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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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결혼, 죽음>의 편집부터 살펴보자면, 책 표지와 작가 소개에 쓰인 글씨체를 바꾸고 싶다. 아마 바른 고딕체인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책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없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책이 엉성해 보이는 인상을 준다. 결혼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잘 드러낸 표지 일러스트는 인상적이다. 다만, 책의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작가 '에밀 졸라'와 <결혼, 죽음>에 관한 소개 글을 짧게 껴 넣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 '에밀 졸라'의 <결혼, 죽음>은 여러 단편들을 '결혼'과 '죽음'이라는 주제 아래에 묶어놓은 것이다. 서로를 이해할 시간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채 결혼에 뛰어들어야 했던 19세기에 쓰였다. 1장 결혼과 2장 죽음에서는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등의 각 계급에서 결혼과 죽음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3장 '어떤 사랑'에서는 계급은 명시하지 않은 채 한 연인의 결혼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계급 간에 드러나는 뚜렷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1장 결혼

귀족에게 결혼은 지위 상승을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적당히만 알아도 된다. 신부가 지참금으로 얼마를 들고 오는지가 이 결혼에서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결혼 생활을 시작한 부부는 한 집안에서 떨어져 지내고, 바깥으로 나돈다.

부르주아의 모습 또한 귀족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에게 결혼은 일종의 "비즈니스"다. 일단 여자를 고르기 전에 "재산 계산"부터 들어간다. 귀족들처럼 부르주아들에게 결혼은 자신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항일 뿐이다.

상인도 상대의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상인이라는 직업에 걸맞게 이뤄진다. 이불보를 두 번 빨아서 세탁비를 낭비하지 않도록 늘 동침하는 식이다.

서민은 위의 사람들과 좀 달랐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돈이 없으니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도 돈 때문에 녹록지 않았다.

1장을 다시금 떠올려 보니 죄다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드러나는 고질적인 문제다. 그놈의 돈. 사실 결혼에 있어서 상대의 재력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은 현대에도 존재하므로, 비단 19세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에밀 졸라'가 이 장에서 묘사한 서민들의 삶을 본다면, 상대가 돈이 많기를 바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다. 또한 돈 이외에 각 계급의 사람들이 계급이라는 틀에 갇혀 자신과 엇비슷한 상황에 놓인, 혹은 물질적으로 자신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만 결혼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이것도 현대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계급이라는 울타리가 쳐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암암리에 만들어진 신분적 제약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까 <결혼, 죽음>은 19세기의 소설이 아니라, 현대 소설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의 작품에서 계급에 따라 보이던 모습이 전부 옳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귀족이지만 돈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을 좇던 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계급마다의 보편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고, 더군다나 실제로 그들의 속사정이 어땠는지는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2장 죽음

2장에서 귀족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죽어가는 데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 서로 이미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남편은 하인들이 돌본다. 죽음 직전에서야 그들은 서로의 곁을 지킬뿐이다. 이어지는 장례 행렬에도 자식들만 따라나서고, 그녀는 집에 머무른다. 장례식에서 오고 가는 건 그럴듯한 빈말들뿐이다.

부르주아 과부의 죽음에는 유산을 놓고 싸우는 자식들이 등장한다. 아들들은 이미 돈을 무진장 날려먹은 과거가 있는데, 과부가 죽고 나서도 인내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산을 나눠 가지고는 그대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처럼 흩어진다.

상인의 죽음은 씁쓸한 맛이 있었다.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는 데도 간호를 하지 못하고, 장사를 지속해 나간다. 그녀를 간호하는 건 엉성하기 짝이 없는 하인뿐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게를 지켜야만 했다. 아내도 그러기를 바라고, 병상에서도 가게 일을 돕는다. 아내가 세상을 뜨고 난 후에도 남편이 앉아서 걱정하는 건 주중에 가게를 닫았다는 사실이었다.

서민 아들의 죽음은 비참했다.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은 아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는 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빈민 구제' 시스템은 아들이 죽고 나서야 그들에게 도움을 건넨다. 아들에게 제대로 된 약 하나 지어줄 수 없던 서민 부부는 무력하게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농부의 죽음은 상인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다. 밭을 돌보는 일은 장사와 같아서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어가면서도 자식들이 자신을 돌볼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얼른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라고 말한다.

죽음의 장에서 느꼈던 바는 누군가의 죽음과 관계없이,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은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상인 남편과 농부의 자식들은 가게와 밭을 계속 운영해 나가야 하고, 농부는 아들이 죽은 후에 빈민 구제 지원금으로 술을 마신 후 거나하게 취한다. 귀족은 남편이 죽은 후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죽음 후에도 삶은 계속되리라,는 흔한 어구는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3장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사랑'은 '결혼'과 '죽음'이 계급마다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에 관해 다루던 이전 장들과는 차이가 있다. 3장은 욕망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연인이 자신들의 욕망으로 인해 결국은 죽음을 자초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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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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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라는 제목의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척 단순하다. 나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물을 마시는 사람이다. 마실 물이 일절 없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벌써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표지에 그려진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지길 간절히 기다리는 여자아이 그림은 갈증을 더욱 심화시킨다. 지구 멸망 시나리오들 중에서 물이 고갈되는 상황은 지금보다 가뭄이 심화된다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도 전에 벌써 조바심이 들었다.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비해 벙커를 만들고, 그 안에 물을 쟁여둬야 할 것만 같다.

이 책은 '닐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이라는 부자가 함께 쓴 글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작성했기 때문에 어딘가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유려한 문체로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소설을 써냈다. 소설 <드라이>는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어떤 장면을 뽑아내 영화가 만들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각각의 장면들이 전부 생동감 넘치고, 현실적이어서 분명 볼 만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 본성의 참모습이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을 때조차 서로를 구할 힘은 기어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

 

소설 <드라이>는 갑작스러운 단수 사태에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 주민들이 극도의 상황에 치닫는 모습을 그려낸다. 정부에서 사태를 금방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단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야생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이런 위기 속에서 '얼리사'와 그녀의 동생 '개릿', 그리고 옆집에 사는 동창 '캘턴', 이후에 합류하게 된 '재키'와 '헨리'가 주 무대로 등장한다.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앞으로 나아간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계엄령이 선포되고, 정부는 주민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시설들에 '대피소'라는 이름을 붙이고 몰아넣을 뿐이다.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물만 보면 참지 못하고 달려들고, 양보라는 단어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악설'은 힘을 얻는다. 생존을 위해 투쟁만 할 뿐, 단수가 얼마나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물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내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얼리사'가 '캘턴'네에서 물을 훔쳐다 동네 주민들에게 넘겨주자 그들은 부질없는 싸움만 반복하고, 동행인 '헨리'는 자신의 이익만 고려한 채 거짓말을 일삼는다.

한편으로 극박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동생 '개릿'을 살리기 위해 물을 구해오는 '얼리사'를 위해 물을 가로채지 않는 '재키'가 있었고, 자신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믿었던 '얼리사'가 있었으며, 공동체를 이뤄 사람들이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이끄는 '채리티'가 있었다. 그 밖에도 보통의 상황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간성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극적인 상황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인내심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인체의 60퍼센트가 물이라고 말한 사람이 재키였던가? 이제 나머지는 요소는 똑똑히 안다. 재와 먼지, 슬픔과 비통...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니, 그런데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요소는... 희망이다. 그리고 환희다. 우리 안에서 마르지 않고 샘솟는 모든 것이다. "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남부 캘리포니아에 벌어졌던 단수 사태가 이곳에도 급박하게 닥칠 수도 있다. <드라이>에서도 몇 번이나 전조 현상이 목격되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극한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에 수도가 얼어버려 예상치 못하게 물을 못 쓰는 때에도 사람 마음이 그렇게 다급해지는데, 아예 마실 물조차 일절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니. 분명 지금 지구의 상황이 심각한 사태에 놓여있지만, 우리는 그래도 희망을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 완전히 가진 게 없는 상태에서도 <드라이>에서 사람들이 애썼듯이 우리도 희망을 놓지 않고 지켜내야 한다. 곧 오게 될지도 모르는 붕괴에 대비해 지금이라도 지구가 보내는 경고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미 세상은 끝장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눈앞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미래에 대한 경고를 보내려고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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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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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구민 한 책 읽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부상으로 도서상품권을 얻었다. 받자마자 내가 책덕임을 증명하기 위해 서점으로 달려갔다. 처음으로 방문한 동네 책방에서 여러 책들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마땅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 없어서 그냥 갈까, 했는데, 우연히 들었던 책 바로 밑에서 <사하맨션>을 발견했다. 책이 뒤죽박죽 정리되어 있어서 다른 책 밑에 이 책이 깔려 있었다. 비주류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조남주'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에 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표지가 좀 더 남루했다면 좋았겠다. 글로우 효과도 넣지 않고, 양장 커버가 아닌 페이퍼북으로 바꾸고 싶다. 절망적인 '사하맨션'의 느낌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이 뭐랄까, 나 좀 사달라고 홍보문구로 가득하지가 않다. 책 내부에도 평론은 없고, 추천사도 짧게 적혀 있을 뿐이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남주' 작가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듯한 느낌이다. 작가 이외에 아무것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에 쏟아진 몇몇 혹평을 보았는데, 나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소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읽다 보니 이건 추리소설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복선이 마지막 장에 가서야 발견된다. 소름이 오소소소 돋아났다. 이번에 영화화가 되어 큰 사랑을 받은 <82년생 김지영>처럼 어쩌면 이 책도 영화로 제작될지 모르겠다. 그만큼 생생하다. 눈앞에 장면들이 그려지고, 몰입도가 높은 작품이었다.<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도 그랬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독특한 상황-여러 여성들이 빙의되는 '김지영' 씨, 기존의 국가와는 형태가 다른 기업이 운영하는 '도시국가'-을 설정하는데, 그게 또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서로 다른 성격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지만 전부 여성들이 살면서 마주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도시국가'는 몇몇 지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낸다. 온전치 못한 주민으로 살아가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도맡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사하맨션'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얘기이기도 하다.

'주민'의 타이틀을 얻지 못한 이들은 할 수 있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늘 가난과 맞서야 하는 건 물론이고, 언제 국가에 의해 그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예측할 수 없다. 실체가 불분명한 '총리단'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 한 쪽 모서리만 떼어주고 자신들을 못살게 구는 나라에 항의라도 하면 좋겠는데, 가진 게 없어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은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주민'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즉 가진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뿐이다. 이런 무력하고 한숨만 나오는 '사하맨션' 사람들의 인생이 현 한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대부분의 삶은 그래도 이렇게 극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지만. 영 딴 판의 장소라고 말하기엔 소설에서 불쑥불쑥 내가 살면서 마주친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모퉁이를 돌아 튀어나온다.

"타운에서는 아기가 버려지지 않는다. 타운은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누구라도, 심지어 사하라도 아무 조건과 부담 없이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다(243p)",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현재와 다른 면을 가끔은 목격하기도 했다.

소설의 말미에 이야기가 살짝 급커브를 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힌트는 이 소설에 등장한 '영감'의 대사 중 일부이다.

"거기 없었어. 따라가도 없었어. 그러니까 항상 진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야 해."(p329)

사실 '진실의 추구'라는 주제는 여러 소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주제에 도달하기까지 작가가 내놓은 이야기가 나름의 스릴을 가지고 있다.

소설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까 '국정농단 사태'가 문득 떠오른다. 모래알 같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뭉쳐졌고, '진실' 하나만을 바라며 달려들었다. 세상이 그 이후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세대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변혁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소설을 완독하고 나면, 지금 내가 한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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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수업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한동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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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수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한동일' 교수님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라틴어 수업>을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진심으로 존경하는 어른들 중 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책에서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여러 번 곱씹고 나서야 튀어나오지만, 그래도 개인의 전부를 가릴 수는 없다. 문장 전부에서 따뜻함이 느껴지고, 함부로 지적하는 어른이 아니라는 게 자연스레 보인다. <로마법 수업>을 주문하고 나서 <라틴어 수업>을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평소에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특히 여러 언어의 근간인 '라틴어'를 꼭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라틴어'는 구사할 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가르쳐주는 데도 당시에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창 아쉬워하고 있던 때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책이 열렬히 사랑받던 때에는 그저 지나치다가, '라틴어'에 관심이 생기고 나자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 유명한 '라틴어' 구절 몇 개라도 외워보자 싶은 마음으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라틴어 수업>에서 내가 발견한 건 도리어 '한동일' 교수님이 건네는 조용한 다독임이었다. 카톡 프로필에 폼 나게 '라틴어'로 몇 자 끼적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 책을 읽어봐도 좋다. 하지만 생에 대한 위로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대학교 때 나는 늘 조급하고, 보이지 않는 위협에 불안을 느끼던 학생이었다.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 내게 <라틴어 수업>은 그 수업 하나를 들으러 편입을 하더래도 가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수업이었다. 저자가 건네던 말들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뻔한 듯하면서도 '라틴어'로 건네기에 특별해서 좋았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법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지 현재 법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로마법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바뀌지 않는 환경과 존재의 태도를 돌아보고, 법을 통해 역사를 인식하고자 함이지요. "(p201)

그러니까 '한동일' 교수님의 진정한 덕후로서 내가 <로마법 수업>을 건너뛰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의 이전 작품이 '라틴어'라는 희귀한 매개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구원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로마법'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다르지 않음을 보고, 더 나아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논의한다. 서양의 법이고,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번 수업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한동일' 교수님이 현재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문제들을 선정해 '로마법'과 '로마'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는 덕분에 시간의 간극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문제들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좌절하게 된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인권', '계급', '여성', '결혼','낙태' 등이다. 특히 '간통'이나 '낙태' 등의 문제는 한국 내에서도 서로 다른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법'의 지혜를 절실하게 갈구했다. 하지만 역시나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 세상은 절대 흑백논리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토의로 나름의 적절한 협의점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로마법 수업>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부분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설정해서 '로마법'을 공부하지만, 결국 "Homines nos esse meminerimus(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_키케로)"의 구절로 요약해볼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여겨야 한다, 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로마법'을 통해 가르치려던 것이 '인간성'이었음을 에필로그에서도 알 수 있다. "로마법 수업은 인간학 수업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더욱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투쟁이자 꿈입니다(231p)",라는 구절에서 저자의 주장이 잘 드러난다. '법'이라는 과목은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냉정하고 날카로운 주장들이 오고 가는 수업인 줄로만 알았다. '라틴어'라는 생소한 언어에서 특유의 따뜻한 인간성을 드러냈던 '한동일' 교수님이 이번 책에서마저 주위를 살피고 배려할 줄 아는 시선을 가르친다.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책에서나마 이런 좋은 수업을 청강할 수 있다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에서도 실제 강의를 하듯이 글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에필로그 이후 등장하는 '로마사'와 '라틴어'에 관한 설명들이다.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에서 '한동일' 교수님의 강의에 대한 열정이 엿보인다. 학교를 다녔던 때에 이런 강의가 있었다면 교수님 사무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했을 것 같다. <라틴어 수업>, 그리고 <로마법 수업>이라는 두 강의를 수강했으니 나도 교수님의 제자인 거라고 우겨보고 싶다.

+) 혹시 '이정명' 작가의 <밤의 양들>을 읽으려고 계획 중이거나, <밤의 양들>을 읽었지만 그 세계관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독자가 있다면, <로마법 수업>을 참고해도 좋겠다. 본 책에도 '로마'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꼭 일부분을 집어내라면, 211-212p에 예수가 받았던 '십자가형' 편을 읽어보면 된다. 나는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덕분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밤의 양들>은 좀 헷갈렸을 수도 있을 테니까. 참고사항으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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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는 왜 퇴보하는가 - 청년세대의 정치무관심, 그리고 기성세대의 정치과잉
안성민 지음 / 디벨롭어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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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메일로 <청년정치는 왜 퇴보하는가>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제안받았다. 메일로 온 제안은 처음이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했다. 내가 한국에서 사는 '청년'이고, 마침 우리 세대를 대변해줄 정치인이 없다는 데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에 외로운 청년 하나가 그려져 있다. 책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으로 인해 정치판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청년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잘 나타내는 표지 디자인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에서 '퇴보'라는 단어도 '청년정치'와 마찬가지로 주목받았으면 좋았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저자 소개가 마음에 걸린다. 작가의 개인적 인생사보다 저자가 어떤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고, 왜 우리가 이 책을 집어 들어야만 하는지 알려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창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해봤는데, '안성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아예 얻을 수가 없었다.

요즘 2030세대를 분석하고 특징을 잡아내는 책들이 많아졌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 자신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행태를 보이는 젊은 세대를 기성세대가 끊임없이 연구한다. 다른 책들을 다 집어던지고, 이 책에 당장 뛰어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솔직히 나는 찾지 못했다. 청년 세대의 삶이 얼마나 불평등을 겪고 있고, 나아지려고 해도 나아지지를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은 이젠 질릴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청년 세대를 연구하는 책은 그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 책에 바라던 건 뚜렷한 대안이고, 그래서 우리가 정치판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내가 계급 간의 이동에 실패하고, '흙수저'로 남게 되리라는 예언은 듣고 싶지 않다. 청년 세대가 앞으로 설정해야 할 방향에 대해 더 비중을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어른들로서도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좀 더 움직임이 자유로운 우리가 '국정 농단' 사태 때처럼 세상을 바꿔볼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해주면 좋겠다. 사회에 대한 불만만 터뜨리지 말고, 세상과 싸울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어주면 좋겠다. 어른들이 사회가 어떻다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온몸으로 불평등함을 느낀다.

또한 청년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연예'부분에만 관심을 쏟는 건 잠깐의 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머리를 쓰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줄어만 가는 취업률 속에서 우리는 할애할 시간이, 뇌 속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 투표가 가진 힘 이외에도, 청년 세대가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대책을 배우게 된다면, 자연스레 똘똘 뭉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지향하지만, 계기만 마련되면 신념을 위해 함께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이 책의 좋은 점을 떠올려 보자면, 몇몇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래도 저자가 '청년'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려고 했다. 뒤로 갈수록 격정적으로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청년 세대를 옹호했다. 청년 세대에 속하는 나로서도 기성세대가 이 책을 본다면 불편함을 느낄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런 종류의 책이 나올 거라면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를 두루 이해하고 아우르는 글을 적을 만한 사람이면 좋겠다. 기성세대가 분명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도 있지만, 몇몇 분야에서는 확실히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예 정치에서 물러나라고 소리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가 가진 모든 장점들을 조합해 훌륭한 대안을 내놓는 다음 저자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만 한 뉴스에서 평한 것처럼 진정 "'청년'과 '기성세대'가 모두 읽을만한 필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청년 세대는 어른들의 자리를 뺏기 위해 노력하는 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이 아주 행복한 시절을 보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신념으로 삶을 버텨낼 수 있도록, 어른들이 안락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을 우리로서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두 발을 디딜 만한 자리, 딱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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