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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靑衣)
비페이위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평점 :
생에 딱 한 번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 그것도 시와 연극을 합친 시극의 배우로서였다.
내게 할당된 대본을 외우기도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어려웠던 건 감정의 몰입이었다. 나는 기형도 시 '질투는 나의 힘'의 마지막 구절을 암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지금도 이 구절이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건 정말 이 구절에 내 모든 감정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 당일, 무대에서 나는 정말 절망과 희망을 오르내리는 '시소 인간'이었고 그 속에서 생에 미움이 아니라 질투를 느끼는 시적 화자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기형도의 목소리였다.
도입이 좀 길었는데, 중국작가 비페이위의 소설 <청의>에서 나는 '배우들', 두 존재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가면의 고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동시에 언제나 힘들 때면 '나도 왕년에는' 하고 과거지香에 매혹돼버리는 나의 삶이기도 했으니까.
표제작 <청의>는 경극 여배우 샤오옌추의 신산한 삶을 그린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스무 살의 그녀는 오만하게도 자신을 자신이 연기하는 경극 <분월>의 주인공 '항아'라고 믿고 있다. 자신만이 유일한 항아일 수 있다고. 게다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대역배우에 대한 질투도 거침없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우려 속에서 자기 생의 절정을 경험한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진정한 항아가 된 것이다.
아! 그러나 그녀는 조금 지나쳤다. 후배의 앞날을 위해 대역배우를 자청한 선배를 질투하다 못해 사소한 말다툼을 못 견디고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선배의 얼굴에 확 끼얹었던 것이다. 모두가 아연실색해한 그 상황에서 그녀 역시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무렵, 경극의 인기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밀려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분월>은 막을 내렸고, 샤오옌추는 연극학교 교사로 발령받는다.
이십 년 뒤, <분월>을 다시 무대에 올리려는 계획을 가진 연출자는 우연히 그 공연에 자금을 대주겠다고 나선 담배회사 사장을 만난다. 단, 조건이 있다. 이십 년 전 <분월>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샤오옌추, 그녀를 다시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십 년... 이십 년... 그 세월은 엄청난 것이다.
연출자는 고민한다. 과연 샤오옌추가 예전의 목소리,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인가. 만일 그녀가 변했다면 공연 기획은 다시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에게 갑자기 노래 한 곡을 청한다. 샤오옌추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이십 년 전의 샤오옌추, 항아의 모습이 연출자의 눈앞에 재현된다. 아! 그녀는 매일같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물음에 샤오옌추의 대답은 놀랍도록 명쾌하다.
"저는 그저 유일한 항아일 뿐인걸요."
그래... 그녀는 항아였다. 불사약을 훔쳐 달나라로 도망간 전설 속의 여인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항아였다.
다시 무대에 서게 된 그녀는 기쁨에 넘쳐 남편과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그러나 자신의 전성기, 절정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그 짜릿함, 미칠 것 같은 그 긴장감은 그녀를 서서히 옥죈다. 그 정체 모를 불안, 육체가 불러일으키는 불안...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흔 살인 것이다. 마흔 살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체력, 몸매, 목소리 모든 것이 이십 년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분월>의 항아는 이십 년 전 샤오옌추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샤오옌추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밤낮으로 노래 연습을 강행한다. 다시 진정한 항아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 그러나...
결말에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탄식은 정말 우주의 시간마저, 호흡마저 멈추게 한다. 몇 번을 읽어도 대단히 감동적인 소설이다.
내 생의 절정기를 되돌아본다. 나는 그때 과연 무엇이었기에 그토록 뜨거웠고 무모할 수 있었던가. 하나 더 떠오른 것은 대중의 기억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배우들, 특히나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여배우들이 읽는다면 큰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한 편의 소설만으로도 비페이위, 그는 올해 내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아, 문득 탄식이 터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