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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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론과 주체성 Empirism et subjectivit 』(1952) 이후 들뢰즈는 긴 철학적 잠행에 들어간다. 그 10년의 기간을 그는 "머리를 벽에 그만 짓찧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와 철학 Nietzsche et la Philosophie』(1962)은 들뢰즈의 철학적 궁지를 온전히 표현하면서 그것의 극복까지 논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의 아포리는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그가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 그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헤겔주의는 이 의문의 중심에 있다.

일군의 헤겔주의자들은 이 문제적 저작을 통해 들뢰즈의 상당한 지적 성취와 독자성을 폄훼하면서, 니체와 더불어 참으로 정직하게도, '부정'의 범주 속에 그를 놓아 둔다. 하여간, 헤겔식의 안티테제가 출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밖의 점잖은 대응은 이들 둘 모두에게 불쾌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니체가 또는 들뢰즈가 취급당해야 할 영역은 헤겔류의 노예적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의 놀이가 횡행하는 탈구조주의의 고원에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헤겔주의자들은 가만히 있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짓하는 것은 저녁이 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이들에게 철학은 그같이 소멸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석양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초과하는 정오 또는 자정의 사유로서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들뢰즈의 철학적 도제수업에서 니체가 가지는 비중은 스피노자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들뢰즈에 의하면, <권력감정 sentiment de puissance>(122)을 그 내밀한 요소로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pouvoir>(121)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니체에게서의 스피노자적 영감을 부정하기 어렵다.>(122) 이러한 직관은 후에 그의 박사학위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Spinoza et le problme de l'expression』(1968)에서의 코나투스(Conatus)에 대한 해석에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니체 자신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의 거의 모든 철학들에 대한 '반시대적' 열정에 몰두하던 그가 '놀라운 친밀감'을 느꼈다고 술회하는 저작은 다름 아닌 『에티카 Ethica』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친밀감의 근원은 '권력/힘'이라는 개념에 있는 것이고, 당연히 들뢰즈의 니체는 그것을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힘', 그리고,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그만큼 낯선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나치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오해, 중대한 오해는 나치즘이 창궐하는 그 시간에 니체철학이 충분히 잘 '활용'되고 있었고, 그 효과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반유대주의라는 오명을 먼저 걷어내자. <사람들은 반(反)유대주의자이면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프리취 Fritsch에게 그가 썼던 것을 상기하지 않고서는 니체의 유태교에 대한 페이지들을 읽을 수는 없다: "나는 당신의 출판물들을 내게 더 이상 보내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 바이오. 나는 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소".>(227-8) 그렇다면, 이러한 니체의 언급이 평가될 수 있는 철학적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에게 권력, 또는 힘은 반유대주의 나치즘의 '활용' 대상이 아니다. 나치와 우리가 공유하는 오해는 힘의 요소에 대한 '표상화'와 관련된다. 힘은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지를 그 미분적 요소로 포함하고 있는 현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일한 권력 중심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힘들'이다. 상식적 왜곡은 <표상하고, 표상되고, 자신을 표상하도록 만드는 광기, 그래서 표상하는 것과 표상된 것을 소유하려는 광기>(152)에서 나온다. 가장 잔혹한 형태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힘들은 권력의지의 미분적 표현이며 차이를 향유하는 실천적 성격을 가진다. 왜 그런가? 힘들이 표상이 아니라,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기를 원하는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들뢰즈는 그의 니체 이해의 기간을 형성하는 두 가지 개념쌍을 제시한다. 즉, 힘과 권력의지는 다음의 두 성질을 가진다. ① 적극적(actif)-반응적(reactif),  ② 긍정적(positif)-부정적(negatif). 전자의 개념은 힘의 원초적 성질이며, 후자는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이다. 힘과 권력의지는 이러한 서로간의 성질들을 교환하고 지탱하면서 힘의 유형학(주인-노예)과 계보학(권력의지-영원회귀)을 이룬다. <왜냐하면, 긍정은 작용이 아니지만, 적극적 생성의 잠재력, 적극적 생성의 화신이며, 부정은 단순한 반작용이 아니지만, 반응적 생성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것들은 힘들의 씨실로 생성의 고리를 만든다. 바로 긍정은 우리에게 디오니소스의 영예로운 세계, 생성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바로 부정은 우리를 반응적 힘들이 그로부터 나오는 염려스러운 토대 속으로 떨어뜨린다.>(109-10) 따라서, 들뢰즈의 니체가 기획하는 철학은 궁극적으로 긍정적 권력의지를 극대화함으로써 부정적 권력의지, 즉 허무주의를 파괴하는 데 있다. 이러한 파괴의 기획은 영원회귀를 통해 가능하다. 권력의지가 긍정성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그 자신의 영원회귀를 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응적 힘을 적극적 힘의 명령 아래 두고 그것의 영원회귀를 결단하는 것. 그러한 의지는 주체가 기존의 것으로 향유하던 가치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에 들뢰즈의 니체가 가지는 또 다른 독특한 성격이 놓여져 있다. 다시 말해,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때, 기존의 가치들은 '차이의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 나는 것이 돌아 오기 위해서는 힘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것에 반응적이 되거나, 부정을 통해 동일자로 회귀하지 않으며, 항상 생성하고 긍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회귀란 표현을 동일자의 회귀로 이해할 때는 항상 오해를 낳는다. 되돌아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그것이 자신을 생성으로, 지나가는 것으로 긍정하는 한에서 존재를 구성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하나가 아니지만, 되돌아옴 그 자체는 자신을 차별자로, 다수로 긍정하는 하나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회귀 속의 동일성은 되돌아오는 것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차이나는 것을 위해 되돌아오는 상태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종합으로 즉 시간과 그것의 차원들의 종합, 다른 것과 그것의 재생산과의 종합, 생성과 자신을 생성으로 긍정하는 존재의 종합, 이중적 긍정의 종합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102). '동일자의 회귀'는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다. 여기서 동일자는 알다시피 '힘'이지만, 그것은 '차이나는 힘들'이다. 권력의지란 이러한 영원회귀의 원리가 된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성격을 '차이와 반복'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헤겔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자와 반테제 그리고 종합이라는 정식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차이나는 것들의 영원회귀는 종합을 알지만, 그 종합은 차이를 지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들 속에는 지배와 피지배가 있으며, 우연을 긍정하는 주사위 놀이가 있다. 차라리,  변증법은 이러한 현실적인 차이들의 반영이며, 그것도 악화된 추상적 반영일 것이다. 게다가, 차이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는 변증법은 마땅히 기존 가치의 옹호자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최악의 발전된 형태를 스탈린주의 Diamat를 통해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맑스가 헤겔을 발로 걷게 한 것은 잘 한 것이었지만, 변증법 자체를 발로 걷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들뢰즈는 니체를 경유하여 맑스를 조감하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전략은 구체제의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매우 급진적으로 벼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니체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 그것은 존재론적 아포리를 해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아포리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매우 정당하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들뢰즈가 니체와 함께 헤겔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노래'하게(『천 개의 고원』) 하는 것은 차이의 놀이를 급진주의(radicalism)의 함성으로 던져 놓기 위함일 것이다. 몇 년 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공명하는 차이나는 집단들의 혁명'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68년 낭떼르에서부터 말이다. 따라서, 이 10년 간의 잠행의 결과물이 앞으로 올 100년 간의 혁명적 표현의 '서광'으로 읽힐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결례가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경의의 표현이 될 것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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