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이상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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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창작 기법 중 ‘낯설게 하기’가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재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어떤 대상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 바라보는 시적 대상은 그전까지 알고 있던 ‘그것’을 말 그대로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용어지만 근래에는 문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두루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효형출판에서 출간한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을 읽었다. 원래 건축 관련 책을 잘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카피를 보고 솔깃해서 구입했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건축 낯설게 바라보기’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건축물이 사실은 나를, 우리를 길들이고 있었다는 것. 건축물은 사람이 지었으니 당연히 사람을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축물을 지은 사람의 의도가 사용자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언급되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 건물을 지은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이데올로기의 생산자들, 지배층들이고 우리가 그 이데올로기의 피지배자들이라는 사실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건축을 매개로 사회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와 사례에 대해 이 책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는 길들이는 건축의 대표적 예로 양반집과 궁궐을 꼽는다. 양반(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기에 지배자들의 거처였던 양반집과 궁궐은 여러 가지 건축적 장치를 통해 아랫사람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확실하게 신분 구분을 했음을 다양한 사례를 열거하며 설명한다. 가령 하인이 거주하는 행랑채 마당에서 양반의 공간인 사랑채를 바라보면 하인의 시선은 사랑채 누마루에 닿게 된다. 자연 지세와 인위적 수단을 통해 영역 간의 높이 차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하인이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하인은 주인의 발 정도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궁궐로 가면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더욱 극대화된다. 경복궁 중간에 아예 금천(禁川)이라는 개천을 파서 왕과 신하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금천을 건널 수 있느냐 없느냐로 신분이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또 금천을 건널 수 있는 신하와 그렇지 못한 신하를 구분하는데, 절대 권력자인 왕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우월해지는 것이다. 작은 개천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다니, 생각하면 참 얍삽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궁궐이 갖고 있는 ‘사람을 길들이는 장치’는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 왕궁의 광화문-흥례문-근정문, 이 삼문 형식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 신하들이 지나다니는 문을 따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대신 통문과 협문이라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도록 함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끔 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이 흥미로운 이유는, 건축으로 길들이기뿐 아니라 그 반대의 노력, 시도도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이념에 봉사하는 건축이 있다면, 그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길들이기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건축도 있다. 독일 나치에 협조한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축에 반대하고 나치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로 건축된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저자는 예로 들고 있다. 한 곳에 모여 공연을 관람하더라도, 그전과 같이 집단행동은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이 콘서트홀을 설명하는 데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또한 LA에 지은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도 건축의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소개하고 있다.

건축을 통해 사회의 지배구조를 읽어내는 저자의 시선이 기발하고 날카롭다. 꼭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알게 모르게 행하고 있는 익숙한 억압의 징후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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