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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왜 제게 자전거를 가르쳐주고 싶어했을까? 하긴 자전거타기란 혼자 터득하기 힘든 어떤 것이지요. 그들은 제 등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지요. 그들이 손을 놓는 순간 전 뒤뚱거리다가 쓰러지구요. 저는 누구든 제게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노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유심히 본답니다. 그들은 저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들인지도 몰라요. 손을 놓아주기 위해서 저를 가르치는 것일지도 모르구요[미미](104).
-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었어. 이제 페달을 힘차게 구르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리겠지.
미미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아니었어.
그는 미미를 돌아보았다. 일방통행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이 간헐적으로 불빛을 번쩍이며 그들 곁으로 스쳐지나갔다(130).
오랫동안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주위에 있으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 벼리에게는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본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이었다. 마음먹고 보지 않고는 못 보는 책들. [자본론]은 학부 휴학 상태에서 대구 경북대 도서관에 한 달여 틀어박혀 지내면서 보았었는데, 이 책은 오히려 매우 바쁜 요즘의 일상 속에서 급작스럽게 독서욕을 일깨우면서 다가왔다.
96년에 1판 1쇄고 내가 구한 책이 2002년 1판 16쇄니까, 다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어지간히 많이들 읽었을 것이다.
이 두 책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둘 다 어떤 '파괴'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체질상 쾌락주의자인데다가, 남이 우울해하거나 심각해하면 농담부터 던져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하는 요상한 성벽이 있어서일까? 아무튼 그랬다.
작가는 현대적 증후로 세 가지를 든다. 죽음과 섹스와 나르시시즘. 이 소설에서 주로 부각되는 것은 그 중에서 죽음이다. 그에 맞게, 작품 중 '나'는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자살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에 필요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살이 끝나면, 여행을 떠나고, 그들이 자살하기까지의 짦은 생을 소설화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둘이다. 유디트(세연)와 미미. 그리고 다른 인물, C와 그의 동생 K, '나'가 비엔나 여행중 만난 홍콩 여인 '그녀'.
이들에게 삶은 죽음보다 덜한 고통이 아니다. 그와 함께, 자의식은 매번 추락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을 교란한다. 죽음과 평행한 삶. 이 중 어느 하나가 유난히 강조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삶과 죽음을 대척점으로 놓고 삶을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찬양의 합리화를 통해서 삶에 고착될 수밖에 없다.
"불멸? 불멸이 어때서요?"(114)라고 C는 미미에게 반문한다. 그와 같이 삶을 정당화하는 논법은 자주 변명조가 되기 쉽다. 왜냐하면, 죽음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도에 있어서 죽음은 삶에 못지 않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제, 죽음을 긍정하자. 그렇게 되면 삶의 모든 비의가 그 신성성을 잃어버리고, 헐벗은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다가설 것이다. 이때, 섹스는 위태로운 자의식과 함께 한가한 게임이거나 자신만의 쾌락 이외의 어떤 중요한 삶의 부분이 아니다. 폭설이 내리는 한계령 국도 차 안에서 유디트는 C를 옆에 두고서 자위를 한다. 둘이 하든 혼자 하든 다를 게 없다. 쾌락의 강도가 여기서는 독백적이며,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차이'로 나타난다. 육체는 그러한 타자와의 현격한 거리를 감당할 수 있다. 육체는 개체의 증명이며, 가장 명증한 쾌락의 장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클림트의 유화 《유디트》와 다비드의 《마라》그리고, 드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만나는 지점은 이곳이다. 냉정함. 삶의 비의를 벗겨내면 그 삶에 대해 냉정할 수 있다. 그 비의가 죽음이었으니, 더 이상 경외하거나 찬송하지 않아도 된다. 마라의 평화로움은 사르다나팔이 목격한 경악스러운 살인 장면, 그리고 유디트의 쾌락을 거쳐 완성될 것이다.
유디트의 죽음은 그래서 C에게 어떤 슬픔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C가 경악하는 것은 오히려 미미의 퍼포먼스다. 애초에 C에게 예술은 삶을 탈색시키는 과정이며 비디오 아트의 사각 브라운관 속에 오브제를 냉정하게 배치하거나 박제하는 작업이며, '불멸'이다. 그러나, 미미는 다르다.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113-114). 정작 죽음에 길들여진 것은 미미가 아니라 C인 것이다. 미미의 퍼포먼스가 경악스러운 것은 그것이 "찰나의 현존"(68)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C에게 더욱 가깝다. 죽음에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비디오 작업은 그 자체로 죽음이며, 미미는 그것을 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미미는 찰나의 현존을 버린다. 비디오가 상연된다는 것. 그 속에 스스로가 기입된다는 것. 그 사실로 이미 미미는 죽었다. 이후 그녀의 자살이 매우 건조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우리의 자화상은 C다. 애써 죽음을 부정하려는 몸짓은 어딘지 어색하며, 소부르주아적이며, 무관심하다. 유디트의 죽음에 K가 드러내는 감정에 대해 C는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134) 정도로 대답한다. C와 그의 작품 모두는 K에게 그래서 "구역질이 나"(134)는 것이다. 당연하다. 이런 걸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구역질을 느껴야 한다. 죽음에 길들여진 군상으로서 죽음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헛된 짓인가.
반면, 죽음과 친숙한 실존으로서 우리는 그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약간의 고통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유디트와 미미를 설득한다. 잠재적 존재로서의 죽음이 현실화되는 것은 일종의 흥미진진한 모험일 수 있다. 그 길로 가는 것. '나'는 의뢰인들에게 C의 적당한 위선을 경멸하고, 적절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의식을 확인하는 그 길로 가라고 유혹한다. 작가의 말대로 죽음을 선택할 만한 필요조건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진 것이 현대라면, '나'는 거기에 '유혹'이라는 충분조건을 건네준다. 허약한 자의식은 유혹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은 영원히 은폐되고, 삶의 진실도 그와 함께 방치된다. 여기, 선택의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진실이 중요한 인간들은 죽음을 선택하는가? 손목을 긋거나,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거나, 청산가리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선명한 선택이다. 그러나, 벼리는 이렇게 되묻는다. '죽음'이 그렇게 현실화되어야만 우리에게 명확한가? 잠재적인 죽음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가깝다. 우리가 선택한 그 죽음의 순간, 그 찰나의 현존은 우리에게 와닿자마자 사라진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잠재적인 유물론자들인 우리. 느껴지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무능력이 곧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정당화는 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삶의 친구로서 죽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굳이 손목을 그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미미는 좀더 C를 다그치거나, 삶을 공연함으로써 경악에 길들여야 했다. 죽음은 진실이지만, 그 진실은 삶의 무대에서는 공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불러 들일 수 있으며, 그 '앞에서' 삶의 무대를 펼쳐 보일 수는 있다.
유디트와 미미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음으로 이어져 있다. 삶의 무대가 사라져 가는 지점. 애초에 그들이 선택했던 죽음이 현실화되자마자, 삶의 현존이 사라진다. 진실을 맛보기 위해 영혼을 팔았으나, 악마는 영혼과 함께 육체마저 거두어 간다. 공정한 교환이 아닌 거다. 속은 거다.
곧장 달리지 마라. 죽음의 면전에서 차라리 쓰러져라.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는 삶은 진실하다. 그러나, 유혹에 견디려면 좀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죽음의 유혹 앞에서 뻔뻔스러워 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죽음의 면전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자. 쓰러지는 쪽으로 힘차게 페달을 밟다가,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죽음 앞에서 멈추고 빤히 바라보며 웃어 보기. 그러니, 차라리 그 앞에서 쓰러지기를 반복하자. 상처가 많은 삶이겠지만, 위선적이지도, 또한 허약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쾌한 장난. 죽음 앞에서 웃음짓기. 쾌락주의자의 눈에 죽음은 위악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친근하며, 장난 걸만한 존재다. '나'는 매우 곤혹스러울 게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무(無)인 죽음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죽음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Epicurus
written by noma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