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기대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성과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들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리' 속에 있는 여타의 선택받은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에둘러 가는 길 위에 놓여 있곤 했다. 당황스럽게도 이러한 상태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방치되었다. 학문과 성과 또는 그 방법론 간의 기능연관의 파괴는 대중지성에 대한 일종의 죄악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한권의 책을 통해 파괴된 이러한 기능연관을 대중들에게 돌려 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논문작성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학사/석사/박사(우리 기준에서 말하고 있다)과정 속에 있는, 또는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자기자신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결과물인 '논문'에 대한 '도구상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지 '도구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마치, 도구에 대해 얘기하면서 능청스럽게 '정신'을 깨우쳐 주는 장인처럼 그는 논문과 방법간의 기능연관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 엄밀한 '자세'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래서, 그가 학문적 겸손(4.2.4)이란 항에서 "이것은 윤리적인 설교가 아니다. 책읽기 및 카드 정리 방법들에 관한 것이다"(p205)라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p207)라는 정말 비도덕적인(?) 경구를 말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발레 수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 항의 긴 중반부를 아우르면서 교훈적 포석이 된다.

사실, 이 책은 '매우' 교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몽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경험주의에 기우는 방식인데, 그러한 방식은 스스로의 경험에 부여하는 냉혹한 시선 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에코의 경험을 여러가지 변주로 읽어가게 하는 '즐거운 거리(distance)'를 부여한다.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경험을 '환기'시키면서, 이 책의 어느 장과 절 또는 항에 중요성을 부여할 권리를 독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처음 '1장 졸업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를 읽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써왔던 글들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하는 것을 익살스럽게 깨달을 수도 있고, 반면에 1장을 시큰둥하게 보고나서 '2장 테마의 선택'을 보면서 스스로 잊어왔던 그래서 종종 머리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쓰기에의 실패로 귀결되었던 논문의 주제선정에서 무릎을 탁 칠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물론 이것도 내 개인적인 변주다) 이 책의 가장 큰 도구적 장점은 3장과 4장에 있다고 보인다. 이 장에서 에코는 자료조사(3장)에서부터 그것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4장 작업계획 및 카드정리)라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정말 무서울 정도로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 장과 절, 항들에서 '자료'들은 그 자체로 유기적인 연관을 형성하면서 테마 속에서 구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선택과 그것의 배치에 관한 사항은 논문을 써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치의 필요성만을 느꼈을 뿐 구성의 방법에 대해서는 넋놓고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아마츄어적인 순진함으로 어떤 '직관'을 바라면서 독서를 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마치 번갯불처럼 스쳐가기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는 이 장을 통해 그런 것들이 전혀 부질 없지는 않더라도, '천재'들에게만 허용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천재'에 대한 언급은 꽤나 시니컬한 문맥 속에서 튀어 나오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천재'가 아닌 것은 확실하고, 학문적 작업에 있어서 그러한 '천재의식'은 오히려, 논문을 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쓴 사람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학문적 겸손'이다.

그러나, 학문적 겸손은 "많은 자부심을 감추고 있"(p208)다. 그 자부심은 바로 '원고쓰기'(5장)와 '최종적 원고작성'(6장)에 필요한 덕목이다. '누구에게 말하는가'(5.1), '어떻게 말할 것인가'(5.2)는 바로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스스로 소심해져서 구구한 변명을 늘여 놓거나 논문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심난하게 스스로를 옹호하거나 하는 건 "짜증나는 것"(p261)이다. 인용문(5.3), 그리고 각주(5.4)의 작성은 그러한 변명이 쓸모없다는 것을 논문을 쓰는 사람에게 확인시키고, '우는 소리'보다 한 마디의 논리적 명제나 권위있는 참고자료를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더욱더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할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논문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이 "테마에 대해 언급된 모든 것에 대해 ...... [자신보다] ...... 더 잘아는 사람은 없다"(p263)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논문을 제출하지 말라"는 것이 에코의 충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작업들은 "양심에 꺼리낌이 없도록"(p263) 해야한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지고 있지만, 감추어져 있는 윤리적 '방침'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학문적 양심'이라는 덕목이다. 학문적 양심은 곧장 '엄밀함'이라는 근대적 학문자세(Descartes적인)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논문의 어떤 행과 paragraph에 대해서도 한치의 '거짓'이나, '지적 허세' 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무지'를 거부하는 것에서 나온다. '2.5 필수적으로 외국어를 알아야 하는가'에서 에코는 외국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대중들에게 조금은 무리일 성싶은 요구를 한다. 테마에 대해 1차적 원전은 꼭 그 원전의 언어로 읽으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외국작가를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면 그 작가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없다"는 규칙은 에코에게나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엄밀함'이라는 덕목 아래서 정당화된다. 사실, 에코의 지적은 참으로 정당하다. 어떻게 우리가 '연구'를 하면서 '외국어'를 모르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적 상황은 더 비참해 보인다. 최소한 '영어'나 '영어권' 언어 둘은 알아야 서양철학에 관한 논문을 쓸 수 있다. 모든 번역은 미심쩍으며, "논문을 쓴다는 것은 바로 여러가지 종류의 번역이나 보급에 의해 잘못된 바로 그곳에서 원래의 사상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52)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금욕적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에코는 이 책을 씀으로써 학문적 성취물에 대한 일종의 '도구상자'를 대중에게 선물한 셈이다. 그러나, 선물은 단지 기뻐하라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도구상자'는 쓰는 사람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면서 변주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도구를 이용해 단련함으로써 가장 엄밀하면서도 유용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의 성과물이지 도구상자의 성과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정말 '즐거운 지식'(Nietzsche)일 것이며, 동시에 '힘들 뿐만 아니라 드'(Spinoza)문 것, 즉 '고귀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아와 자유 - 길의사상총서 3, 현대철학의 쟁점들
엄정식 / 길(도서출판) / 199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정식 교수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단순 명료하다. 철학이 사유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인식을 가능케한다면, 그 사유는 "깊이 생각하여 자기 엄지손가락을 보고도 온 우주의 신비를 실감할 수 있는 재능"(25)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실로 자유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철학은 현실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견지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이해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는 식의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철학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모습은 엄정식 교수가 이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칼 포퍼와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의 철학에 대한 이해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자유'를 향유할 자아(또는 주체)가 현대사회에는 모호한 채로 부유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면에서 매체와 관련되어 있으며, 간접적으로 영미 분석철학적 전통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아포리이기도 하다.

"대중사회에서는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환경이 극도로 확대되어 의사환경을 조장하고 여기서 자아의 정립과정에 사이비적 요소가 개입되어 의사자아 pseudo-self 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67).

"이러한 철학관을 가지고 실증주의적 분석철학자들은 현상을 논리언어의 틀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보처리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적극적인 구실을 함으로써 컴퓨터의 발달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했음은 물론, 정보사회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303).

실증주의적 분석철학이 가지고 있는 혐의는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이 존재를 '어법적' 대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부터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재에 대한 소박한 반영론은 현대분석철학에서 설 자리가 없다. 실재에 대해 완벽하게 객관적인 이론적 모델을 제공하던 '과학'도 쿤의 범례(paradigm)'에 의해 역사적 대상으로 평가절하된 상황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 엄정식 교수와 그가 많이 인용하는 철학자들의 단편들에 의하면 바로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다. 현대철학의 병리적 징후라고도 할 만한 이 두 의뭉스런 탕아들은 자아 정체성을 교란하고, 철학을 단지 비평적 작업 속에 가두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자유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상황에 대해 엄정식 교수는 (그 스스로가 진보적 진영의 한 부류로 규정하지만) 벼리가 보기에 다소 보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 상황에 대한 현대철학의 처방를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엄정식 교수의 분류를 살펴 보도록 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흔히 두 가지 반응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나는 그 문제 자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보수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신속하게 대처하려는 진보적인 반응이다. 보수적인 반응에도 두 가지 양상을 추적해볼 수 있는데, 하는는 복고적인 경향을 나타내며 전통과 밀착된 관계 속에서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수행되고 있는 방법에 따라 해결의 방안을 계속 다른 문제와의 연계 속에서 모색하는 방식이다. 한편 진보적인 반응에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와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로 나누어서 고찰해볼 수 있다. 전자는 전통과의 연계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반면에 후자는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경향으로 보인다"(28).

밑그림을 작성한 후 엄정식 교수는 보수진영의 첫째부류로 신토마스 학파와 신아리스토텔레스 학파(마리탱 J. Maritain, 슈패만 R. Spaeman, 코플스톤 F. Copleston, 로너건 J. F. Lonergan)를 지목하고, 두 번째 부류로는 신자연주의 학파(콰인, 셀라스, 골드만 A. Glodman, 김재권, 하크 S. Haak, 아우디 R. Audi)를 지목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첫째부류로 신칸트학파적 비판철학자들(포퍼, 아펠, 하버마스, 롤스, 데이비슨, 퍼트남, 그리고 벼리가 보기에 엄정식)을 꼽으며, 둘째 부류로 탈현대주의(post-modernism) 학파(데리다, 푸코, 리오타르, 로티)를 지목하고 있다.

엄정식 교수가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철학의 현대적 상황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은 진보진영의 첫번째 부류가 가지고 있는 온건한 합리성의 회복에 그 관건이 놓여 있다. 그가 보기에 보수진영은 어떠한 상황적 해결책이 아니라, 복고적인 고착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급진주의자들"(29)로서의 데리다 등은 너무 쉽게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며, 자칫 경박해지기 쉬운 것으로 비춰진다.

우리는 엄정식 교수가 지목하는 롤스와 포퍼등이 가지고 있는 정치철학적 보수성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것은 엄정식 교수가 의도하지 않았던 바, 일견 독서의 역설적인 성과일 것이다. 또는, 관점의 차이일 것인데, 그가 이 책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우리가 보기에 단지 고전으로의 회귀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것에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보수/진보의 분할 선상에 바로 칸트가 있다.

"현대철학은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수정과 반발과 극복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종교적 정신의 세계와 과학적 물질의 세계를 양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존재론적으로는 '본체 noumena'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선험성 apriori'라는 부담스로운 유산을 남겼다. 헤겔에 의해서 고무된 현대철학자들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였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실존현상학은 칸트의 구성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고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철학도 현상의 역설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맑스와 듀이의 실천철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분한 칸트의 이분법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칸트의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두 가지 요소, 즉 전통적인 언어관과 과학관은 오늘날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리성과 합리성과 확실성을 확보했던 언어의 지칭설과 과학의 객관성이 흔들리자 우리는 새삼스럽게 철학의 행방을 문제삼고 그 정체성의 확보에 급급하게 된 것이다"(28)

다시 말해, 칸트가 남겨 놓은 유산은 해결되지 않았으나, 그 유산의 전제가 되었던 합리성과 객관성이 매우 불안정한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여기서, 엄정식 교수에게 칸트 철학의 엄격성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3부에서 보이는 칸트로의 회귀는 칸트철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시도로서의 어떤 급진적인 플랜도 실패할 것이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실질적인 대안은 바로 엄정식 교수가 지목한 신합리주의자들(엄정식 교수의 용어)에 있다. 이들은 현대철학의 견결한 Kantian들이다. 이성의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며, 실천철학의 초월적, 정언적 성격 또한 인정하는 것이 Kantian들의 기본 덕목이다. 이 지점에서 신합리주의는 대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맑시즘을 비롯한 좌파 정치철학과 대립하게 된다.

벼리는 엄정식 교수의 온건한 정치철학과 칸트로의 경도를 신중한 현실적 철학의 한 발로라고 보고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토록 찾고자 하는 '자아'와 '자유'가 과연 그러한 온건성을 통해 획득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칸트의 자아는 통각적 능력을 지닌 하나의 단일한 구성적 실체가 아닐까? 우리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비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단지 비판적 언급의 맥락에서만 등장하는 소위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신중한 관심이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그저 경박한 시류나 유행으로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며 또 지속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맑스가 제시한 자유의 영역은 또 어떤가? 그러나, 이 책에서 그런 논구를 찾아 보기는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이 책의 말미에 엄정식 교수가 열어 놓은 어떤 가능성을 읽어 보는 것으로 그러한 또다른 '자유'의 일단을 긍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칸트의 초월적이고 비판적인 철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헤겔과 니체가 나타났듯이 아마 곧 이와 유사한 철학자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로티는스스로 헤겔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고 데리다를 비롯한 탈근대주의자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니체의 후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헤겔이나 니체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돌아가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언어적 전회'란 지성사적 사건이 있었고 새로운 과학관으로 무장한 분석철학이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아직 칸트는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한 당분간 현대인의 삶은 계속 이진법으로 디지탈화한 정보의 배를 타고 실용주의와 신비주의 사이를 표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아의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의 개념도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체는 죽었는가 (양장)
강영안 지음 / 문예출판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근대 이후 서양철학은 '주체(Subject)'를 실체화하거나 부수화하면서 이어져 왔다. 그런 면에서 서양철학은 데카르트의 아우라 안에서 사유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 전통은 니체와 프로이트 이후 급격한 위기 상황을 노정한다. 니체는 적극적으로 반데카르트주의를 외치며, '신의 죽음'과 함께, 주체를 유령화시켰다. 신은 곧 주체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단지 독일 관념론만이 주체를 이론적 명증성의 보증자에서 '절대이성'(Hegel), '절대자아'(Schelling) 등으로 비로소 실체화했다. 프로이트가 시도한 것은 꽤나 점잖은 편이었지만, 엄숙자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것의 동일성(identification)을 가지고 견고한 이성적 합리주의를 떠받치고자하는 야심찬 시도를 성공시켰지만, 그 스스로 이성의 도그마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효과가 되었다. 이성은 반이성, 즉 욕망(desire)보다 위에 있지 않다. 게다가 유명한 자아동일성도 그 이성의 합리적 토대라는 요구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초자아의 명령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정식은 데카르트 이후 구축되어온 칸트적 전통과 독일 관념론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체계의 철학들을 미심쩍고도 우스꽝스런 스캔들로 만들어 버렸다.

가령, 사티로스가 실재한다면, 현대적 주체는 그 종족을 내면의 조상으로 여겨야할 지경이 되었다. 도대체 주체라는 것이 실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흄이 데카르트를 최초로 의심한 이래로 주체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중세의 마녀재판을 불러 오기라도 하는 듯한 공포를 자아내곤 했다. 모든 이성의 체계와 정당화가 거기 달려 있었다. 앞서 말한 두 명민한 인물 이후에 사람들은 이 마녀 재판 따위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아동일성은 여러 각도에서 다시 되살아나곤 했지만, 마치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나타나거나, 아니면 자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등장하곤 했다. 전자의 경우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일 것이고, 후자는 싸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훗설을 비롯한 현상학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주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를 보증하는가? 장자의 나비처럼 덧없는 것이 생이라면, 우리는 이 현실의 고통을 그저 환상이라고 말하면서 견뎌야 하는가? 게다가 나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각기 다른 사회적 상황, 계급적 상황에 있으며, 각자는 고통의 강도가 다른 삶을 산다. 생이, 주체가 덧없다고 해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타자의 굶주림과 느닷없는 죽음과 계급적 착취를 두고 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럴 때, 주체의 부재는 윤리적 삶을 황폐화시킬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이며, 냉소다.

강영안 교수는 이 책의 모두에 해당하는 논문에서 주체부재로 인한 현대철학의 윤리적 상황을 명상서적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서 읽어낸다.  

"사람들은 삶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알고 싶지만 어떤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가 시원스레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명상서적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정신적 만족을 기대한다. 명상서적의 메시지가 삶에 구체적으로 옮겨지지 않은채 생각의 차원에서 머물 수 있지만, 이런 유의 책에 많은 사람들이 빠지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갈증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p. 70)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들의 명상서적에 대한 관심과 탈속한 삶에 대한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사회적 정황과 정신적 공황은 맞물려 있다. '대중의 갈증'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사적, 정신사적 성과들을 하루 아침에 살해하고자 하는 외디푸스적 욕망을 일시에 해소시켜 줌으로써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인용되고 강영안 교수의 주체탐구의 반성적 지침이 되는 아그네스 헬러의 한 구절을 옮겨 보자.

"어떤 사람을 땅에 파묻기 전에 먼저 그가 누군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장례 직후에 다시 시체를 끄집어 내는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철학도들은 이제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체'라고 불리는 것 혹은 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부검을 실시해보지 않았다"(Agnes Heller, Can Modernity Survive?, Cambridge: Polity Press, 1990, 61쪽, p.74에서 재인용).

주체라는 '시체'의 신원확인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사망신고를 하기 전에 우리는 '주체'의 행적을 더듬어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철학도로서의 학적 양심이 그렇게 만든다. 강영안 교수는 자신의 이 책을 그런 관점에서 보아 주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영안 교수에게 '주체'는 또 어떤 것일까? 실재로 그의 사상 안에서 주체는 이미 시체 공시소로 보내진 것일까? 벼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말해둔다. 강영안 교수에게 '주체'는 레비나스의 '무한성'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사상적 궤적은 강영안 교수도 인지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책 전체를 통틀어 저자의 입장을 가장 잘 요약하는 구절은 물론 서론에 있다.

"객관주의 비판이 절대화될 때 우리는 어떠한 인식 기준도, 준거틀도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고 주관주의 비판을 절대화할 때 객관주의에 빠지거나 또는 극단적 반휴머니즘에 빠질 수 있다. ...... 이제 그것을 반성하는 포스트 모던의 상대주의와 반휴머니즘은 비관주의적, 허무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에도 강한 오만이 도사리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만과 절망, 그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을 높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낮추지도 않으면서 인간에게 제격에 알맞는 자리를 줄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펼쳐나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p. 34).

그러므로, 주체는 여기서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남는다. 폴라니를 논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이 '인격'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객관주의적 극편향인 반휴머니즘의 제동장치다. 강영안 교수가 보기에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는 폴라니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폴라니와 함께 가장 중요하게 인용되는 철학자는 레비나스다. 레비나스는 이 책 전체의 결론처럼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레비나스의 '무한성'과 타자의 '환대(hospitality)'라는 개념은 절대화된 주체의 걍팍성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와 타자의 인정 그리고, 주체의 온전한 보전이라는 윤리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해서, 벼리가 보기에 강영안 교수의 결론은 매우 온건하다. 레비나스의 대안이 형이상학의 사정거리 안에 사회철학적 '주체'를 놓아두고 관망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이 맑스의 계급론을 경제주의의 사정거리 안에 두고 보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강영안 교수가 소개하는 레비나스에게는 '굶주린 과부와 고아'에 대한 주체의 '열림'은 있을지라도 그 굶주림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나, 계급적 관점이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면 아주 손쉽게 가로질러 갔을 그 주제 말이다.

그러나, 이 책 전체는 강영안 교수나 그가 결론으로 삼은 것처럼 보이는 레비나스의 관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장마다 우리는 근대철학 이후 주체철학의 계보와 그것이 비판받는 지점을 참으로 명쾌하게 읽을 수 있다. 데카르트 코기토의 성찰 2와 3에 나타난 구별(2장), 셀링과 독일 관념론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절대화하는 과정(3장),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에 의해 비판받는 헤겔철학과 주체성(4장), 현대철학의 주체문제(5장, 6장, 7장), 주체의 해체와 형이상학의 종말(8장).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현대적 정신의 주체성 혼란과 관련한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시인의 흙집일기
전남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그가 큰 결심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광주 충장 서점에서 [어느 시인의 흙집 일기](전남진, 중앙 M&B, 2003)를 보고 느낀 첫번째 소회다. 서점 문학 코너에 서서 책장을 넘기면서 난 참 오랜만의 시샘 같은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올라 옮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어 보았으면 하는 시샘말이다.

책에는 페이지 페이지 마다 집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 사진들은 집 만이 아니라 가시막골 그의 일가와 이웃들의 흙내 나는 사진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곧 흙이고 그가 흙으로 빚는 집이 곧 사람이다!

나도 1994년이던가 그를 따라 가시막골을 갔었다. 층층이 산을 타고 오른 논들 어귀에 자그마한 집이 있었고,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가죽나물을 정성껏 버무려 찬으로 낸 밥상을 참 맛나게도 먹었다. 난 그가 앞마당에 있던 가죽나무를 만지며 설명해 주던 그 말뽄 그대로 나중에 후배들에게도 그 나무얘기를 내 것인양(?) 해 주었더랬다. 밤에는 가시막골 흙내나는 세간살이 위로 정말 무진장 빛나는 별무더기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다음날은 서툰 손으로 할아버님의 논일을 거들었었다.

삶에 흐린 날들이란 어떤 것일까? 직장이나 돈, 또는 차가 없는 삶인가? 그런 것을 현실적인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태만하다. 현실은 그런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태만한 자기 만족 속에 있는 그러한 욕망의 부산물들이야말로 흐린날을 만든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그만한 고통을 또한 덤으로 얻는 것은 그가 가진 태만함에 대한 현실의 복수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현실적인 삶은 흙을 빚는 '정성'에 있다. 거기서 오는 슬픔과 가지런한 눈물이 복되고 현실적이다. 헛된 것만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은 끝내 손에 간지르르하게 만져지는 흙의 감촉을 잊고야 말 것이다. 삶의 감각을 제 손으로 잘라버리고 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숭어의 꿈 - 피닉스 문예 2 피닉스문예 2
김하경 지음 / 갈무리 / 200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산란을 하러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한때의 꿈을 방류하고 갈 것이다. 살다보면 제 자식들을 놓아 두고 온 그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김하경의 소설 <숭어의 꿈>은 그렇게 방류한 꿈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한때'의 일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매력을 금새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p13)

일탈은 다시 반복된다. 숭어라는 물고기가 그러하다. 초겨울이 시작될 때쯤 그녀들은 은빛 뱃살에 제 자식들을 가득 품고서 민물에서 바다로 간다. 그리고 물길 찰랑이는 바위너설 근처에 산란을 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막 알을 밴 그녀들을 기다리는 낚시꾼들의 미끼가 연안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숭어는 미끼를 물지 않는다'. 그물로도 그녀들을 잡기는 용이치 않다.

'그나마 배 두 척이 양 쪽에서 그물을 던져 삥 둘러싸고 막대기로 막 휘젖고 억수로 시끄럽게 소리를 내마 숭어가 겁이나 소리 나는 반대쪽으로 몰려다니다 그물 안으로 걸려든다 이기라.' (p35)

작가가 얘기하는 주인공들은 이렇게 일탈의 한가운데서 낚시꾼들과 한 판 드잡이하기도 하고, 뒤돌아서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는 우리가 시위 현장에서 느끼는 격앙된 감정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울리는 조용한 함성에 더 가깝다. '밭은 기침을 하면서 이불을 더욱더 힘껏 잡아당'(p108)기는 세상의 모든 해고자들은 이 소설 안에서 그러한 조용한 함성의 때묻지 않는 현실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절절한 것은 그 벗은 현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이 소설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내면으로 다가오는 여기 한 떼의 숭어들은 우리 가슴 언저리에 몰려 왔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사라져 간다. 내년 초겨울 그녀들은 다시 올 것이다.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일탈의 힘으로 말이다.

비로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삶이 이러한 평범한 것들의 약동과 솟구침이 아니라면 의미없다는 것이다.우리가 쾌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요한 바다에서 각자 숭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쾌할함이 작가에게는 처음에는 가슴 아릿하게, 그리고 문득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 왔다. 무관심과 '슬픔, 분노, 절규'또는 죽음조차 넘어서는 노동의 활력이 거기 있다.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p14)

그물에 걸려 이미 횟감이 되거나, 비늘 여기저기 생채기 붉게 드러난 사람들을 여기서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의 '빗나간 예상'을 미리 숙고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술이나 한 잔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축제에 어울리라고, 이 넓은 노동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느러미 힘차게 뛰어 올라 보자고 말한다. 어깨 툭 치며,

'원래 뛰는 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는 법이다. 알긋나?'(p35)

암, 알고 말고다. 누구나 '빛나는 삶의 한 순간'(p16)이 있다. 그것들이 세세년년마다 모인다. 달빛 교교한 바다, 은빛 빛무리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