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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의 꿈 - 피닉스 문예 2 ㅣ 피닉스문예 2
김하경 지음 / 갈무리 / 2003년 12월
평점 :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산란을 하러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한때의 꿈을 방류하고 갈 것이다. 살다보면 제 자식들을 놓아 두고 온 그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김하경의 소설 <숭어의 꿈>은 그렇게 방류한 꿈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한때'의 일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매력을 금새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p13)
일탈은 다시 반복된다. 숭어라는 물고기가 그러하다. 초겨울이 시작될 때쯤 그녀들은 은빛 뱃살에 제 자식들을 가득 품고서 민물에서 바다로 간다. 그리고 물길 찰랑이는 바위너설 근처에 산란을 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막 알을 밴 그녀들을 기다리는 낚시꾼들의 미끼가 연안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숭어는 미끼를 물지 않는다'. 그물로도 그녀들을 잡기는 용이치 않다.
'그나마 배 두 척이 양 쪽에서 그물을 던져 삥 둘러싸고 막대기로 막 휘젖고 억수로 시끄럽게 소리를 내마 숭어가 겁이나 소리 나는 반대쪽으로 몰려다니다 그물 안으로 걸려든다 이기라.' (p35)
작가가 얘기하는 주인공들은 이렇게 일탈의 한가운데서 낚시꾼들과 한 판 드잡이하기도 하고, 뒤돌아서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는 우리가 시위 현장에서 느끼는 격앙된 감정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울리는 조용한 함성에 더 가깝다. '밭은 기침을 하면서 이불을 더욱더 힘껏 잡아당'(p108)기는 세상의 모든 해고자들은 이 소설 안에서 그러한 조용한 함성의 때묻지 않는 현실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절절한 것은 그 벗은 현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이 소설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내면으로 다가오는 여기 한 떼의 숭어들은 우리 가슴 언저리에 몰려 왔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사라져 간다. 내년 초겨울 그녀들은 다시 올 것이다.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일탈의 힘으로 말이다.
비로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삶이 이러한 평범한 것들의 약동과 솟구침이 아니라면 의미없다는 것이다.우리가 쾌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요한 바다에서 각자 숭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쾌할함이 작가에게는 처음에는 가슴 아릿하게, 그리고 문득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 왔다. 무관심과 '슬픔, 분노, 절규'또는 죽음조차 넘어서는 노동의 활력이 거기 있다.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p14)
그물에 걸려 이미 횟감이 되거나, 비늘 여기저기 생채기 붉게 드러난 사람들을 여기서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의 '빗나간 예상'을 미리 숙고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술이나 한 잔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축제에 어울리라고, 이 넓은 노동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느러미 힘차게 뛰어 올라 보자고 말한다. 어깨 툭 치며,
'원래 뛰는 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는 법이다. 알긋나?'(p35)
암, 알고 말고다. 누구나 '빛나는 삶의 한 순간'(p16)이 있다. 그것들이 세세년년마다 모인다. 달빛 교교한 바다, 은빛 빛무리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