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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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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시집 58
강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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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네가 온 줄 몰랐을 것이다. 네가 늘 내 옆을 서성이고 있었단 걸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목숨을 부지해오면서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을 딱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다. 기억의 카타콤에서 불러올린 조각들과 현재의 부스러기들을 접붙여 썼던 소설을 평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말은 아마 맞을 것이다. 나는 그 전까지 자의식이라는 게 무척이나 병적이고 날카롭고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그런 자기 비판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런 식의 노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삶과 죽음, 절대적인 자유와 상대적인 억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자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군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무렵이었다.

그때 강연호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그 시집에는 온갖 통증으로 범벅진 한 사내의 생애가 신음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달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건 죽음의 그림자를 흘깃 눈치 챈 자의 자세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의 시에 곡을 붙여 흥얼거리기도 했는데, 그는 내 노래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시집에는 병약한 심약한 사내가 행간을 활보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출몰한다. 근 십 년 동안 아무도 발길하지 않은, 마지막으로 불을 밝혔던 게 근조등인 폐가에서, 바닷가에서, 교수실에서, 서재에서, 출근 길에서, 퇴근 길에서 그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가 낯익은 것은 나 역시 한 번쯤 되뇌어본 탄식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아프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온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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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 시인선 23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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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시인을 만났다. 그는 내 이름으로, 나에 대해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취해 있었다.

스물한 살, 나는 밤안개 자욱한 길을 걸으며 한 통의 동백 연서를 띄워 보냈다. 수신인은 없었다. 종내 수신인은 없었다. 이 길 끄트머리에 이르면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던 무렵이었다.

스물두 살, 하행선 새벽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수의 눈동자라 불리는 오동도에서 나는 일 년 전에 썼던 동백 연서에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발신인은 붉은 눈, 동백이었다. 깨끗이 세탁한 푸른 군복처럼 빛나는 남해, 그 새벽빛에 젖은 바다의 가슴을 쓰다듬고 싶었다.

스물세 살, 나는 충성에 살았다. 무궁화가 되고 싶진 않았다. 복창 소리 내기 두려운 밤에라도 어디로든 숨고 싶었던 나는 밤에 피는 장미도 아니었다.

스물네 살, 오랫동안 충성에 산 나는 비로소 동백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월이었다. 동백은 지고 없었다. 마당에 목부러진 동백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시인은 그 빗질을 경을 읊는 것이라 했다.

스물다섯 살,  이제 내가 동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목부러진 동백 시체일 뿐이었다.

스물여섯 살, 서울에서 동백꽃을 볼 수 없었다. 내 두 발은 언제나 같은 곳만을 오갔고, 동백은 아주 멀리에 있는 것 같았다. 동백을 그리워했다.

스물일곱 살, 그 닥스훈트의 이름은 동백이었다. 모습은 검은 동백이었지만 붉은 눈을 가진 영롱한 개꽃이었다. 검은 동백에게선 늘 흙냄새가 났다.

스물여덟 살,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언제고 단 한 번도 동백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동백'이라는 이름의 꽃을 발음해보면 아득해진다. 아버지 사후, 홍성에 사는 의사에게 칠십 만원에 팔려간 우리 집 화단의 동백 나무, 그 나무 그늘 밑에 늘 수북했던 지푸라기들, 말라붙은 개똥, 몇 번 쏘인 적 있는 부지런한 벌들이 이제 내 머릿속 동백이다.

사람이 동백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날은 갔다. '사자야, 그만 나무에서 내려오려무나. 이제 동백으로 돌아가자. 모두 다 산경(山經)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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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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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가뜬한 잠>. 군대에 있을 때, 그의 첫 시집 <거미>를 읽으며 코피 자주 쏟는 시인의 어깨를 떠올려본 적이 있다. 정신의 그믐으로 허기졌던 그때의 내게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참 고마운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이제 코피를 쏟기보다는 뒤안에서 잡풀 뽑으면서 산비탈을 오르면서 탁배기 한 잔에 구수한 웃음 흘리면서 소박한 '서정의 빛깔 또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표지에 두른 연두색이 잘 어울린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시 중 하나인 <능구렝이>. 그렇다. 연애할 때 우리는 모두 능구렝이가 된다.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 토속어의 무한한 보물창고로 향한 듯, 표현 하나하나가 팔딱팔딱 튀어오르는 것 같다. 참 좋은, 건강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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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구렝이

                      詩 박성우

풋앵두 송송 열린
우물집 뒤안에서 잡풀을 뽑는다

앵두나무 아래서 능구렝이를 보았다는 안주인은
독은 없을 거라 말하고는
예닐곱 골이나 되는 토란 밭을 꿰찬다

능구렝이 생각은
물컹물컹 울렁울렁 밟혀오고
여우비는 아까 그쳐 풀 뽑기를 마침맞다

앵두나무 아래서
머뭇머뭇 풀줄기를 당긴다
능청능청 당겨 올라오는
능구렝이 생각은 엉클어져
능구렝이는 이내 손등을 물어오고
능구렝이는 이내 발등을 물어온다

능글능글 기어 나오는 능구렝이
싱그레 벙그레 막대기로 걷어
풀숲에 놓아줄 사람처럼
잔가지 무성한 앵두나무 아래서
우거진 잡풀을 뽑고 앵두 헛가질 쳐낸다

나를 안 보는 척 쳐다보는 안주인도
비암이라면 아주 기겁을 하는 나도
능글능글 능글맞은 능구렝이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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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문학과지성 시인선 264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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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어쨌든 이뻤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면 내 생애를 두고 ‘변태’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지언정 꼭 한번 집착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사는 곳으로 찾아갔던 때는 공교롭게도 새벽이었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에 간다면 발치에서나 겨우 그녀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막 잠이 깨어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녀는 나를 맞았다. 그녀 주위의 공기, 이제 막 멀리서 동쪽 하늘을 부끄럽게 만들며 구름에 가려진 아침 해, 심지어 내 소심함을 가려줄 줄 알았던 새벽안개마저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황금보다도 더 빛났지만 또한 그렇게 몽롱할 수가. 아, 나는 정말로 내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녀의 실체는 ‘관능’이었다.


도톰한 입술과 촉촉이 젖어 더 빛나는 피부에 사로잡혀 내가 혼몽을 거듭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녀가 말해준 발음을 내가 제대로 알아먹었을지 어떨지는 그 당시의 내 정신 상태로 봐선 확신할 수 없어서 독자여러분께는 미안하다. 다만 그럭저럭 내가 알아먹은 대로 말하자면, 그녀의 이름은 ‘시’라고 했다.

수줍게 웃듯이 살짝, 입술을 오므렸다 벌린 짧은 순간에 정말로 어울릴 법한 이름이 아닌가. 이름이 특이하긴 하지만 당신에겐 정말 어울린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 여자의 몸에선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온갖 ‘말’들이었다. 처음에 그것은 도무지 내게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아직도 그녀의 곁을 어슬렁거리는 안개들, 여린 금실 같은 햇빛 줄기, 바람에게 건네는 말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그녀의 ‘몸’을 ‘듣고’ 있었더니, 내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은 정녕 사랑과 유혹의 메시지였다. 맙소사. 나는 생애 처음으로 새벽안개와 햇빛과 바람에게 질투를 느꼈다.

이전까지는 그저 아름다운 여자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이제 내게 완벽한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 여자는 떠났다. 한 그루 나무처럼, 초록색 줄기처럼 그녀가 있던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풍경의 한 구석이 되고 말았다.

한 권의 시집을 읽고 나서 그녀의 이름이 ‘수련’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에게 속삭였던 사랑의 말을 똑똑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런 말이었다.

‘이 종이 위로 올라와야 한다. 종이를 맞바라보면서 거기에 찍힌 글자들을 읽으려 하지 말고, 어서 이 흰 종이 안으로 들어오기 바란다… 글자들의 몸과 비비고, 글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수련을 사랑했던 모네/ 모네는 수련의 육체를 가졌다.’「수련의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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