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는 죽었는가 (양장)
강영안 지음 / 문예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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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대 이후 서양철학은 '주체(Subject)'를 실체화하거나 부수화하면서 이어져 왔다. 그런 면에서 서양철학은 데카르트의 아우라 안에서 사유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 전통은 니체와 프로이트 이후 급격한 위기 상황을 노정한다. 니체는 적극적으로 반데카르트주의를 외치며, '신의 죽음'과 함께, 주체를 유령화시켰다. 신은 곧 주체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단지 독일 관념론만이 주체를 이론적 명증성의 보증자에서 '절대이성'(Hegel), '절대자아'(Schelling) 등으로 비로소 실체화했다. 프로이트가 시도한 것은 꽤나 점잖은 편이었지만, 엄숙자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것의 동일성(identification)을 가지고 견고한 이성적 합리주의를 떠받치고자하는 야심찬 시도를 성공시켰지만, 그 스스로 이성의 도그마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효과가 되었다. 이성은 반이성, 즉 욕망(desire)보다 위에 있지 않다. 게다가 유명한 자아동일성도 그 이성의 합리적 토대라는 요구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초자아의 명령일 뿐이다. 프로이트의 정식은 데카르트 이후 구축되어온 칸트적 전통과 독일 관념론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체계의 철학들을 미심쩍고도 우스꽝스런 스캔들로 만들어 버렸다.

가령, 사티로스가 실재한다면, 현대적 주체는 그 종족을 내면의 조상으로 여겨야할 지경이 되었다. 도대체 주체라는 것이 실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흄이 데카르트를 최초로 의심한 이래로 주체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중세의 마녀재판을 불러 오기라도 하는 듯한 공포를 자아내곤 했다. 모든 이성의 체계와 정당화가 거기 달려 있었다. 앞서 말한 두 명민한 인물 이후에 사람들은 이 마녀 재판 따위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아동일성은 여러 각도에서 다시 되살아나곤 했지만, 마치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나타나거나, 아니면 자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등장하곤 했다. 전자의 경우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일 것이고, 후자는 싸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훗설을 비롯한 현상학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주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를 보증하는가? 장자의 나비처럼 덧없는 것이 생이라면, 우리는 이 현실의 고통을 그저 환상이라고 말하면서 견뎌야 하는가? 게다가 나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각기 다른 사회적 상황, 계급적 상황에 있으며, 각자는 고통의 강도가 다른 삶을 산다. 생이, 주체가 덧없다고 해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타자의 굶주림과 느닷없는 죽음과 계급적 착취를 두고 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럴 때, 주체의 부재는 윤리적 삶을 황폐화시킬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이며, 냉소다.

강영안 교수는 이 책의 모두에 해당하는 논문에서 주체부재로 인한 현대철학의 윤리적 상황을 명상서적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서 읽어낸다.  

"사람들은 삶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알고 싶지만 어떤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가 시원스레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명상서적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정신적 만족을 기대한다. 명상서적의 메시지가 삶에 구체적으로 옮겨지지 않은채 생각의 차원에서 머물 수 있지만, 이런 유의 책에 많은 사람들이 빠지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갈증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p. 70)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들의 명상서적에 대한 관심과 탈속한 삶에 대한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사회적 정황과 정신적 공황은 맞물려 있다. '대중의 갈증'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사적, 정신사적 성과들을 하루 아침에 살해하고자 하는 외디푸스적 욕망을 일시에 해소시켜 줌으로써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 인용되고 강영안 교수의 주체탐구의 반성적 지침이 되는 아그네스 헬러의 한 구절을 옮겨 보자.

"어떤 사람을 땅에 파묻기 전에 먼저 그가 누군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장례 직후에 다시 시체를 끄집어 내는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철학도들은 이제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체'라고 불리는 것 혹은 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부검을 실시해보지 않았다"(Agnes Heller, Can Modernity Survive?, Cambridge: Polity Press, 1990, 61쪽, p.74에서 재인용).

주체라는 '시체'의 신원확인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사망신고를 하기 전에 우리는 '주체'의 행적을 더듬어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철학도로서의 학적 양심이 그렇게 만든다. 강영안 교수는 자신의 이 책을 그런 관점에서 보아 주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영안 교수에게 '주체'는 또 어떤 것일까? 실재로 그의 사상 안에서 주체는 이미 시체 공시소로 보내진 것일까? 벼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말해둔다. 강영안 교수에게 '주체'는 레비나스의 '무한성'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사상적 궤적은 강영안 교수도 인지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책 전체를 통틀어 저자의 입장을 가장 잘 요약하는 구절은 물론 서론에 있다.

"객관주의 비판이 절대화될 때 우리는 어떠한 인식 기준도, 준거틀도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고 주관주의 비판을 절대화할 때 객관주의에 빠지거나 또는 극단적 반휴머니즘에 빠질 수 있다. ...... 이제 그것을 반성하는 포스트 모던의 상대주의와 반휴머니즘은 비관주의적, 허무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에도 강한 오만이 도사리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만과 절망, 그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을 높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낮추지도 않으면서 인간에게 제격에 알맞는 자리를 줄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펼쳐나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p. 34).

그러므로, 주체는 여기서 '인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남는다. 폴라니를 논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이 '인격'이라는 개념은 철학의 객관주의적 극편향인 반휴머니즘의 제동장치다. 강영안 교수가 보기에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는 폴라니를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폴라니와 함께 가장 중요하게 인용되는 철학자는 레비나스다. 레비나스는 이 책 전체의 결론처럼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레비나스의 '무한성'과 타자의 '환대(hospitality)'라는 개념은 절대화된 주체의 걍팍성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와 타자의 인정 그리고, 주체의 온전한 보전이라는 윤리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해서, 벼리가 보기에 강영안 교수의 결론은 매우 온건하다. 레비나스의 대안이 형이상학의 사정거리 안에 사회철학적 '주체'를 놓아두고 관망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이 맑스의 계급론을 경제주의의 사정거리 안에 두고 보는 것과 흡사해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강영안 교수가 소개하는 레비나스에게는 '굶주린 과부와 고아'에 대한 주체의 '열림'은 있을지라도 그 굶주림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나, 계급적 관점이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면 아주 손쉽게 가로질러 갔을 그 주제 말이다.

그러나, 이 책 전체는 강영안 교수나 그가 결론으로 삼은 것처럼 보이는 레비나스의 관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장마다 우리는 근대철학 이후 주체철학의 계보와 그것이 비판받는 지점을 참으로 명쾌하게 읽을 수 있다. 데카르트 코기토의 성찰 2와 3에 나타난 구별(2장), 셀링과 독일 관념론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절대화하는 과정(3장), 니체와 키에르케고어에 의해 비판받는 헤겔철학과 주체성(4장), 현대철학의 주체문제(5장, 6장, 7장), 주체의 해체와 형이상학의 종말(8장).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현대적 정신의 주체성 혼란과 관련한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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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흙집일기
전남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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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큰 결심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광주 충장 서점에서 [어느 시인의 흙집 일기](전남진, 중앙 M&B, 2003)를 보고 느낀 첫번째 소회다. 서점 문학 코너에 서서 책장을 넘기면서 난 참 오랜만의 시샘 같은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올라 옮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어 보았으면 하는 시샘말이다.

책에는 페이지 페이지 마다 집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 사진들은 집 만이 아니라 가시막골 그의 일가와 이웃들의 흙내 나는 사진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곧 흙이고 그가 흙으로 빚는 집이 곧 사람이다!

나도 1994년이던가 그를 따라 가시막골을 갔었다. 층층이 산을 타고 오른 논들 어귀에 자그마한 집이 있었고,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가죽나물을 정성껏 버무려 찬으로 낸 밥상을 참 맛나게도 먹었다. 난 그가 앞마당에 있던 가죽나무를 만지며 설명해 주던 그 말뽄 그대로 나중에 후배들에게도 그 나무얘기를 내 것인양(?) 해 주었더랬다. 밤에는 가시막골 흙내나는 세간살이 위로 정말 무진장 빛나는 별무더기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다음날은 서툰 손으로 할아버님의 논일을 거들었었다.

삶에 흐린 날들이란 어떤 것일까? 직장이나 돈, 또는 차가 없는 삶인가? 그런 것을 현실적인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태만하다. 현실은 그런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태만한 자기 만족 속에 있는 그러한 욕망의 부산물들이야말로 흐린날을 만든다.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그만한 고통을 또한 덤으로 얻는 것은 그가 가진 태만함에 대한 현실의 복수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현실적인 삶은 흙을 빚는 '정성'에 있다. 거기서 오는 슬픔과 가지런한 눈물이 복되고 현실적이다. 헛된 것만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은 끝내 손에 간지르르하게 만져지는 흙의 감촉을 잊고야 말 것이다. 삶의 감각을 제 손으로 잘라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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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의 꿈 - 피닉스 문예 2 피닉스문예 2
김하경 지음 / 갈무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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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바다로 간다. 산란을 하러 온 사람들은 거기서 한때의 꿈을 방류하고 갈 것이다. 살다보면 제 자식들을 놓아 두고 온 그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다. 김하경의 소설 <숭어의 꿈>은 그렇게 방류한 꿈에 대한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한때'의 일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매력을 금새 잃어 버리고 말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p13)

일탈은 다시 반복된다. 숭어라는 물고기가 그러하다. 초겨울이 시작될 때쯤 그녀들은 은빛 뱃살에 제 자식들을 가득 품고서 민물에서 바다로 간다. 그리고 물길 찰랑이는 바위너설 근처에 산란을 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막 알을 밴 그녀들을 기다리는 낚시꾼들의 미끼가 연안 여기저기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숭어는 미끼를 물지 않는다'. 그물로도 그녀들을 잡기는 용이치 않다.

'그나마 배 두 척이 양 쪽에서 그물을 던져 삥 둘러싸고 막대기로 막 휘젖고 억수로 시끄럽게 소리를 내마 숭어가 겁이나 소리 나는 반대쪽으로 몰려다니다 그물 안으로 걸려든다 이기라.' (p35)

작가가 얘기하는 주인공들은 이렇게 일탈의 한가운데서 낚시꾼들과 한 판 드잡이하기도 하고, 뒤돌아서서 울분을 삭이기도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는 우리가 시위 현장에서 느끼는 격앙된 감정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울리는 조용한 함성에 더 가깝다. '밭은 기침을 하면서 이불을 더욱더 힘껏 잡아당'(p108)기는 세상의 모든 해고자들은 이 소설 안에서 그러한 조용한 함성의 때묻지 않는 현실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절절한 것은 그 벗은 현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이 소설의 복수인지도 모른다. 내면으로 다가오는 여기 한 떼의 숭어들은 우리 가슴 언저리에 몰려 왔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사라져 간다. 내년 초겨울 그녀들은 다시 올 것이다. 아니, 언제나 우리와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일탈의 힘으로 말이다.

비로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삶이 이러한 평범한 것들의 약동과 솟구침이 아니라면 의미없다는 것이다.우리가 쾌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요한 바다에서 각자 숭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쾌할함이 작가에게는 처음에는 가슴 아릿하게, 그리고 문득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 왔다. 무관심과 '슬픔, 분노, 절규'또는 죽음조차 넘어서는 노동의 활력이 거기 있다.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p14)

그물에 걸려 이미 횟감이 되거나, 비늘 여기저기 생채기 붉게 드러난 사람들을 여기서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우리의 '빗나간 예상'을 미리 숙고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술이나 한 잔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축제에 어울리라고, 이 넓은 노동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느러미 힘차게 뛰어 올라 보자고 말한다. 어깨 툭 치며,

'원래 뛰는 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는 법이다. 알긋나?'(p35)

암, 알고 말고다. 누구나 '빛나는 삶의 한 순간'(p16)이 있다. 그것들이 세세년년마다 모인다. 달빛 교교한 바다, 은빛 빛무리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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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하다 문학동네 시집 63
전남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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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진의 글에는 친근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그것들에 대한 쓸쓸함이 가슴 가득 묻어 있다. 다가가지 못하는 슬픔, 그러나 내밀한 곳에서 작가는 그런 사물들과 사람들을 바라본다. 내성이 깊어져서 타자에 닿는 모습이랄까. 그러므로, 시인의 글은 달리 어쩔 수 없는 감성이 잔잔히, 때로는 격렬하게 파도친다. '내가 거기 가 닿으리라' 그러면, 시인이 가 닿는 섬 어디에 우리는 함께 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모로 누워 장난 치며, 낄낄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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