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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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론과 주체성 Empirism et subjectivit 』(1952) 이후 들뢰즈는 긴 철학적 잠행에 들어간다. 그 10년의 기간을 그는 "머리를 벽에 그만 짓찧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와 철학 Nietzsche et la Philosophie』(1962)은 들뢰즈의 철학적 궁지를 온전히 표현하면서 그것의 극복까지 논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의 아포리는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그가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 그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헤겔주의는 이 의문의 중심에 있다.

일군의 헤겔주의자들은 이 문제적 저작을 통해 들뢰즈의 상당한 지적 성취와 독자성을 폄훼하면서, 니체와 더불어 참으로 정직하게도, '부정'의 범주 속에 그를 놓아 둔다. 하여간, 헤겔식의 안티테제가 출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밖의 점잖은 대응은 이들 둘 모두에게 불쾌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니체가 또는 들뢰즈가 취급당해야 할 영역은 헤겔류의 노예적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의 놀이가 횡행하는 탈구조주의의 고원에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헤겔주의자들은 가만히 있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짓하는 것은 저녁이 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이들에게 철학은 그같이 소멸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석양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초과하는 정오 또는 자정의 사유로서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들뢰즈의 철학적 도제수업에서 니체가 가지는 비중은 스피노자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들뢰즈에 의하면, <권력감정 sentiment de puissance>(122)을 그 내밀한 요소로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pouvoir>(121)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니체에게서의 스피노자적 영감을 부정하기 어렵다.>(122) 이러한 직관은 후에 그의 박사학위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Spinoza et le problme de l'expression』(1968)에서의 코나투스(Conatus)에 대한 해석에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니체 자신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의 거의 모든 철학들에 대한 '반시대적' 열정에 몰두하던 그가 '놀라운 친밀감'을 느꼈다고 술회하는 저작은 다름 아닌 『에티카 Ethica』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친밀감의 근원은 '권력/힘'이라는 개념에 있는 것이고, 당연히 들뢰즈의 니체는 그것을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힘',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그만큼 낯선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나치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오해, 중대한 오해는 나치즘이 창궐하는 그 시간에 니체철학이 충분히 잘 '활용'되고 있었고, 그 효과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반유대주의라는 오명을 먼저 걷어내자. <사람들은 반(反)유대주의자이면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프리취 Fritsch에게 그가 썼던 것을 상기하지 않고서는 니체의 유태교에 대한 페이지들을 읽을 수는 없다: "나는 당신의 출판물들을 내게 더 이상 보내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 바이오. 나는 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소".>(227-8) 그렇다면, 이러한 니체의 언급이 평가될 수 있는 철학적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에게 권력, 또는 힘은 반유대주의 나치즘의 '활용' 대상이 아니다. 나치와 우리가 공유하는 오해는 힘의 요소에 대한 '표상화'와 관련된다. 힘은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지를 그 미분적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현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일한 권력 중심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힘들'이다. 상식적 왜곡은 <표상하고, 표상되고, 자신을 표상하도록 만드는 광기, 그래서 표상하는 것과 표상된 것을 소유하려는 광기>(152)에서 나온다. 가장 잔혹한 형태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힘들은 권력의지의 미분적 표현이며 차이를 향유하는 실천적 성격을 가진다. 왜 그런가? 힘들이 표상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기를 원하는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들뢰즈는 그의 니체 이해의 기간을 형성하는 두 가지 개념쌍을 제시한다. 즉, 힘과 권력의지는 다음의 두 성질을 가진다. ① 적극적(actif)-반응적(reactif),  ② 긍정적(positif)-부정적(negatif). 전자의 개념은 힘의 원초적 성질이며, 후자는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이다. 힘과 권력의지는 이러한 서로간의 성질들을 교환하고 지탱하면서 힘의 유형학(주인-노예)과 계보학(권력의지-영원회귀)을 이룬다. <왜냐하면, 긍정은 작용이 아니지만, 적극적 생성의 잠재력, 적극적 생성의 화신이며, 부정은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지만, 반응적 생성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것들은 힘들의 씨실로 생성의 고리를 만든다. 바로 긍정은 우리에게 디오니소스의 영예로운 세계, 생성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바로 부정은 우리를 반응적 힘들이 그로부터 나오는 염려스러운 토대 속으로 떨어뜨린다.>(109-10) 따라서, 들뢰즈의 니체가 기획하는 철학은 궁극적으로 긍정적 권력의지를 극대화함으로써 부정적 권력의지, 즉 허무주의를 파괴하는 데 있다. 이러한 파괴의 기획은 영원회귀를 통해 가능하다. 권력의지가 긍정성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그 자신의 영원회귀를 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응적 힘을 적극적 힘의 명령 아래 두고 그것의 영원회귀를 결단하는 것. 그러한 의지는 주체가 기존의 것으로 향유하던 가치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에 들뢰즈의 니체가 가지는 또 다른 독특한 성격이 놓여져 있다. 다시 말해,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 기존의 가치들은 '차이의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 나는 것이 돌아 오기 위해서는 힘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것에 반응적이 되거나, 부정을 통해 동일자로 회귀하지 않으며, 항상 생성하고 긍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회귀란 표현을 동일자의 회귀로 이해할 때는 항상 오해를 낳는다. 되돌아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그것이 자신을 생성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 다수로 긍정하는 하나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즉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른 것과 그것의 재생산과의 종합, 생성과 자신을 생성으로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이중적 긍정의 종합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102). '동일자의 회귀'는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다. 여기서 동일자는 알다시피 '힘'이지만, 그것은 '차이나는 힘들'이다. 권력의지란 이러한 영원회귀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성격을 '차이와 반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헤겔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자와 반테제 그리고 종합이라는 정식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차이나는 것들의 영원회귀는 종합을 알지만, 그 종합은 차이를 지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들 속에는 지배와 피지배가 있으며, 우연을 긍정하는 주사위 놀이가 있다. 차라리,  변증법은 이러한 현실적인 차이들의 반영이며, 그것도 악화된 추상적 반영일 것이다. 게다가, 차이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는 변증법은 마땅히 기존 가치의 옹호자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최악의 발전된 형태를 스탈린주의 Diamat를 통해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맑스가 헤겔을 발로 걷게 한 것은 잘 한 것이었지만, 변증법 자체를 발로 걷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들뢰즈는 니체를 경유하여 맑스를 조감하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전략은 구체제의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매우 급진적으로 벼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니체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 그것은 존재론적 아포리를 해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아포리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매우 정당하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들뢰즈가 니체와 함께 헤겔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노래'하게(『천 개의 고원』) 하는 것은 차이의 놀이를 급진주의(radicalism)의 함성으로 던져 놓기 위함일 것이다. 몇 년 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공명하는 차이나는 집단들의 혁명'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68년 낭떼르에서부터 말이다. 따라서, 이 10년 간의 잠행의 결과물이 앞으로 올 100년 간의 혁명적 표현의 '서광'으로 읽힐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결례가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경의의 표현이 될 것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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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의 초상 카이로스총서 3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 갈무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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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나키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것일까? 맑스가 『바쿠닌주의자들의 활약상』이라는 짧고도 다소 경멸적인 문체로 씌여진 논문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것은 무모함과 열정의 묘한 결합이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모적 사상이다. 그렇다면, 맑스가 또한 초기 아나키스트인 블랑키의 사면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또 무엇이며, 인터네셔널 본부에서 아나키스트와 바쿠닌을 제명시키기 위해 중앙위원회의 권력을 절망적으로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좌파의 시각에 이러한 의문은 항상 미결인 채로 남겨져 왔다. 때로는 고의로, 때로는 교조적이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에게 있어서 대결해야 할 상대는 맑시스트들이었다기 보다, 맑시즘이 단일한 권력중심체의 이데올로그들을 양성하고, 그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반역적 민중들의 해방 역량을 도구화하는 바로 그 행태와 조직적 시도였다. 따라서, 맑스가 정당하게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듯이 크로포트킨은 스스로 우상(idol)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국가도 없고, 황제도 없다"

폴 애브리치는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삶과 투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감동적으로 스케치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라는 이들의 전략은 아나키스트의 삶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어째서 '폭풍'이라는 비유가 적절한지를 말해 준다. 그들 대부분은 한 권의 완성된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항상 당대 반란의 중심으로 달려 들어갔다. 실행과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혁명과 반역이라는 신성한 땅에 단 한 뼘도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쿠닌은 맑스의 적대자라기 보다 그를 항상 전면으로 밀어 부치거나, 스스로의 지적 역량을 혁명적인 당대성으로 벼루어낼 수 있게 해준 시니컬한 동지에 가까워 보인다. 『프랑스에서의 내전』은 바쿠닌이 철의 신념으로 피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면서 일러준 그 직접행동의 고귀함이 없었다면,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맑스가 초기의 부정적 판단을 수정하고 빠리꼬뮨을 긍정했을 때, 바쿠닌은 아마 맑스의 이 뛰어난 저작 이후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터이다.

네차예프와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부분은 흥미롭다. 네차예프라는 이 인물을 기화로 바쿠닌이 인터네셔널에서 제명될 때까지, 애브리치는 그 둘의 애증을 서간과 주위의 증언들을 토대로 실증적으로 엮어 낸다. 결과적으로 바쿠닌은 그 자신의 신념을 무엇보다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네차예프라는 인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바쿠닌 자신의 화신이었고, 폭력과 아방가르드적 기질에 있어서 그를 앞섰으며, 혁명운동을 음모적인 범죄로 이끌어 가는 과감함에 있어서는 그 자신의 기대를 초월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음모가 아니라 범죄다. 애브리치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부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쿠닌이 순수한 희생자인 것만이 아닌 것과 같이, 네차예프가 혁명운동에 얼마만한 해악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그의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인정함과 아울러 가차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그는 동지를 모함하여 죽인 범죄자이며, 거짓선전으로 운동의 도덕성을 훼손한 사기꾼이었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할, 오직 유일해야만 하는 인격이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혁명에 있어서 현명한 의사의 처방과 같다. 전쟁에서 연합국의 손을 들어 주었던 순진함을 제외하고서, 크로포트킨의 인격과 주장은 아나키즘에 대한 어리석은 오해를 불식시킬만 한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폭력은 '정당하게' 긍정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황제의 군대와 부르주아의 사병들은 여기서 완전히 그 권리를 상실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빈자들에게 폭력이다. 빈곤, 기아, 도덕적 황폐, 알콜중독, 금전으로 인한 모든 범죄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쟁기질로부터 싹터온다. 아나키즘의 폭력은 이 폭력들에 비한다면 참으로 절망적이며 사소하다. 크로포트킨이 개인적인 암살과 폭력의 절망적 특성에 연민을 느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말자. 그 길은 아나키즘의 협동공동체로 나 있지 않으며, 무자비한 테러리즘의 벼랑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나키스트들의 초상 외에도 애브리치는 진지한 시선으로 다른 아나키스트들을 다룬다. 엠마 골드만과 베르크만 그리고, 플래신, 슈타이머와 플래밍을 비롯해서, 이들의 삶은 마치 감옥을 전전하는 성자와 같다. 깊은 도덕성과 혁명운동에의 헌신을 묘사함으로써 각각의 장들은 이 인격들 각자의 북소리로 공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거대한 북소리. 그 북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애브리치가 그려 놓은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역자가 강조하고 있다시피, 죽은 자들의 초상이 아니다. 우리는 68년 낭떼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세계를 순환했던 투쟁의 열렬한 주기 또한 간직하고 있다. 빠리꼬뮌에서 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을 거쳐 최근의 반세계화 시위에 이르기까지, 투쟁이 드러내는 열정의 핵심은 언제나 아나키의 심장에 맞닿아 있다. 직접행동과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모든 중앙화된 권위와 권력을 부정하는 꼬뮤니즘.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반역의 고귀함이 그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아나키의 심성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드러난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투쟁의 순환 주기 속에 수백, 수천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얼굴에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다름 아닌 그들이 바로 '여기/지금' 아나키스트들이며, 바로 그들이 지난 혁명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여기/지금' 일구어내는 아나키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꼬뮨의 지평 안에 아나키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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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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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존재론이 있다면 그것은 들뢰즈의 존재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이하게도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존재론이다. 서양철학이 항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같은 심급으로 다루어 왔다면, 들뢰즈에게 그러한 시도는 존재에 대해 오캄의 면도날과 같다. 너무 많은 규정이 형이상학의 이름으로 있어 왔다는 것은 니체 이래의 서양철학의 문제의식이 아니었던가. 일종의 <고등사기>(니체)와 같이 존재는 너무 헐거운 형이상학의 옷을 입고 불편하게 철학의 오솔길을 뒤뚱거렸던 것은 아닐까?

서동욱 교수가 들뢰즈를 경험론의 계보 안에 위치 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들뢰즈의 경험론은 소박한 영국식 경험론은 이미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들뢰즈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보는 실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재 이전의 또 다른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험의 가능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배후'를 살핌으로써 다시 형이상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경험은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며, 그 이외의 것은 부질없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 경험의 축과 한계가 '존재' 아니었던가? 우리 인식은 이 경계 내에서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존재 안'에 있는가? 경험론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우리 인식을 옭아 매는 '존재'는 없다. 실체로서의 존재는 폐기되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경험의 가장 근원적인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경험' 배후에 뭐가 있단 말인가?

경험론의 근본 정신 …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 est/is 푸르다>는 존재를 그 근저에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 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 요컨대 <존재>는 경험론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먼저 경험론이 제거해 버려야 하는 허구인 것이다. 문법이 일으키는 환각에 대항해, 계사는 존재 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 그것이 경험론의 사명이다(p. 64).

그렇다면, 이제 데카르트의 악신은 여기서 문법적 환각의 주술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우리가 들뢰즈의 경험론으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 다시 말해, 존재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성의 이웃함, 즉 '배치 dispositif'라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게, 또한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강도적 차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와 양태의 본질이다. 속성은 양태를 통해 스스로 배치될 것이며, 그러하다면, 여기서 배치는 '양태적 구도'가 된다.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양태적 구도, 또는 내재성의 구도. 한 마디로, '하나의 삶'

최후의 영광은 <속성들>에게 돌려진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 내재성을 구성하는 것은 존재하는 힘과 사유하는 힘, 바로 속성들이다. <무엇보다도 내재성은 '속성들의 일의성'을 의미한다>(SPP, 100). 이 강도적 크기들 또는 양태들을 들뢰즈는 말년의 대작에서 <수많은 고원들 Mille plateaux>라고 불렀다. 내재성 안에서의 이러한 사건, 즉 이러한 힘의 들끓음, 혹은 수많은 고원들 사이의 기호 해독, 변용, 그들의 합성과 분해는,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낱말들로 쓰자면, 생기(生氣)를 가진 모든 것들의 사랑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의 소용돌이이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피히테에게서 들뢰즈는 이것을 일컬을 말을 발견한다(Ⅳ, 4 참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삶 UNE VIE>, 하나의 삶이라고밖에는 불릴 수 없는 것이다(p. 248).

삶, 이것은 들뢰즈에게 양태들의 강도적 배치며 매개되지 않은 욕망의 들끓음을 긍정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강도적 배치를 산다. 그 와중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사건들과 기호들은 미리 예정된 질서를 형성하지 않으며, 온전히 우발성 안에 맡겨질 것이다. 영원회귀. 또는 기관 없는 신체 위에 등록되는 욕망의 배치들. 반복되는 것들은 이러한 차이와 생성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삶의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삶이 영원히 변한다는 사실뿐이게 된다.

서동욱 교수는 들뢰즈를 통해서 결국,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법이든, 체제든, 실체든 그것은 오로지 시뮬라크르들의 배치와 범람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 그 미세 지각들의 잠재성이야말로 우리 경험의 가능근거며 변전하는 모든 것들의 영원회귀가 윤리와 존재의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 말이다. 들뢰즈는 이 깨달음을 위해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벼루어 내야만 했던 것일까? 오이디푸스에 대한 증오는 그가 왜 정치적으로 급진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아버지 살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혁명가의 모습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오이디푸스 삼각형 안에 갇힌 불쌍한 엠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삼각형을 깨부수는 분열자가 되는 것이다.

부분충동으로서의 욕망은 무목적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 까닭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자본 씨, 대지 부인,' 이 둘의 아이 노동자>(A, 315)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 즉 가족주의적 표상을 통해 지배하려는 데 반해, 욕망은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이상, 욕망의 본성에 대립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 욕망이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오이디푸스적으로 짜인 자본주의적 상징계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p. 202-203).

부성적 시니피앙은 욕망을 굴복시키는 장치로서, 전복되어야 할 것이지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p. 221).

오이디푸스는 체제의 산물이며 정신분석은 그것을 정당화한다. 자본주의를 탈구조화시키는 혁명은 다시 말해, 이 욕망의 차원에서 일어날 것이다. 68혁명의 함성소리와도 같은 이 글귀들은 서동욱 교수가 들뢰즈를 참으로 올곶게 독해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래서, 들뢰즈 철학의 급진성과 함께 그것의 윤리적·정치철학적 변주를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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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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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을 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들뢰즈에 의해 충분히 익은 현대철학의 사유의 특질은 표상을 가두고, 위계화하면서 닦달하는(Heidegger) 근대적, 더 거슬러 가 플라톤적 사유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항이며, 전복이다.

혁명적 사유. 그것은 후설 이래, 무전제의 철학을 구성하기를 갈망한 현대철학이 필연적으로 입지할 수밖에 없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 일반적인 형태가 가지는 통속화 경향은 마치 후설이 빠졌던 그 '순수 자아'의 함정과 같이 많은 철학자들에게 타성으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듯 보였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다. 그것을 힘써 차근차근 풀려고 하는 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은 들뢰즈에 와서야 가능했다. 들뢰즈 사유의 전거로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철학적 도제수업에서의 가능한 최대치의 날카로움을 들뢰즈에게 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설의 유년시절을 지배했던 그 '날카로움'이라는 메타포(p. 84)는 들뢰즈에게도 합당하다. 사유는 갈고 갈아서 마침내 형체조차 없어졌을 때 그 자신의 전제를 단숨에 잘라 버릴 수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표상'과 '동일성'이라는 철학의 가능 근거를 단지 그 반대로 사유하기 시작하는 실험적 주체에게서 극복 가능한 것이다.

혁명적 사유. 서동욱 교수가 들뢰즈와 함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국가, 혈통, 가문, 종파, 계급, 학연, 지연, 통념이 지배하는 변화를 싫어하는 정주민의 땅 안에서 내 후손이 차지할 유리한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후손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거친 광풍이 몰아치는 유목민의 유랑길에, 아무런 공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 앞에 내몰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무전제로부터 발생하는 사유란 언제나 새로운 법칙과 가치의 창조라는 과제 앞에서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을 가진 카인이 짐승을 몰고 떠돌아다니는 아벨에게 그랬듯 숙명처럼 정주민들은 언제나 이 유목민들을 죽이고 싶어할 것이다(p. 91). 

공리 없는 사유의 유랑길, 혁명과 카인의 복수. 서동욱 교수와 들뢰즈는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유 자신이 충족 이유인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라, 문화적 사유, '비표상적 사유'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들뢰즈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칸트, 하이데거, 니체, 사르트르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들뢰즈에게 어떤 특권적 지위를 선뜻 선사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그랬듯이 저자는 들뢰즈까지 포함하여, 이 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사유의 경계 내에서 비판적으로(그러나, '긍정'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거대한 사유자들 사이에 어떤 유비적인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횡단선을 내고, 그럼으로써 사유가 돌파해 갈 수 있는 현대적 첨단에 내기를 건다.

인식에 있어서 무전제성, 주체와 타자, 혁명과 반동. 이런 테제들이 신중하게, 그러나 강력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것은 어쩌면,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가지고 있는 책의 이중적 구조(본문과 주석이라는)를 저자가 본받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사르트르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다. 서동욱 교수는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가 곧장 사르트르의 그것에 빚지고 있다고 단언한다. 정확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사르트르의 예언자적 풍모를 드러내 보이는 부분은 읽는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함께 있는 존재 l'etre-avec(Mitsein)'는 한 개별자와 다른 한 개별자와의 얼굴을 마주한 en face de 명석판명한 위치가 아니다. [……] 그것은 자기의 동료와  팀워크를 같이 하는 막연한 공동 존재이다"(285). 여기서 "우리들의 관계는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옆으로부터의 par cot  상호 의존이다"(284). 이러한 사르트르의 주장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반복한다. "하이데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로 설정한다. [……]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함께 나란히 있음 Miteinandersein이라는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다. 함께 mit라는 전치사가 여기서 관계를 묘사한다. [……] 그런데 타자와의 근원적인 관계는 함께 mit라는 전치사를 통해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TA, 18-19)(p. 170).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인 표상이 아니며(291), 타자를 표상으로 세울 경우 타자성은 그 표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273)고 말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주요 명제들이 출현하기 훤씬 이전에, 들뢰즈와 푸코의 저작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리고 레비나스가 겨우 후설에 관한 연구서를 하나 출간했을 즈음, 사르트르는 이미 우리 시대 철학의 이 모든 주요 주제를 예언하는 성찰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서양 철학에서 줄곧 동일자는 표상을 매개로 타자를 자시의 지평 위에 귀속시켜 왔으며, 동일자의 인식적 지평 위에서 타자가 대상으로 정립될 때, 그 타자의 타자성을 증발해 버린다는 성찰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 훨씬 앞서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p. 171).

타자에 대한 사유가 유래하는 계보를 파헤치는 저자의 날카로움은, 이 책이 목표로 삼은 들뢰즈의 '차이'와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유사성과 이질성을 밝혀 내는 부분에서도 그 성과를 발휘한다.

예술이 비인격적 익명성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쌍둥이보다도 더 경이롭게 서로를 닮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으로부터 한 사람은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저항, 혁명이라는 자유의 사건을 목격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책임성으로부터의 자유, 곧 비윤리적인 혼돈을 목격한다. … 주체 개념으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들뢰즈에게, 비인격적 익명성을 실현해 주는 예술은, 우리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혁명을 의미하지만, 레비나스의 경우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으로 인한 주체의 사라짐은 곧 책임성의 실종을 의미한다. 아마도 두 사람의 화해 불가능성은 근본적으로는 '이편'의 철학(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과 '저편'의 철학(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 사이의 차이에서 유래할 것이다(p. 394).

이 즈음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저자는 들뢰즈와 레비나스의 차이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저자는 둘의 차이에 어떤 횡단선을 내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둘의 차이란 그리 큰 단절을 뜻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체의 소각과 함께, 또한 '대타자(오이디푸스)'의 소멸과 함께, 우리는 타자를 발견하고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면서, 68년 혁명의 그 도발성과 같은 또 다른 혁명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혁명적 사유의 가파른 샛길에서 조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차이와 타자'라기 보다, 차라리 '차이냐? 타자냐?'인가? 그건 저자가 밝히고 있지 않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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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왜 제게 자전거를 가르쳐주고 싶어했을까? 하긴 자전거타기란 혼자 터득하기 힘든 어떤 것이지요. 그들은 제 등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지요. 그들이 손을 놓는 순간 전 뒤뚱거리다가 쓰러지구요. 저는 누구든 제게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노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유심히 본답니다. 그들은 저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들인지도 몰라요. 손을 놓아주기 위해서 저를 가르치는 것일지도 모르구요[미미](104).

 

-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었어. 이제 페달을 힘차게 구르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리겠지.
미미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아니었어.
그는 미미를 돌아보았다. 일방통행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간헐적으로 불빛을 번쩍이며 그들 곁으로 스쳐지나갔다(130).
 

오랫동안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주위에 있으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 벼리에게는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본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이었다. 마음먹고 보지 않고는 못 보는 책들. [자본론]은 학부 휴학 상태에서 대구 경북대 도서관에 한 달여 틀어박혀 지내면서 보았었는데, 이 책은 오히려 매우 바쁜 요즘의 일상 속에서 급작스럽게 독서욕을 일깨우면서 다가왔다.
96년에 1판 1쇄고 내가 구한 책이 2002년 1판 16쇄니까,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어지간히 많이들 읽었을 것이다.

이 두 책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둘 다 어떤 '파괴'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체질상 쾌락주의자인데다가, 남이 우울해하거나 심각해하면 농담부터 던져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하는 요상한 성벽이 있어서일까? 아무튼 그랬다.

작가는 현대적 증후로 세 가지를 든다. 죽음과 섹스와 나르시시즘. 이 소설에서 주로 부각되는 것은 그 중에서 죽음이다. 그에 맞게, 작품 중 '나'는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자살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에 필요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살이 끝나면, 여행을 떠나고, 그들이 자살하기까지의 짦은 생을 소설화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둘이다. 유디트(세연)와 미미. 그리고 다른 인물, C와 그의 동생 K, '나'가 비엔나 여행중 만난 홍콩 여인 '그녀'.

이들에게 삶은 죽음보다 덜한 고통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자의식은 매번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을 교란한다. 죽음과 평행한 삶. 이 중 어느 하나가 유난히 강조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삶과 죽음을 대척점으로 놓고 삶을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찬양의 합리화를 통해서 삶에 고착될 수밖에 없다.

"불멸? 불멸이 어때서요?"(114)라고 C는 미미에게 반문한다. 그와 같이 삶을 정당화하는 논법은 자주 변명조가 되기 쉽다. 왜냐하면, 죽음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도에 있어서 죽음은 삶에 못지 않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제, 죽음을 긍정하자. 그렇게 되면 삶의 모든 비의가 그 신성성을 잃어버리고, 헐벗은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다가설 것이다. 이때, 섹스는 위태로운 자의식과 함께 한가한 게임이거나 자신만의 쾌락 이외의 어떤 중요한 삶의 부분이 아니다. 폭설이 내리는 한계령 국도 차 안에서 유디트는 C를 옆에 두고서 자위를 한다. 둘이 하든 혼자 하든 다를 게 없다. 쾌락의 강도가 여기서는 독백적이며,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차이'로 나타난다. 육체는 그러한 타자와의 현격한 거리를 감당할 수 있다. 육체는 개체의 증명이며, 가장 명증한 쾌락의 장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클림트의 유화 《유디트》와 다비드의 《마라》그리고, 드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만나는 지점은 이곳이다. 냉정함. 삶의 비의를 벗겨내면 그 삶에 대해 냉정할 수 있다. 그 비의가 죽음이었으니, 더 이상 경외하거나 찬송하지 않아도 된다. 마라의 평화로움은 사르다나팔이 목격한 경악스러운 살인 장면, 그리고 유디트의 쾌락을 거쳐 완성될 것이다.

유디트의 죽음은 그래서 C에게 어떤 슬픔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C가 경악하는 것은 오히려 미미의 퍼포먼스다. 애초에 C에게 예술은 삶을 탈색시키는 과정이며 비디오 아트의 사각 브라운관 속에 오브제를 냉정하게 배치하거나 박제하는 작업이며, '불멸'이다. 그러나, 미미는 다르다.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113-114). 정작 죽음에 길들여진 것은 미미가 아니라 C인 것이다. 미미의 퍼포먼스가 경악스러운 것은 그것이 "찰나의 현존"(68)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C에게 더욱 가깝다. 죽음에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비디오 작업은 그 자체로 죽음이며, 미미는 그것을 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미미는 찰나의 현존을 버린다. 비디오가 상연된다는 것. 그 속에 스스로가 기입된다는 것. 그 사실로 이미 미미는 죽었다. 이후 그녀의 자살이 매우 건조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우리의 자화상은 C다. 애써 죽음을 부정하려는 몸짓은 어딘지 어색하며, 소부르주아적이며, 무관심하다. 유디트의 죽음에 K가 드러내는 감정에 대해 C는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134) 정도로 대답한다. C와 그의 작품 모두는 K에게 그래서 "구역질이 나"(134)는 것이다. 당연하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구역질을 느껴야 한다. 죽음에 길들여진 군상으로서 죽음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헛된 짓인가.

반면, 죽음과 친숙한 실존으로서 우리는 그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약간의 고통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유디트와 미미를 설득한다. 잠재적 존재로서의 죽음이 현실화되는 것은 일종의 흥미진진한 모험일 수 있다. 그 길로 가는 것. '나'는 의뢰인들에게 C의 적당한 위선을 경멸하고, 적절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의식을 확인하는 그 길로 가라고 유혹한다. 작가의 말대로 죽음을 선택할 만한 필요조건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진 것이 현대라면, '나'는 거기에 '유혹'이라는 충분조건을 건네준다. 허약한 자의식은 유혹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은 영원히 은폐되고, 삶의 진실도 그와 함께 방치된다. 여기, 선택의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진실이 중요한 인간들은 죽음을 선택하는가? 손목을 긋거나,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거나, 청산가리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선명한 선택이다. 그러나, 벼리는 이렇게 되묻는다. '죽음'이 그렇게 현실화되어야만 우리에게 명확한가? 잠재적인 죽음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가깝다. 우리가 선택한 그 죽음의 순간, 그 찰나의 현존은 우리에게 와닿자마자 사라진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잠재적인 유물론자들인 우리. 느껴지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무능력이 곧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정당화는 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삶의 친구로서 죽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굳이 손목을 그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미미는 좀더 C를 다그치거나, 삶을 공연함으로써 경악에 길들여야 했다. 죽음은 진실이지만, 그 진실은 삶의 무대에서는 공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불러 들일 수 있으며, 그 '앞에서' 삶의 무대를 펼쳐 보일 수는 있다.
유디트와 미미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음으로 이어져 있다. 삶의 무대가 사라져 가는 지점. 애초에 그들이 선택했던 죽음이 현실화되자마자, 삶의 현존이 사라진다. 진실을 맛보기 위해 영혼을 팔았으나, 악마는 영혼과 함께 육체마저 거두어 간다. 공정한 교환이 아닌 거다. 속은 거다.

곧장 달리지 마라. 죽음의 면전에서 차라리 쓰러져라.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는 삶은 진실하다. 그러나, 유혹에 견디려면 좀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죽음의 유혹 앞에서 뻔뻔스러워 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죽음의 면전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자. 쓰러지는 쪽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다가,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죽음 앞에서 멈추고 빤히 바라보며 웃어 보기. 그러니, 차라리 그 앞에서 쓰러지기를 반복하자.  상처가 많은 삶이겠지만, 위선적이지도, 또한 허약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쾌한 장난. 죽음 앞에서 웃음짓기. 쾌락주의자의 눈에 죽음은 위악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친근하며, 장난 걸만한 존재다. '나'는 매우 곤혹스러울 게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무(無)인 죽음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Epicurus

written by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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