 자살했고, 늘 죽음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소설을 썼지만, 그 속을 가만 들여다보면 '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 '만년'이라는 두 글자 위에 올라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꽃이 피고 지고 하는 봄날에 <만년>을 읽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나는 과연 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그는 노인이었다, 로 시작하는 단편 <역행>의 충격.

퇴근 길에 가끔 <만년>을 읽는다. 그리고 내 생의 오후가 멀리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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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스.붉은백합
아나똘 프랑스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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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불륜의 로맨스가 아니었다. 붉은 백합, 그 아름다운 절망의 연가. 나는 결국 위로받았다 할 수 있을까. 

  "이제는 무엇인가를 상실할 때의 강력한 쾌락만을 찾고 싶었다......"

  아나톨 프랑스의 <붉은 백합>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을 다시 읽었다. 오래전, 이 소설을 내게 소개해준 그 형은 지금쯤 지구 어딘가에서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백년 묵은 여우의 사랑 이야기'는 끝을 보았을까. 아니면, 테레즈의 붉은 백합처럼, 그냥 무심하게 잃어버리고 잊혀졌을까. 
  창밖에 천둥 번개가 친다. 지구 안쪽으로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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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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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가뜬한 잠>. 군대에 있을 때, 그의 첫 시집 <거미>를 읽으며 코피 자주 쏟는 시인의 어깨를 떠올려본 적이 있다. 정신의 그믐으로 허기졌던 그때의 내게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참 고마운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이제 코피를 쏟기보다는 뒤안에서 잡풀 뽑으면서 산비탈을 오르면서 탁배기 한 잔에 구수한 웃음 흘리면서 소박한 '서정의 빛깔 또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표지에 두른 연두색이 잘 어울린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시 중 하나인 <능구렝이>. 그렇다. 연애할 때 우리는 모두 능구렝이가 된다.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 토속어의 무한한 보물창고로 향한 듯, 표현 하나하나가 팔딱팔딱 튀어오르는 것 같다. 참 좋은, 건강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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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구렝이

                      詩 박성우

풋앵두 송송 열린
우물집 뒤안에서 잡풀을 뽑는다

앵두나무 아래서 능구렝이를 보았다는 안주인은
독은 없을 거라 말하고는
예닐곱 골이나 되는 토란 밭을 꿰찬다

능구렝이 생각은
물컹물컹 울렁울렁 밟혀오고
여우비는 아까 그쳐 풀 뽑기를 마침맞다

앵두나무 아래서
머뭇머뭇 풀줄기를 당긴다
능청능청 당겨 올라오는
능구렝이 생각은 엉클어져
능구렝이는 이내 손등을 물어오고
능구렝이는 이내 발등을 물어온다

능글능글 기어 나오는 능구렝이
싱그레 벙그레 막대기로 걷어
풀숲에 놓아줄 사람처럼
잔가지 무성한 앵두나무 아래서
우거진 잡풀을 뽑고 앵두 헛가질 쳐낸다

나를 안 보는 척 쳐다보는 안주인도
비암이라면 아주 기겁을 하는 나도
능글능글 능글맞은 능구렝이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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