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경험론
F. C. 코플스턴 지음, 이재영 옮김 / 서광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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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표준적인 저작이라면 코플스톤의 철학사를 꼽을 수 있다. 현재 3권의 르네상스 철학과 9권의 현대철학(맨 드비랑부터 사르트르까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번역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영어로 봐도 이해가 쉽게 된다. 그만큼 문체가 평이하고, 독자에 대한 배려가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한 부분을 임의로 건너뛰지도 않으며, 부박한 예들을 통해 개념의 원뜻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코플스톤은 사제적인 엄밀함과 성실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거의 모든 철학사의 개념들을 통시적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경험론]은 전체 철학사 중 5권에 해당되는 The British Philosophy: Hobbes to Hume의 번역이다. 91년에 번역되었고 2010년에 6쇄가 나왔으니, 꾸준히 읽히는 책인 셈이다. 아카데믹한 철학전문 출판사인 서광사와 경험론 전공자인 이재영 선생의 번역이므로 가독력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책이다.

다만 무릇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측면을 짚어야 한다. 즉 아무리 좋은 철학사 책이라 하더라도 원전에 비길바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철학사는 그 저자의 철학사상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철학사를 읽을 때에는 '서문'(이 책의 경우는 앞권인 4권[합리론]의 서문)에서 밝히는 사상적 관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서 코플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철학은 철학이 신학의 시녀 역할에서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아직 과학의 파출부가 되지는 않은 상태이다"(31)

다시 말해 코플스톤에게 근대철학(합리론을 포함하여)은 중세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과학의 성과에 대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상업도시 근교의 수도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사에서 '단절'이나 '혁명'보다, '점진적 변화'와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코플스톤은 고대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룰 때에도 그간에 두 철학자 간에 강조되었던 '단절'의 측면이 가진 부당성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전제 하에, 아주 온건하게 진행되는 지성의 역사를 우리에게 펼쳐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는 철학적 혁명이나 불연속성이 가진 깊은 요동을 간과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 컨텍스트, 즉 사회정치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지나가면서 잠시 언급되거나 생략된다. 요컨대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이 지나쳐버린 측면들을 보완할 유물론의 철학사(또는 철학사의 유물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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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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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흐의 미덕은 역사 속에서 지속되는 유토피아의 상에 대한 그의 집념에 있다. 이러한 집념은 청년 헤겔주의자이자, 맑스주의자로서 그가 늘 견지하는 이론적 방법론으로부터 유래한다. 사실 블로흐의 유토피아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폐기처리된 어떤 유령에 신체의 옷을 입히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텍스트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강신굿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방법은 곧 그의 '신념'이기도 한것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포스트 맑시즘의 시각에서 이 신념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우 유용할지 모르지만, 이론의 당대성과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루하다고 공격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블로흐의 이 책은 철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매번 간과하고 마는 '당대성 자체' 다시 말해, 지성사가 아니라 당대성 속에서의 지식이라는 유물론적 철저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철학적 업적들을 경제사에 끼워 맞추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아주 담담하게 지성사는 곧 혁명사며, 그것이 계급적 변혁 또는 변혁의 시도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될 때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독자에게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가 아니라 '철학강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전공자라면 흔히 코플스톤의 철학사 시리즈를 철학사 공부의 대계인양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은 매우 편협한 것이다. 철학사는 곧 철학사상이다. 따라서 코플스톤의 철학사는 그의 철학사상일 뿐 철학사의 캐논이 될 수 없다. 철학 자체에서 '정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철학사라는 지적 발췌와 편집이 필수적 과정인 책에서 그러한 규정은 더 가당치 않다. 사실 누구나 철학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철학사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기술적으로 간명해야 하지만, 저자 자신의 관점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분명한 어조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득력'일 것이다. 논리적인 설득력은 글쓰기의 잔재주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과 자신의 관점에 대한 농익은 반성의 결과 생겨날 수 있다. 블로흐의 이 철학사는 그런 점에서도 탁월하다.

중세 말의 암울함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인 혁명적 사고를 불어 넣었다. 이른바 혁명적 평신도 사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유럽 지역의 농민 운동을 지지했는데, 그중 독일 농민전쟁은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과 재세례파,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은 하나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중세 평신도 운동과 신비주의는 아카데믹한 철학사에서 잘 기술되지 않는(어쩌면 전혀 기술되지 않는) 역사다. 하지만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 사조에 속한 인물들은 대개 평민출신들이다. 즉 교회에 속하거나, 교회에 대한 일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등장한 것은 중세의 피폐한 생활환경과 빈번한 폭동이 그 배경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메시아이면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아니라 자신이 내면의 신앙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성당의 어떤 중개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계시다. (...) 그리스도의 원수는 성직자들이다. (...) 이들은 왕, 제후, 착취자, 우리를 부려먹고 찢어 먹는 자들의 명령에 복종한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내면의 정신, 열광적 정신이다. 이러한 열광적 정신은 성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단종파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 대학에서는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벤투라, 둔스스코투스, 오컴이 가르쳐지고 있었다.
이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일단의 평민들과 혁명적 종교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중 야콥 뵈메가 가장 특출났다.

당시 주류 교회와 이단적 종파간의 대립에서 유의해서 봐야할 점은 바로 `자연법`에 대한 견해 차이다. 주류 가톨릭 교회는 상대적 자연법만을 인정하였다. 본래의 자연법은 인간에 의해 타락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하지만 이단종파들은 절대적 자연법을 인정한다. 이들에게 이 자연법은 천국의 법이며, 앞으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 상태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상태며, 공산주의적인 삶이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신비주의`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가린다는 `내부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어떤 것이 드러난다는 `외부적` 의미이다. 전자는 반동적인 권력사상으로 나아가며, 후자는 평신도 운동과 유사한 민중운동으로 나아간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이 가진 혁신적이면서도 이단적인 부분은 바로 신과 인간이 서로 조력한다는 주장이다. 신과 인간은 서로의 진정한 삶과 영혼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신의 창조론을 완전히 전복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을 신이 자신이 형상대로 만든 것처럼, 신은 인간의 형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된다. 그에 따르면 `신은 함께하는 깨달음 안에서 인간을 태어난다`
"인간이 곧 신이다" -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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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인권들 - 정치의 원점과 인권의 영속혁명 트랜스 소시올로지 19
정정훈 지음 / 그린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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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천적 지평 위에 쓰여진 이념의 기록이다.

모든 서평은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의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하나의 주제가 얼마나 많은 지평들을 생성시킬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평이라는 평범하고 지루한 작업이 기쁨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경로를 거쳐서라도 그 세계와의 교전(encounter)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야 서평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특유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텍스트와 독자, 저자가 모두 변형(metamorphosis)되는 그 사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텍스트 자체가 이런저런 실험의 결과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텍스트를 통해서는 어떤 지평도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급진적인(radical, 뿌리까지 가 닿는) 질문도, 어떤 특유한 ()’, 요컨대 어떤 지평융합도 생겨날 수 없다.

정정훈의 이 책은 그런 방면에서 대지와 같은 지평을 선사한다. 그 장소는 어쩌면 저자가 상정한 대문자 인권(HUMAN RIGHT, 절대적 인권)이 머무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인권(저자의 방식대로 절대적 인권은 이제부터 볼드체로 표시한다)은 단순히 정치철학의 고전들을 탐독하고, 그것으로부터 해석을 이끌어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 자신이 많은 실천들을 해 왔고, 현장에서 어떻게 인권이 아우성치는지를 직접 감각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러한 실천이 가져다주는 대지는 반드시 필자의 지역적 맥락에서 보편화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 그가 대개의 장을 시작하는 그 부분에는 반드시 어디언제와 또 가장 중요하게도 사건이 기입된다. 용산 참사의 현장이든, 밀양의 숲길이든, 제주 강정 구럼비든 ... 그래서 그 모든 장소들이 바로 절대적 인권이라는 이념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곧 텍스트의 지평을 형성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장소에서,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장에서 인권이 어떻게 물질화되어야 하는지를 지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권의 정치는 반체제-이론-감성의 정치.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론이란 이런 식으로 물질화 과정을 거쳤을 때 진정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법이다. 그리고 이 대지가 마련되고 나서야 독자는 텍스트의 충실성의 온도를 그 이론적 차원에서 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저자가 이 책을 휘말림의 기록이라고 미리 전제할 때(5), 나는 휘말림을 촉발인 동시에, 느닷없는 초대로부터 비롯되는 비의지적인 변형을 초래하는 힘(역능)으로 파악한다. 최초의 변형은 인권이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이다(7). 이후로 행동과 사유의 방향은 언제나 이쪽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저자가 인권을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추방한다고 여기는 두 사람, 즉 아렌트와 아감벤은 저자가 애초에 출발했던 그 대지에서 만날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와 권력이 동일화될 때 인권은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게 만드는 인물들이며(158), 이럴 경우 인권이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역능은 애초에 권력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권의 정치가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비판해야 한다.

또 하나의 비판지점은 인권을 도덕적 차원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인권이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으로 환원되면 그것의 자연권적 측면이 강조됨으로써, 변화된 현실 속으로 그것을 구현하고, 주장하며, 투쟁하는 역동적 형상이 제거되어 버린다. 이 정치적 주장과 투쟁의 맥락이 있기에, 당연히 인권은 또한 국가제도적인 차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전략적으로 수행되는 인권의 정치, 또는 정치적 인권은 현재 한국 사회 속에서 세 가지 계기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라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그것과 결부된 시큐리티[안전] 통치방식 인권담론의 약화와 그 이론적 위기 공감능력, 즉 인권감수성을 후퇴시키는 시큐리티 통치의 감성의 분할”(63-64). 저자는 이 세 가지 계기를 어떤 식으로 혁파해 나갈 것인가를 차례차례 제시한다. 요컨대 그것은 세 가지 인권의 정치를 구성한다. 반체제의 정치’, ‘이론의 정치’, ‘감성의 정치가 그것이다(64).

 

파리 꼬뮌에서 호모 사케르까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여기서부터 빛을 발한다. 저자 정정훈은 곧장 자신이 주장하는 이 정치의 세 형상을 철학적 차원에서 추상화하지 않고, 다시 실천의 대지그 시작점으로 되돌린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871년의 파리꼬뮌에 이르기까지의 그 기간은 유럽에서 인권의 형상이 어떻게 변모되어왔으며, 그것이 어떻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저자는 이 시기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재해석,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전통적 규정이 아니라 여러 혁명들의 뒤섞임이라는 전진적인 해석을 통해 재정치화한다(2). 이 끊임없는 재정치화, 탈영토화, 대지로의 회귀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생성되는 사유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론에 대한 성찰은 역사적-실천적 성찰 이후에 검토된다(3). 사실상 이 이론적 논의들은 인권을 도덕도 제도도 아닌 정치의 차원에서 논하고자 하는 저자의 욕망에 비추어 봤을 때 상당히 긴 우회로를 거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정치철학자들(맑스, 아렌트, 아감벤, 바디우)은 결국 랑시에르의 이론으로 귀착되는 듯 보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아벤티누스 언덕의 커머너스(commoners, plebis, 평민들)들은 실제로 한국사회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말 그대로 시민’, ‘평민으로 재맥락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실천!(4) 여기서 정치적 주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처럼 인권이라는 동일한 대지’(실체)에 뿌리 내린 양태들, 그리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주장하고 투쟁하는 그 시민과 평민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5).

 

인권-정치의 원점, ‘절대적 잔여

마지막으로 저자가 향하는 실천-이론적 지점은 ‘()가능한 권리라는 영역이다. 여기서 인권은 진정한 보편성의 차원을 획득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의 보편적 가치는, 그것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하고, 현대 국가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저자가 인정하는 구절들에서 완전히 무화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기, 사유의 모험이 감행된다. “하지만 보편성의 허구적 성격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무의미함과 부당성으로 귀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렇게 되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보편성의 이러한 실현 불가능성이야말로 보편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그것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역설적근거와 같은 것이 아닐까?”(256) 이 질문은 애초에 우리가 급진적인 질문이라고 했던 그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제 특유한 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해들은 하지만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것은 드러날 수 있는데, 첫째로 현행성’(actuality)잠재성’(virtuality)의 장을 나누고 인권의 절대적 형상을 잠재성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둘째로 이제 앞서 말한 허구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권의 불운을 애도하면서 그 자신의 죽음을 끝없이 미루어 놓는 것이다. 저자는 전자의 선택지를 뽑는다. 그리고 애도를 통해 죽음을 유예하기보다 투쟁을 통해 절대적 인권(대문자 인권)의 현행화(actualization)영구혁명의 과정으로 고양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영구혁명은 인권의 잠재적인 절대성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행적 인권들은 절대적 인권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제약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267). “그래서 인권과 그것의 현행적 실존 형태들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과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268). 이 간극과 긴장은 말 그대로 인권적인 잔혹극의 플롯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Fatum)처럼 여겨진다. 끝없는 인권의 영구혁명은 그 실천적 지평의 영원한 확장과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위기와 급변들이 이 플롯 안에 녹아 있다. 모든 참상들, 인권적인 홀로코스트들, 일상적인 추악함과 사각지대에 버려진 노인들과 아이들과 장애인들의 외로운 죽음과 또 저기 죽은 고라니들 ... 이 모든 세상의 막대한 악’(tremendous Evil)을 어떻게 감당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것들이 인권의 정치가 인권이 되기 위해 개간해야 할 실천의 황무지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권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가능한 권리, 절대적 이념으로서 인권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정치적 실천이기 때문이다(279). 고집’. 나는 인권의 정치가 가지는 충실성(fidelity)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본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고집은 바로 “()가능한 권리의 잔여들에 대한 (...) 실천이기 때문이다(281). 그래서 이 고집은 늘 정치의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인권의 정치는 바로 정치의 원점이며, 이 원점에서부터 절대적 잔여’(absolute residue)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 영원히 시작된다. 절대적 잔여로서의 인권, 그리고 투쟁의 과정으로서의 실천철학, 이 둘은 충실성의 동일한 두 얼굴이다. -NomadIa-Redbrigade

 

*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대자보]에도 실렸음을 밝힙니다.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4795&section=sc20&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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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김내균 지음 / 교보문고(교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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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 철학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 모든 문헌들과 그에 얽힌 여러 추론들은 가설과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줄곧 제기되는 문헌상의 문제들, 심지어 신화시대와 철학시대를 가르는 기준들에 대한 애매모호성들은 이 시대가 바로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회자되는 문제들을 상당부분 제기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과연 어떤 동기로 사유를 시작했는지(흔히 얘기하듯이 그것이 '삶의 덧없음'으로 인한 것이었는지) 확증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그러한 불확실성들을 자기사유의 힘으로 명확하게 만들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연구자들이 보수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번역'에만 골몰하는 것이 어떤 '미덕'이자 '사유의 치밀함'이라고까지 격상되는 학문적 분위기라면 그러한 시도는 더 소중하며, 권장될 만한 것이다.

 

김내균 선생의 이 책은 그러한 사도의 과단성을 잘 보여준다. 문헌에 대한 꼼꼼한 인용과 권위 있는 2차서들을 활용하면서도 고대 사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무리 없이 논변 안에 녹여 내고 있다. 이것으로 인해 독자는 오직 '단편'들로만 존재하는 자연철학자들과 '전설'로만 떠도는 신화시대의 인물들을 머리속에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절판이 되어 버린 이 책이 고대 사상에 관한 보다 많은 현대적 논의들로 일신되고 확충되어 다시 출판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내균 선생은 연구를 그만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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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9]합리라는 용어는 결국 이치에 합당하다는 말이지만, 그 이치가 필연적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추상적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는 이성적 사유가 고정된 의미를 지닌 개념들에 의한 언어의 의미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유 활동이라면, 합리적 사유는 이성적 사유를 포용하면서도 그 한계, 모순과 대립을 넘어서 역동적인 진리의 보편성, 공통성, 통일성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두 개념을 이와 같이 구별해 사용한다면,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다분히 전자에 속한 사유를 행하였고, 후자는 대체적으로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플라톤 이래 학문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로서의 이성(λογιστιόν: logistikon)은 본래 로고스라는 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로고스의 광의적 의미는 인간의 보편적, 합리적 정신이며, 협의적 의미는 진리와 허위를 판별해 주는 논리적 이성, 오성, 반성적 사유 등을 뜻하는 정신적 개념이다. 플라톤 철학은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되는 철학, 즉 철학의 인간화에 의해서 특징지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는 존재(퓌시스) 중심의 철학을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존재와 유리된 정신적 이성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본래 퓌시스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로고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물질적인 힘과 기운, 혹은 신적인 원리와 법칙 그리고 인간의 사고 등과 같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퓌시스의 한 특성, 즉 질료적 특성을 지닌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20]포함하는 살아 있는 우주의 신성한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초기 철학자들은 신적인 것(τό θείον), 사유적인 것(ό θύμός, ἡ φρἠν) 그리고 질료적 특성(순수한 에테르적인)을 지닌 것(ὁ αἰθήρ)을 로고스라는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았다. 자연철학자들이 추구하였던 아르케는 모두가 정신적 속성이 내재되어 있는 로고스적인 것들이다.

 

[R-Commentary] 김내균이 ‘이성적’과 ‘합리적’을 가르는 기준은 통상적인 어법과는 반대라고 보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 내용단락의 후반부에 진술되다시피, 소크라테스 이후를 ‘인간중심성’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그 기준은 실제로는 헤겔의 영향이 짙게 깔린 것이다. 헤겔의 ‘절대이성’과 그것의 ‘외화’로 퓌시스를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 고대철학의 관점과 동근원적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합리성’은 그 자체로 ‘로고스'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재고한다면 김내균의 이 언급들이 혼란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 로고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신학의 기본용어. 파토스(Pathos)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어의 원래적 의미인 '수집되어 정리된 것'으로부터 전화하여 '언어'(말)를 의미했는데, 말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개념, 논리, 이론, 사상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며(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논리학을 로고스의 학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아가 이성이라든가 세계의 이법(理法)도 표현하게 되었다. 로고스와 유사한 개념으로 중국사상에서는 '도'(道),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를 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우주 만물을 지배하는 이법으로 받아들이고, 이 사상을 계승한 스토아 학파는 그 범신론 사상에 기초를 두어 그것을 물리(物理) 정신의 양 세계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세계이성'이라고 했다. 로마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태 철학자 필론은 로고스를 신과 그가 창조한 세계를 중개하는 것으로서의 창조력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과 유사한 사고방식은 로마 말기의 플로티노스, 그 후에 기독교, 스콜라 학파에서도 볼 수 있으며 여기서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의 아들인 '신의 말'=로고스의 실현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선행한 헤겔 철학에서는 로고스가 이성활동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로고스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철학사전』, 중원문화

 

☞ 위키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설명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Logos

 

[22]퓌시스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 감상은 수동적 통관(洞觀)에 의한 직관적 이해가 분석에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R-Commentary] 고대철학에 대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사고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저자의 이런 시각이 충분한 정당화가 필요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제1장. 철학적 사유의 전 단계

제1절 신화적 사고

1. 들어가는 말

2. 오르페우스교와 그 추종자들

[32]오르페우스교가 BC. 6세기와 5세기의 철학적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기여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 딜스(H. Diehls)와 크란츠(W. Kranz) 그리고 (...) 커크(G.S. Kirk)와 레이븐(J.E. Raven)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으나, (...) 거트리(W.K.C. Guthrie)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33]그러나 비록 오르페우스교의 우주론과 인간에 대한 가르침이 종교적이며, 신화적인 형식을 빌려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이 철학적 사유의 발전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디딤돌의 역할을 수반하고 있음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2.1 밤으로부터의 유래

2.2 서사시에 나타난 일반적인 신학적 이야기

2.3 히에로니모스와 헬라니코스에 의한 신학적 이야기

[36]이렇게 하여 신들의 여섯 세대가 완성된다. 즉 (가) 흐로노스(Chronos)와 아이테르, 카오스, (나) 파네스[헤시오도스에게는 ‘에로스’]와 밤[뉙스], (다) 우라노스와 가이아, (라) 크로노스(Kronos)와 레아, (라)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마) 디오니소스[자그레아스]

 

☞ 이와 관련하여 원문 참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pp. 43-44)

“13. 다마스키오스(DK1B13)-히에로니모스와 헬라니코스-동일인물이 아니라고 할 경우-가 전해주는 신론([오르페우스교의 신론])은 이렇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물과 질료가 있었으며, 이 질료가 굳어져 땅이 형성되었고, 물과 땅 이 두 가지를 먼저 근원으로 놓았다. … 두 근원 다음에 이것들-내가 말하는 것은 물과 땅이다-에서 세 번째 근원이 생성되었는데, 황소와 사자의 머리를 하고 가운데에는 신의 얼굴을 하고 어깨에는 날개를 단 뱀이었다고 한다. 또 같은 것이 늙지 않는 크로노스(Chronos)나 헤라클레스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아낭케[필연]인데, 이것은 본성(physis)상 아드라스테이아와 같은 것이고 빗물체적인 것으로서, 온 우주에 뻗어 있어서 그 경계에까지 닿아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모든 것을 낳는 원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자웅일체로 상상한 점만 제외하고는 아낭케가 실체(ousia)에 상응하는 세 번째 근원이라 불린다. … 이 크로노스, 즉 뱀이 자손 셋을 낳았다. 그들의 말로는, 습한 에테르와 한정 없는 카오스, 그리고 이것들에 덧붙여 셋째로 안개 자욱한 에레보스를 … 그리고 나아가 크로노스가 이것들 안에 [세계] 알을 낳았다. … 이것들에 더하여 세 번째로 어깨에는 금빛 날개를 단 비물체적인 신을 낳았는데, 옆구리는 황소의 머리들을 가졌으며, 그 머리에는 온갖 짐승 모양을 닮은 무시무시한 뱀을 가졌다. … 그리고 이 신론은 프로토고노스를 칭송하고, 그를 모든 것과 온 우주를 질서 짓는 자로서 제우스라 부른다. 이 때문에 그는 판(Pan)이라고도 불린다.(『원리들에 관하여』 123)”

 

☞ Herman Diels의 책은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griechisch und deutsch (1903) http://archive.org/stream/diefragmenteder00krangoog#page/n428/mode/2up

 

3.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 B.C. 700년경의 그리스의 보이오티아의 농민 시인이었다. 종래의 신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신들의 계보에 따라 정리하여 『신통기』(神統記)를 기술하였다. 이것은 우주발생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그의 윤리적 종교관을 나타내 주는 교훈시 「작업과 나날들」이 있다.-[철학사전], 중원문화

 

☞Hesiod 관련 위키 사전: http://en.wikipedia.org/wiki/Hesiod

 

[40]헤시오도스는 기곤(O. Gigon)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 가장 원초적인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처음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주요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신통기에는, 생성하지 않으면서 생성의 시작과 원리가 되는 것에 대한 추구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그 문제를 대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 [41]두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을 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해답을 밝힐 수 있는 적절한 사고의 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우주 개벽론에는 우주가 이미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그러한 것이기에, 그 이전이라는 것은 본래부터 없었다. 그러므로 ‘카오스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으며, 헤시오도스가 새삼스레 이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R-Commentary] ‘생성의 시작’이라는 주제가 그리스인들에게 낯설었던 것은 오르페우스와 피타고라스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한낱 사라져 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순환의 이미지로 알려진다. 이 순환의 경로 가운데, 카오스는 일정한 질료적 기반이 되는 것이고, 이는 ‘카오스’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바, 시작의 이미지가 형성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카오스는 그 자체로 시작과 종말, 이쪽과 저쪽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질료적 기체’라고 보인다.

 

3.1 독수리와 나이팅게일의 우화

3.2 정의에 관하여

4. 페레퀴데스

[44]페레퀴데스는 단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제우스와 흐르노스 그리고 크토니에라는 세 신성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페레퀴데스는 창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만물의 시작으로서, 헤시오도스적 카오스 대신 보다 논리적이고 또한 어원론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는 뜻의 흐르노스를 덧붙여 개입시킴으로써, 우주발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흐르노스는 변화하는 낮과 밤의 공통 기반으로서, 헤시오도스적인 카오스의 의미에 더 가깝다.

 

☞페리퀴데스에 대한 DK의 원문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pp. 72~85 참조. 단편 64로 표시된 곳을 보면 페리퀴데스는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원질을 ‘물’로 보고 있다.

 

5. 초기 신화론적 사고의 종합

[32]이들의 신화론적, 우주 개벽론적 사고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사실은 신화적 사고의 흐름에 하나의 발전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즉, 우주가 단일 존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으로부터 여기에 대응하는 주장, 즉 다수로부터 우주 만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오르페우스교의 관점에서는 흐르노스(Chronos)를 그 첫 번째 원리로 설정하나, 헤시오도스나 페레퀴데스 다수가 최초의 존재들에 대한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33]특기할 점은 권위주의와 특권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그리스인들]의 자유로운 의식이다. 권위적 신앙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면서 합리성에 근거한 평등과 균형 그리고 조화를 추구했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서 종교적인 사고와 철학적인 사고가 오랫동안 미분된 상태로 지속되어 온 까닭도 어쩌면 위계질서와 계급 안에서 조화를 중식하는 가부장적 제도의 지속에서 그 주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2절 7현인들의 시대

1. 린도스 출신의 클레오불로스(Kleoboulos)

[49]모든 일에 적도(metron)을 가지는 것이 최상이다.

 

2. 아테네 출신의 솔론(Solon)

[50]너무 지나치지 않게(meden agan: μηδέν αγαν).

 

3. 스파르타의 킬론(Chilon)

[50]너 자신을 알라(gnothi sauton: γνωθι σαυτον).

 

4. 밀레토스의 탈레스(Thales)

[51]보증을 서게 되면, 파멸이 곁에 있다.

 

5. 레스보스 출신의 피타코스(Pittakos)

[51]친구를 나쁘게 말하지 말며, 적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분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6. 프리에네 출신의 비아스(Bias)

[52]큰 도움이 안 된다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을 높게 보지 말라.

 

7. 코린티오스 출신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52]민주주의가 참주정치보다 낫다.

 

[53]특기할만한 사실은 적어도 이들의 경구들 속에는 초기의 이른바 자연철학자들의 사고와 관련을 갖는 어떠한 우주론적인 특징이나 내용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적지 않은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비단 7현인들에게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오르페우스를 비롯한 신화론자들의 사고 속에서도 나타났으며 (...) 자연철학자들의 철학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R-Commentary] 이 말은 자연철학자들이나 오르페우스, 7현인들이 ‘본격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유하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사고는 소피스테스에서부터며, 이는 그리스 사회가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 이후 그리스인들 자신들에 대한 자긍심이 최고조로 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거스리의 논지를 참고하면 되겠다.

 

제2장. 밀레토스인들의 철학

들어가는 말

[57]주41) [철학의 시작에 대한 네 가지 특유한 의견들: (1) 스파르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 이는 7현인들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는 삶의 교훈과 관련되므로 합리적 방식에 의한 이해와 인식이라는 철학의 본령과는 거리가 있다. (2) 헤시오도스를 시조로 보는 입장. 그러나 헤시오도스의 사고는 다분히 신화적인 부분이 많다. (3) 근동(페르시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과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 유입되었다는 설. 이러한 유입이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수학, 천문학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 사유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처음이다. (4) 아낙시만드로스를 시조로 하는 주장. 주로 Chernis와 Kahn에 의해 제기된다. 이들에 따르면 탈레스의 사유에서는 7현인과 같은 요소가 더 많기 때문에 탈레스를 시조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Kahn의 저서는 온라인으로 읽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archive.org/details/anaximanderorigi00kahn

 

제1절 탈레스

1. 생애

2. 철학적 업적

[61]탈레스는 귀납적 방식에 의해서 ‘만물은 물엣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일반 명제를 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과학적 정신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 [그러나, Kirk와 Raven 등은] 탈레스의 우주론은 이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도 있었고 그곳의 사제들로부터 그것을 배워 왔[다고 주장한다.] (...) 탈레스의 공적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들의 생성소멸 과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국 탈레스는 ‘이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세계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물들이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제2절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만드로스와 관련해서 온라인에 개방된 텍스트: http://archive.org/details/originsofscienti00desa

위의 Kahn의 텍스트도 참조.

 

1. 생애와 학문적 특성

2.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

2.1 우주론

 

 

 

 

2.2 철학적 단편

[69]탈레스는 물이 아르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대립적 요소를 만들어낼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즉 대립자들 중에서 어느 하나가 무한하다고 한다면, 나머지 대립[70]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로 인하여 이에 필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다양한 대립적 요소들이 완벽하게 혼합되어 있는 아페이론 자체에서는 어떠한 힘도 다른 것을 지배할 수 없으며, 불의를 범할 수도 없다. 다만 세계가 형성되기 위해 분리가 일어날 때에 우열을 가진 대립적 힘들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힘들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힘들을 침해할 정도로 강하다고 해도 그러한 불의는 처벌되고 심판을 받음으로써 대립자들은 파괴되지 않고 아페이론 속에서 존립하게 된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혼합될 뿐이며, 그들의 균형은 완벽하게 복구된다. (...) 그리하여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이 세계는 그 어느 요소들도 다른 요소들을 침해토록 허용치 않는 것이므로 이 세계는 항상 정의롭게 유지된다고 간주되었다.

 

2.3 무한자

2.4 생물학적 단편

제3절 아낙시메네스

1. 생애와 사상

 

2. 만물의 원질로서의 공기

 

3. 변화의 과정: 농축과 희박

[80]아낙시메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자를 가지고 사물들의 질적인 변화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결국 공기의 농도가 사물의 질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아낙시메네스는 최초로 양과 질의 관계를 일[81]원론적으로 정립한 그리스 철학자가 되었다. 그의 일원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중있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4.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83]그는 최초의 분리, 즉 공기로부터 농축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마치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자의 분리와 마찬가지로 영원으로부터의 운동(영원한 운동)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그 역시 아무런 언급을 첨가하고 있지 않다.

 

[R-Commentary] 이들에게 ‘영원성’이란 어떤 의미를 띄었던 것일까? 철학시대로부터 비극의 시대까지 그리스인들의 ‘시간’이란 ‘회귀’(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와 ‘파멸’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덧없음’에 대한 아주 이른 깨달음이 ‘철학함’의 시작이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을 참고한다면, 이들에게 이 모든 시간성들이 현상계의 덧없음으로 흘러가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와 다른 차원에서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시간은 초월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떤 내재적인 영원성이 이들의 시간의식에 속함에 틀림없다.

 

 

제3장.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

1.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사상의 출처

 

2. 피타고라스 교설의 철학적 특성과 형성

[91]피타고라스가 철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은 혼의 정화를 통하여 운명과 출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피타고라스 사상의 주요한 개념들은 관상(觀想: theoria)과 질서(秩序: cosmos) 그리고 정화(淨化: katharsis) 등의 개념들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3. 영혼에 대한 교설과 이론들

3.1 영혼의 불멸과 윤회

 

3.2 영혼의 본성

[100]영혼조화설이 커크의 해석처럼 피타고라스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변형시켜 만든 알크마이온의 의술이론에 근거하는 것인지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피타고라스의 영혼불멸 이론이 영혼 조화설에 의해서 손상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이 조화라고 말할 경우, 우리는 영혼이 여러 요소들로부터 혼합된 실체라는 사실을 아울러 인정해야 하며, 또한 이 경우에 영혼은 심미아스의 주장과 같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101]또 다른 가능성은 영혼이 물질적인 대립자들 간의 조화가 아닌 수와의 조화를 의미하고 있다고 했을 경우이다. (...) 그러므로 수의 본성이 조화이듯이 영혼도 조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

4.1 조화로서의 음악

 

4.2 산술과 수학에 관한 철학적 이론

[110]주164)하나는 숫자의 시작이자 피타고라스 공동체에서 최상의 숭배를 받은 대상인데, 이 하나는 아폴론 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까닭을 우리는 아폴론(Apollon)이라는 이름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어 A는 부정 접두사로 아님을 뜻하고, pollon은 많다를 의미하는 형용사 polys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아폴론의 문자상의 의미는 다수가 아닌 것, 즉 일자를 뜻한다. 일자를 또한 히페리온(Hyperion)으로도 불렀다. 히페리온의 문자상의 의미는 ‘넘어선 것’으로, 모든 수를 초월한 일자를 뜻한다. 플로티노스도 히페리온의 어원적 의미를 V5, 13, 19에서 밝힌 바 있다. 히페리온은 태양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아폴론의 또 다른 이름도 된다. 훗날에 와서 태양은 일자의 상징이 된다. 이는 태양이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산출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도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서 모든 숫자를 산출해 내기 때문이다. D. K. 44A. K. Freeman(1966), 227쪽, 그리고 P. Gorman(1979), 116쪽 참조.

제4장. 크세노파네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2. 비판적 신관

 

3. 신관의 긍정적 기여

 

4. 자연에 관한 이론

 

4.1 천체

 

4.2 피조물의 기원으로서의 물과 흙

 

5. 인식에 관한 크세노파네스의 견해

 

제5장.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1. 생애와 철학적 특성

 

2. 퓌시스(physis)의 탐구

 

3. 불과 로고스

3.1 불

 

3.2 로고스

[135]명사로서의 로고스는 원래 동사 λέγω(lego)가 to reckon, to speak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될 때에 비로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λέγω의 어근은 λέγ-로서 대체로 1. 모으다, 수집하다(최초의 예는 호메로스의 시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Τρωά󰐠 μέν λέξασθαί έϕέστιοι ὅσσοικἔασιν”: 도시에 사는 모든 트로이 사람들을 모아서 …), 2. 세다, 셈하다, 3. 열거, 매거하다, 4. 이야기하다, 말하다 등의 네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logos 개념은 이상과 같은 동사 lego의 의미에 상응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명사로서의 로고스는 collection, counting, reckoning, calculation, account, consideration, reflection, ground, condition, enunciation, catalogue, word, narrative 등의 의미를 지니며 발전하였다. 예문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collection: 수집이라는 의미는 주로 복합명사 또는 파생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παλίλ­λογος(pali-logos: 다시 모음, 다시 거두어 들임), σύλ­λογος(syl­logos: 결합, 회합, 집회), συλ­λογέυς(syl­logeus: 수집가), σπερμο­λογός(spermo­logos: 이삭줍기) 등.

2. narrative, word, speech, fable, story, conversation, legend: 말해진 것, 허구적이든 실재적인 것이든 어떤 이야기, 어떤 것에 대한 설명, 상황이나 환경에 대한 해명, 소식, 연설, 주고받는 말, 대화 일반, 신탁의 대답, 소문, 보고, 격언적으로 말해진 어떤 것, 언급, 주목, 행위나 사실에 반대되는 단순한 말, 조약, 명령, 쓰여진 작품의 한 단락 등을 의미한다.

3. thing, spoken of, things, matter: 어떠 어떠한 것, 사물이나 사건을 의미하는 경우에도 로고스가 쓰인다: Hdt,. I, 21: “모든 로고스[]를 분명히 먼저 알았기 때문에 … ”(σαΦέως προππυσμένος παντα λόγον …), 같은 책, VIII, 65. : “그 로고스[] 외의 다른 것은 말하지 말라”(… μηδένι ἄλλῳ τόν λόγον τούτον εἴπης).

4. counting, reconing, calculation, account, mention 그리고 새 take account of와 mention의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가치, 평가, 명성, 고려, 관심 그리고 생각 등의 관념이 생기게 된다.

5. correspondence, relation, proportion, measure: 대응, 비례, 비율, 관계, 적도, 기준.

6. 1과 4로부터 reflection, ground, condition, thought, cause, reasoning, consideration, true account of things, argument 등의 의미가 일상사와 철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7. general principle, reason, cosmic reason, rule, power of speech and thought: 일반적 원리, 이성, 우주 이성, 규칙, 언어와 사유의 힘.

 

4. 대립자의 통일

 

5. 존재자의 통일성을 가능케 하는 내재적 구조

 

6. 변화와 투쟁

[158]플라톤은 아마도 그가 동일한 강물에 한 차례도 들어갈 수가 없다고 믿은 크라틸로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만일 플라톤이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의 의미를 크라틸로스로 인하여 잘못 이해하였다면, 다음과 같은 커크와 레이븐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전체로서 생각되는 강이라는 단일성(unity)은 물로 구성된 흐름(유전)의 규칙성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일 “강은 세계이며”, “물은 세계의 부분들이다”라고 한다면, 강물의 비유는 다음과 같은 것, 즉 강의 단일성은 세계 내에 있는 요소들의 변화의 규칙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 된다.

 

[R-Commentary] 글쎄? 커크와 레이븐이 ‘강의 단일성’이 ‘변화’로부터 온다는 것은 수긍이 가지만, 그것이 ‘규칙성’이라는 것은 단지 헤라클레이토스의 맥락에 천착하기 때문일수도 있다. 만약 ‘로고스의 신비’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다른 지점에 착안한다면, 그것은 ‘규칙성’이긴 하지만 다만 파생된 규칙성이며 보다 거대하고 중요한 것은 강 자체의 ‘우연성’일 것이다.

7. 인식론적 견해

 

제6장. 엘레아 학파의 철학

제1절 파르메니데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2. 책의 서문

 

3. 진리의 길

3.1 탐구의 길들

 

3.2 진리의 길에 대한 논증

 

4. 억견의 길

4.1 억견의 길에 대한 해석의 문제

[182]진리의 길은 논리적 필연에 대한 확신으로 주어졌으나, 억견의 길은 가사적인 세계에 자신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에 관한 물음이 억견에 관한 물음 없이 해결될 수는 없다. 비존재의 길은 생각할 수 없는 길이나, 억견의 길은 존재와 비존재의 세계를 왔다갔다하는 길(단편 6)이므로, 감각 지각에 의해 나타나는 억견의 길에 어떤 실재성을 파르메니데스는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doxa(억견)와 마찬가지로, 비록 참은 아니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4.2 억견의 길에 대한 단편들의 해석

5. 인식에 관한 견해

제2절 제논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2. 잡다에 대한 제논의 논증

3. 잡다에 맞서는 제논의 파라독스

3.1 경주장

3.2 아킬레스와 거북이

3.3 나는 화살

3.4 움직이는 물체

제3절 멜리소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2. 실재의 특성들

2.1 실재는 불생불멸

2.2 무한한 실재

2.3 실재의 다른 특성들

3. 상식에 대한 논박

 

제7장. 다원론자들의 철학

제1절 엠페도클레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216]파르메니데스에 이르러 이오니아 철학에 없었던 이러한 현상과 실재의 구별은 쉽게 조화될 수 없는 양자의 단절을 가져오게 하였다. 여기에서 실제와 현상 사이의 가교를 놓는 일, 즉 현상을 구제하는 일(σόζειν φαινόμενα)은 파르메니데스가 이후 사상가들에게 남겨 놓은 숙제가 된 셈이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적 존재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세계 속에서 운동과 변화의 문제를 수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근본 문제는 엠페도클레[217]스를 비롯한 여러 다원론자들이 부여 받은 주요한 철학적 탐구 과제가 되었다.

 

2. 생애와 저작

3. 엠페도클레스의 자연 철학: 『퓌시스에 관하여』

3.1 네 개의 뿌리(rhizomata)와 요소들의 혼합에 의한 생성과 소멸

[224]이 네 가지 요소들은 생성된 것이 아니다. 생성하는 이 세계는 무로부터 온 새로운 탄생이 없을뿐더러 무로의 소멸도 없다. 출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이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단편 8). 요소들이 혼합되어 인간이나 식물, 혹은 새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면, 바로 그것이 생성 혹은 탄생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다(단편 21, 23). 그러므로 요소들이 어떻게 혼합될 것인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소들의 많고 적음의 비율에 따라서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사물들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225]반면에 그렇게 형성된 사물들의 요소가 분리되면 거기에는 이른바 죽음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탄생이다, 죽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 자신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단편 9). 생성과 소멸을 실제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단편 11). 어떠한 것도 무로부터 생기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될 수가 없는 것이다(단편 12).

(...)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도, 죽음도, 파괴도 아니다. 삶이란 요소들이 결합되어 인간을 만들고 있는 동안일 뿐이며, 죽음이란 단지 이 결합의 해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무로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단편 15). 삶의 본질은 새롭게 창조된 것도 아니며, 무로 없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단편 23).

 

[R-Commentary] 요소들이 결합 또는 분리되는 과정(‘동안’)이 자연의 변화, 운동양상이고 그것이 그대로 삶의 양상이라는 것은 유물론이 지니는 낙관론이다. 이제 근동의 종교와 기독교가 이 낙관적 세계관에 ‘종말’과 ‘창세’라는 관념을 들여놓음으로써 정신사에서 하나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3.2 사랑(Philotes)과 미움(Neikos) 그리고 우주의 순환적 변화

1) 하나의 구체(球體): 사랑이 지배하는 시기

2) 미움이 증진되는 시기

3) 미움이 지배하는 시기

4) 사랑이 증대하는 시기

3.3 엠페도클레스의 우주 발생론

3.4 동물발생론

3.5 생물학

[243]엠페도클레스에게 ‘사랑은 결합이며, 미움은 분리다’라는 단순한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 발생론에 나타나는 미움은 요소들로의 분리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요소들끼리의 친화성의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고, 반면에 사랑의 영향에 의해서 요소들이 하나로 결합하게 되었을 때 요소들은 분리를 통한 통합을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활동은 그것이 같은 것이 되었든지, 다른 것이 되었든지 간에 일체의 것을 끌어당기고 결합하는 힘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 미움은 요소들의 친화성과 더불어 분리시키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개개의 생명체나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을 사랑을 가지고 가능케 만든다. 생명체에서 같은 것은 같은 것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추구한다.

 

[R-Commentary] 만약 이렇게 해석한다면 엠페도클레스는 명실 공히 최초의 자연변증법을 창시한 인물이 된다.

 

3.6 감각 지각과 사고

4. 『정화론』: 엠페도클레스의 신학과 종교

4.1 자연론과 정화론

4.2 『정화론』에 나타난 원죄와 윤회

1) 타락 전의 상태와 타락의 원인

2) 육화의 주기 및 육화된 상태

제2절 아낙사고라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1.1 생애

1.2 저작

2. 아낙사고라스 철학의 시발

3. 아낙사고라스의 존재론적 원리

3.1 누스(Nous)

3.2 몫(moira)과 종자(씨: spermata), 대립자(ta enantia)

1) 몫

2) 종자

[271]아낙사고라스는 단순 실체라고 여기는 유기체나 무기물 등의 모든 티끌에다 종자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실체들의 티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동질서(homoiomere)라고 불렸다. 아낙사고라스 자신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종자는 무한히 작은 티끌들로[272]서, 서로 같지만 정확하게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응고되었을 때 살, 머리칼, 뼈, 금과 같은 단순 실체를 부여한다. 우리가 한 동물, 식물의 종자라고 부를 때 이미 그것은 복합적이다. 결국 그것으로부터 발전하는 모든 실체들의 티끌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3) 대립자

4. 아낙사고라스의 자연 과학적 견해

4.1 우주 발생론

4.2 천문에 관한 여러 견해들

4.3 동물과 식물

[279]생명체는 그들 내부에 누스[정신]의 한 몫을 가지고 있다. 비록 누스 자체는 그 무엇과도 혼합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을 지[280]닌 것들 안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지성(phronesin)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 존재들까지 포함해서도 그렇다. 아낙사고라스는 또한 인간은 손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지적으로(phronimotaton) 발달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그의 생각에 반대하여, 손이란 인간이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구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R-Commentary] 아낙사고라스의 ‘지성’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근대적인 의미의 정신주체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환경과의 교호를 통해 형성되는 무엇이다. 여기서도 physis가 앞서는 것이지 nous가 앞서는 것이 아닌 것이다.

 

4.4 인식, 감각지각에 관한 견해

제3절 원자론자들의 철학

1. 들어가는 말

1.1 레우키포스

1.2 데모크리토스

[286]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의 연구활동을 위하여 공적인 일, 특히 정치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들을 대부분 포기하고 저술 활동과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287]나 일상사적인 일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정치나, 사회, 윤리적인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데모크리토스는 레우키포스가 다분히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원자 이론의 체계를 구상하고 있었다면, 데모크리토스는 그 기계론적인 결정론에 숨통을 터줄 수 있는 길을 원자론에서 모색하고자 했던 철학자였다.

 

2. 원자론

2.1 형이상학적 원리

[290]엘레아적 존재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물리적 자연 세계의 현상적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레우키포스는 빈 공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존재의 본성은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존재하지 않는 공간(따라서 생각할 수도 없는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허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은 레우키포스나 데모크리토스에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허공이 비존재라고 말하면서도, 그 비존재를 존재로서 인정하는 비논리적인 주장(파르메니데스적 입장에서)을 하고 있다. 허공이란 단순히 독자적으로 혹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자들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비존재, 즉 원자들의 존재를 드러내 주기 위해서 그들 사이사이에 있는 비존재적 존재이다.

(...) 생성소멸이 없는 파르메니데스적 존재(on)는, 결국 원자론자들에게는 생성소멸하지 않는 무수한 존재들(onta)인 원자들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 그리하여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다원론에 의해 시작된 현상 구제의 과업은 원자론자들에 의해 일단락된 셈이 되었다.

 

2.2 원자의 본성

2.3 원자들의 운동

[297]원자론자들은 모든 방향에서 제멋대로 종잡을 수 없는 운동을 하는 원자들이 무한한 허공 속에서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원자 운동에 대한 적극적 원인을 제시해야 할 이유를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자들이 서로 부딪힐 때 움직이게 되는 그러한 운동은 물질의 영원한 내재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이 없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2.4 우주 형성론

[300]주500) 데모크리토스는 우연과 필연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어떤 때는 우연과 필연을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는데, 거트리에 의하면, 필연적 우연(ἀναγκεία τύχη: Sophocles, El., 48, Aj., 485)이라든가 플라톤의 필연으로부터 나온 우연에서(κατά τύχη έξ ἀναγκες: Laws, 889c)라는 표현들은 그 당시 자연철학자들에게 극히 자연스러웠다고 말한다.

 

[303]원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원리인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이법 가운데, 우연이란 원자들이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질서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뜻하고, 필연은 그러한 무규정한 상태에 있는 원자들을 규정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며, 이법은 규정된 존재자들을 생성과 소멸의 인과율에 따르게 하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이해를 위한 편의적인 설명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 원리가 원자 자체에 내재하는 것인 만큼 우연 속에도 필연과 이법이, 필연과 이법 속에도 우연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현상과 실재를 구별한 원자론자들은 현상이나 실재 모두는 일정한 순환적 운동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실재(원자들)는 불확정적인 무질서로부터 질서 잡혀진 규정된 것들을 향하여 움직이며, 반면에 현상은(일단 규정된 것들) 다시 무질서의 실재로 복귀하는 운동을 하게 된다.

 

3. 인식에 관한 견해: 감각 지각과 사고

4. 윤리학과 사회 정치에 관한 견해

4.1 윤리학적 사유

[309]그[데모크리토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윤리적 용어들은 자연학에 대한 깊은 탐구로부터 나오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윤리적 사유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euesto(잘 있음, well-being)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이 바로 잘 있게 됨에 있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학에 대한 윤리적 언어의 연관성을 보게 된다. 이러한 윤리적 용어들 즉 마음의 평정을 뜻하는 기쁨(euthymia), 동요 없음(athambia), 평정(ataraxia) 등은 인간의 당위적인 삶과 관계가 있다. 물론 삶의 상태와 활동은 숙명적이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발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잘 있기 위하여, 마음의 평온함에 의한 기쁨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잘 있음과 평정의 상태는 적도에 의해서 인도될 수 있는데 이 상태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다.

 

4.2 정치철학적 사유

[317]이 변형(metarysmoi)이란 용어는 원자의 형태(rysmoi)와 관계가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교육은 인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영혼의 운동 역시 물리적 세계의 운동과 같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변형으로 이해된다. 영혼의 운동은 무분별, 무절제에 대적하여 올바른 적도를 가짐으로써 자신을 규제하고, 로고스에 의한 균형있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두려움이 없는 만족한 평온의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그의 원자들이 부조화와 무질서에서 질서와 균형 잡힌 결합으로 우주의 존재를 형성시키며 자연을 유지시키듯이, 인간의 삶에서도 누스는 영혼의 균형과 조화를 확보하면서 욕망, 무질서, 불균형에 맞서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데모크리토스의 윤리와 정치사상은 이러한 조화와 균형 있는 삶, 즉 행복한 인간의 삶을 실현시키기 위한 존재론과 연관된 시도로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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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아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6
플라톤 지음, 이정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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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플라톤을 관조적이며 정치중립적인 철학자로 보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했을 때에도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사후(BC. 323)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피신한 것과는 달리 플라톤은 몇 번의 실패 후에도 자신의 '철인왕국'을 실현하기 위해 70의 노구를 이끌고 시라쿠사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어이없는 전승(유신시절 문교부가 이렇게 유포했고, 그래서 이런 오해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래없다.)은 그가 진실로 철학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아테네의 중우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정신을 간직했다는 점을 알고 나면 하나의 넌센스처럼 비친다.

 

따라서 서구사상의 시원에서부터, 아니 정신(nous) 자체가 바로 니체적 의미에서 '반시대적'이며, 저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정신적 밀리탕스는 어디서부터 유래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 대화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미완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다. 이 대화편 자체가 '미완'이라는 것, 그리고 대화가 중단된 부분이 다름 아니라 타락한 아틀란티스에 대한 제우스의 징벌이 시작되는 부분이라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 부분은 여러 철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런 만큼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모두 허용한다. 제우스의 징벌은 곧 '아테네'라는 다른 유토피아를 준비하는 '파괴'의 과정이다. 하나의 파괴 이후에 등장하는 완전한 유토피아로서의 아테네는 플라톤 당대의 아테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며, 오히려 그것은 타락 이전의 아틀란티스를 그대로 가져온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건설할 것인가? 만약 아테네가 아틀란티스와 같은 물질적 번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시의 아테네처럼 중우정치에 물들어 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절제'와 '용기', 그리고 '정의'를 내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덕목들이 물질적 번영의 토대 위에서 제대로 구현될 것인가? 혹 이 유토피아마저 변질되지는 않겠는가? 이러한 불안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실천의 전망이 플라톤에게 '열망'을 불러 일으켰고 그의 발길을 끊임없이 시라쿠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철학은 시초부터 '반시대적'인 동시에 '실험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은 무언가를 언설로 갈무리 하여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지평에 스스로를 열어 놓음으로써 텍스트를 미완으로 돌리고, 현실 안에서 어떤 '발명'을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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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입부 대화(106a-108)

1. 티마이오스의 마무리와 기원(106a-106b)

[106b]올바른 벌이란 틀린 소리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소리를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4)

 

(4)dikē de orthē plēmmellounta emmelē poiein. 여기서 쓰인 ‘plēmmeleō’는 ‘to make a false note in music’ ‘틀린 소리를 내다’의 뜻이며, ‘emmelōs’는 ‘sonding in unison, in tune or time, harmonious’ ‘맞는 소리를 내다’의 뜻이다. 여기서는 조화로운 우주를 말로 설명하는 것과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2. 크리티아스의 양해(106b-108a)

3. 소크라테스의 당부(108a-108c)

4. 크리티아스의 다짐(108c-108d)

 

II. 옛 아테네와 선조들(108e-112e)

1. 서언: 전쟁의 발발과 아틀란티스의 위치(108e-109a)

2. 신들의 지역 배분과 최초의 통치방식 및 토착민들(109b-110c)

[110b]당시에는 여자와 남자 모두 전쟁에 관한 임무를 똑같이 가졌으므로 무장한 여신상은 당시 관습에 따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봉납 신상일 수 있었는데, 그 여신 그림과 여신상 또한 ‘떼 지어 사는 것은 암수를 불문하고 다 똑같이 각기 고유한 탁월성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네.

그런데 당시 이 아테네 지역에는 시민 계층들 중 수공업에 종사하는 계층 외에도 땅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계층이 살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인 계층이 신적 인간들에 의해 처음부터 격리된 채 따로 살고 있었다네(49). 양육과 교육(50)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하고서 말이네. 즉,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들 자신의 사적인 소유물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그들 모두의 공유물로 간주하였고, 식량 또한 생존에 필요한 정도 외에는 일체 다른 시민들로부터 얻으려 하지 않았네. 그러면서 그들은 어제 거론되었던 임무일체, 즉 우리가 제안했던 수호자들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들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네.[110d]

 

(49)《티마이오스》246 참고.

(50) trophē kai paideusis 양육은 신체 발육과 관련된 것이고 교육은 정신의 함양과 관련된다. ‘교육’은 ‘교양’으로도 옮길 수 있다. 교육(교양)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국가》3권 416b~c, 4권 423e~424c, 7권 518c~d 참고.

 

☞ 여기서 ‘떼지어 산다’는 표현은 인간 뿐만 아니라 전체 자연의 동물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정호 선생은 주석에서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이렇게 인간만을 따로 보지 않고 전체 자연의 일부로 취급하는듯한 표현은 대화편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인식체계로 인해 논리적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경우에도 매우 복잡한 논변이 전개되기도 한다. 《뤼시스》에서 인간과 자연물을 복합적으로 취급하는 부분도 그러하다. 그리스 고대철학은 아직 인간을 하나의 ‘주체’ 즉 실체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는 통념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3. 계층의 구분과 임무(110c-110d)

4. 아테네의 땅(110d-111e)

1) 국경(110d-110e)

2) 토질, 자원, 기후(110e-111e)

5. 아테네의 도시(111e-112d)

1) 위치와 경계(111e-112b)

2) 거주지와 그 주변(112b-112d)

6. 수호자의 규모와 됨됨이(112d-112e)

 

III. 아틀란티스 섬과 사람들(112e-120d)

1. 명칭에 대한 사전 설명(112e-113b)

2. 기원과 시조(113b-113d)

3. 포세이돈의 최초 건설 작업(113d-113e)

4. 포세이돈의 후손들, 영지 및 부(113e-114d)

5. 자원(114d-115b)

1) 지하자원(114d-114e)

2) 산림 및 동식물, 식량자원(114e-115b)

6. 도시의 건설과 정비(115b-118e)

1) 해수 띠와 육지 띠, 운하(115c-116a)

2) 그 주변의 정비-다리, 돌담, 망루, 문, 선박계류장, 돌담장식(116a-116c)

3) 궁정의 배치(116c-116d)

4) 포세이돈 신전 내부(116d-117a)

5) 온천과 냉천, 수도관(117a-117c)

6) 외곽성벽, 항구(117d-118e)

7. 평야의 정비(118a-118e)

1) 평야의 위치와 크기(118a-118b)

2) 평와 외곽 산지(118b-118b)

3) 직사각형 해자(118b-118c)

8. 구역의 규모와 행정(118e-119a)

9. 구역별 병력 및 병기의 공출(119a-119b)

10. 통치 체계 및 법률(119c-120d)

1) 통치자 회의(119c-119d)

2) 서약 의식(119d-120c)

[120a]비석에는 그 법에 덧붙여 법에 복종하지 않는 자에게 엄청난 저주를 비는 서원이 새겨져 있었다네. 그들은 또 그들의 법에 따라 제물을 바칠 때 황소의 사지 모두를 바쳤으며(151), 크라테르(152)에 술을 섞으면서 자기들 각자를 위해 핏방울도 같이 집어 넣었네. 그리고 비석을 두루 정결케 한 후 나머지 피도 불에다 부었다네.

그런 다음 그들은 그 크라테르의 술을 황금 잔에다 따랐다가 그것을 불에다 부으면서 이런 맹세를 하였던 것일세. 즉 이전에 뭔가 법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비문에 새겨진 법에 따라 심판하여 처벌할 것이며, 또한 이후 어떠한 법도 고의로 어기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는 통치하지도 않을 것이고, 또 그러한 통치자에게 복종하지도 않겠노라고 말일세.

 

(151)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바치는 의식이 여기서 응용되고 있다. 《오뒷세이아》iii 6 참고.

 

☞ “그때 그들은 넬레우스가 튼튼하게 지은 도시 퓔로스에 닿았다.

마침 바닷가에서 그곳 백성들이 새까만 황소들을 잡아

 대지를 흔드는 검푸른 머리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홉 줄의 좌석이 있었는데 각 줄마다 오백 명씩

앉아 있고 각 줄마다 황소 아홉 마리씩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마침 내장을 맛보고 나서 넓적다리뼈들을 제단 위에서

신께 태워드리고 있을 때 (...)

 

(152) kratēr. 술 등을 섞기 위해 만든 그릇

 

 

 

 

 

 

3) 법률들(120c-120d)

 

IV. 본성의 타락과 징벌(120-121c 중단부분)

1. 신적인 본성의 상실(120d-121b)

2. 제우스의 징벌(121b-121c 중단부분)

[121a]그들은 부의 사치스러움에 취해 자제심을 잃어 그들 자신을 망쳐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애로운 교분을 통해 덕과 함께 불어 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네. 반대로 부와 사치스러움을 얻고자 안달하고 그것들을 떠받들면 오히려 줄어들고 급기야는 그 덕 자체도 그들에게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말일세.

실로 그들은 이러한 생각과 신적인 본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서 불어났던 것이네. 그러나 그 신적인 부분은, 여러 사멸하는 것들과 수차에 걸쳐 뒤섞여짐으로써 그들에게서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오히려 인간적 성정이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자 그들은 급기야 갖고 있는 재물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평정을 잃어,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파렴치한 자로 간주되었네. 가장 귀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121b]

 

[121c] 모든 것을 굽어 볼 수 있는 신들의 가장 존귀한 거처로 모든 신들을 불러들여, 그들이 다 모이자 이르기를 (…).

 

☞아틀란티스에 관한 National Geographic의 다큐멘타리:

http://www.youtube.com/watch?v=Kds6G4ffx-4&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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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7 1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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