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출신>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떠올린 건 '계급 투쟁'의 이미지였다. 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비극을 담았으리란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의 지역적 출신, 즉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독일로 도망쳐 와 이민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해 묘사한 작품이다. 현 시국에서 지역적 출신을 논하는 것이 나는 옳은 일로 느껴진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아시아인은 '출신'을 이유로 코로나19 감염자로 여겨져 차별받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인종차별 문제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에 '출신'을 근거로 한 차별과 아픔을 담은 소설 <출신>을 읽는다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유럽이나 미주 지역을 여행한 적도 없고, 국내에서도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자라왔으므로 출신이 민감한 이슈로 떠오를 이유가 없었다. 타인의 경험이나 의견이라면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받았으나, 역시 나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기란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인 경험을 읽어내는 건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겉으로만 난민과 이민자의 인권을 옹호하지 않고, 그들과 깊이 공명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타국에서 지낸다는 게 어떤 일인지는 나로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일이 틀어졌을 때 도망칠 만한 안정적인 기반이 존재했다. 전쟁으로 떠밀려와 어떻게든 타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저자의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황을 판단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언어와 문화에 관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이전 국가에서의 노력은 존중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국인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잠시 동안 생존을 보장받더라도,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생활은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향은 보스니아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돌아간다면 정신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설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탈출했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과거를 되짚는다. 그렇게 황망히 자신의 출신지를 떠나오면서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깃든 공간과 그곳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털어놓는다. 따라서 떨쳐내려고만 했던 과거와 제대로 마주하고, 더 이상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필연적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소설 쓰기라는 명분을 통해 그럴 기회를 획득한다.

출신을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도로 완전해진다.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역사가 존속될 것이다. 저자는 공간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꺼내 놓는 것으로 고향을 내팽개쳤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스스로도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면서 갖은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자신만 행운을 누렸다는 생각은 사샤 스타니시치를 꽤 괴롭혔던 듯하다. 같은 '민족'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고향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자 오래된 친구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 지구촌이라는 관념이 등장한지 무척 오래되었음에도, 지역적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출신'을 근거로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멸시받는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들은 출신적 차이에서 어떤 실존적 위협을 느끼고 있을까. 한국에도 출신이라는 경계가 아직도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계기이기도 하다. 지금의 인종차별에서 아시아인이 피해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역적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포용해 왔던가,라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역적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사샤 스타니시치의 <출신>을 읽어야 한다.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을 둘러싸고 마침내 민족 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 P133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차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락 UNLOCK - 내 안의 가능성을 깨우는 6가지 법칙
조 볼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도전이 거듭되는 동안 나는 자주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했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내 수준을 깨닫고 지레 겁먹어 그만둔 경우가 허다했다. 상대의 긍정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채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나의 시도를 큰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직장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스스로와의 싸움을 시작할 필요성을 발견했다. 나는 비난에서 개선할 여지를 찾아내고, 시련을 기회로 볼 줄 아는 시각을 획득하기 위해 <언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에 담긴 다른 위축된 자아들과 그들의 극복 경험을 마주하면서 의지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되찾았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보다 순간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락>을 읽고서야 비로소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지금의 위기와 진짜 싸워볼 힘을 낼 수 있었다. 기꺼이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협력할 준비가 이제는 되었다. 책 한 권으로 삶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언제 겪어도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의 저자인 조 볼러는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신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아이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와 교사, 그리고 개인이라는 두 방향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할 만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오랜 연구와 실제 인터뷰를 통해 검증된 이 방법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기적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인정하고, 여러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언락' 기술은 한국 학생에게도 어려운 도전 과제인 '수학' 과목을 통해 설명된다. 미국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수학이나 과학 등의 과목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처럼 여겨졌고, 평소의 삶에서 활용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보통 사람들에게서 등한시되어 왔다. 저자는 수학을 비롯한 어떤 분야에서도 자신에게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실수하며 나아갈 것을 권유한다. 개인적으로 수포자 중 한 명으로서 머리를 싸맨다고 어려운 난이도의 수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만, 내가 만약 어릴 때부터 조 볼러의 방식대로 차분하게 문제를 다각도로 해결해 나갈 기회를 제공받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격려에 고무된 나는 수포자가 된 나의 삶이 안타까웠고, 실제로 수학 문제집을 구매할 고민까지 어느새 하고 있었다. <언락>을 읽다 보면 이렇게 지금까지 포기해 버린 시간이 아까워지고, 다시 한번 배움에 대한 의욕이 솟아오른다.


<언락>에 등장하는 예시들 중 학습 수준에 따라 반을 나누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을 차단한다는 부분이 놀라웠고,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의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분반 수업이 시작되었고, 경쟁심이 심했던 나는 해당 교육 시스템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수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분명 옳은 면이 있다. 이 또한 발전주의 국가에서 효율을 중시한 결과다. 선택과 집중의 방식을 통해 아이들을 관리해 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업의 평준화가 성적 향상을 위한 동기부여에 실패할 가능성은 없는지 우려스럽다.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 방식이 한국에 통할지도 좀 의문이다. 물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지만, 즉각적으로 많은 양의 결과물을 생산해 내기 어려우므로, 부모가 교사의 방식을 인내심 있게 지켜볼지가 미지수다. <언락>에서는 개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으나, 사회적인 인식과 거대한 교육 시스템 자체가 불변한다면, 개인적인 노력이 물거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회 전체가 조 볼러의 방식에 따른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행동해 나가는 데 동의한다면, 분명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부작용이 넘쳐나던 성과주의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성장 마인드셋'을 강조하는 <언락>은 현대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아야만 한다.

만약 이것(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잘못된 믿음이고, 실은 누구나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얼마든지 전문 분야를 바꿀 수 있고, 새로운 방향으로 역량을 개발할 수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고 이를 평생 이어갈 수 있다면? 매일 뇌가 성장할 수 있다면? - P8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대신 자기에게 도움이 될 생각을 찾아 나섰다 - P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박하는 여자들
대니엘 래저린 지음, 김지현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이 책에 사로잡혔다. '반박'이라는 단어에 담긴 반항기가 작품을 읽도록 부추겼다. 반박과 여자들이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늘 본래의 질서에 반항하는 무리를 존경했다. 마음에 찬 분노와 달리 대열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늘 깨어있고, 반박할 줄 아는 한 명의 여성이자 더 나아가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고자 했다. 책의 제목으로부터 나는 전사와도 같은 여성들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보이는 무미건조한 평범함과 공감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처럼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를 발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너무 들어 그만두었다. 책을 읽는 데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도 했다. 무조건 깊이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이 책에서 멀어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을 읽으면서 상대가 공격도 하기 전에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친절함에 나는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고야 말았다. 나는 여성들을 너무 피해자와 반박하는 이의 입장에 고정시켜 놓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반박하는 여자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모든 부담감을 내려놓고 가볍게 책장을 넘기라고 조언하고 싶다. 책장이 무척 술술 넘어가는 재밌는 책인 건 확실하니까.

<반박하는 여자들> 속 작품을 읽다 보면 여성은 비교적 흔하게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상대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 때문에 비난받는다. 서슴없이 여자의 몸을 만지는 남자들을 생각해보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은 성적인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이외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별다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것처럼 작가는 묘사한다. 또한, 작품 속 여성들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타인이 내린 결정에 휩쓸려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여자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그저 타인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세상에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눈앞에 떠다니는 누군가의 유령을 조용히 떨쳐내는 여자들에게서 나는 씁쓸함을 감각한다. 사진을 찍는 일처럼(<내가 사랑하지 않은 파리의 미국 남자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텐데. 한편으로는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란 생각도 든다. 즉, 화장실에 갑자기 쳐들어와 내 목에 키스한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날리기보다 침묵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쪽이었으리란 것이다.

작가 대니엘 래저린의 작품 속에서 여자들은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애초에 감정에 지나치게 빨려 드는 것을 경계한다. 상실의 상처를 입기 전에 헤어지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수동적이고, 이성적인 면모를 보인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상대와 개선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적인 모습을 미리 제지하는 것이다. <반박하는 여자들>의 여자들은 상실의 고통을 두려워하며 처음부터 원하기를 거부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기울인다.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남녀 관계뿐 아니라 숱한 인간관계에서 지쳐 독립되고 외로운 개체가 되려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감정적인 시련을 덜어낼 수 있으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외로워야 하고, 또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니 <반박하는 여자들>에는 관계로 인해 감지되는 비좁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애정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 변덕에 따라 애정과 자유가 적절하게 주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각자가 나름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도, 어긋나는 지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결국엔 어느 때든 상대의 마음을 소중히 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반박하는 여자들>이 여성을 옹호하고, 세상에 반박하려는 책일 거라고 예측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사람 간의 관계를 고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온갖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전 작 <작은 것들의 신>이 97년도에 출간되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인도에 관한 편견이 작품에 도달하는 일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하는 그곳은 너무 혼란스럽고, 불쾌한 경험으로 가득했다. 가본 적도 없는 장소를 멋대로 규정하고,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수한 매력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만큼 성장했다. 이런 깨달음은 중국에서 잠깐의 교환학생 생활로 얻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인도에 대해 그랬듯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비하했다. 두려움을 안고 내가 진짜 그곳으로 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은 고유의 매력으로 빛났고, 외국인인 나에게 한없이 관대했다. 한국과 달리 타인의 시선에 덜 신경을 써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나는 찰나의 경험을 통해 쓸데없는 편견을 버릴 수 있었고, 오늘 <지복의 성자>가 보여주려는 인도의 불완전한 면을 어떤 과장도 없이 직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룬다티 로이가 보여준 인도는 한국의 과거와 닮아있다. 사람들을 감금시키고, 고문하는 '시라즈 영화관'의 존재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는 건, 한국이 가진 아픔을 찬찬히 훑어보는 일이다. 더 나아가, '위로받지 못한 이들에게' 바쳐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전 세계에 놓인 고립된 자들을 이젠 외면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트랜스젠더다. 그가 가진 '여성'이라는 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끌림과 어떤 열의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숱하게 약자의 위치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계에서도 <이제야 언니에게>,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이 견뎌야만 하는 차별과 폭력을 토로했다. 인도는 한국보다도 더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국가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자살하는 여성 중 약 40%가 인도인이라는 보고까지 있다(주요 원인으로 조혼과 가정폭력이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줌'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분쟁과 내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은 종종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담하도록 요구되는 탓이다. 그들은 이유 없이 잠재적인 혁명가로 분류되어 처단당하기도 한다.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이 처한 우월성을 짚어내면서도, 아룬다티 로이는 여전히 피해자에 속하는 여성의 서사를 다룬다. 가난한 부모에 의해 경제적 도구로 전락하고, 어김없이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여자들은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문장 앞에, 어떤 행위가 삽입되더라도 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무덤 가까이 가는 게, (한국에서는 흔히) 제사를 지내는 게. 여자들은 특별한 근거 없이 여러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한편으로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안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엄마'의 자격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신체적인 문제로 '안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안줌'의 반대편에 나름의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립적인 두 집단을 통해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간절함이 '엄마'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피가 섞이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이루고 충만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번 소설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특히 카슈미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과 학살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러 캐릭터와 서사는 인도의 불온전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안줌'은 세상의 변두리에 서서 낮은 시선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의 삶을 관찰한다. 또,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라는 캐릭터의 글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정점에 달한다. 인도의 잘잘못을 무자비하게 쏟아내고,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오랜 다툼 속에서 스러져간 영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복의 성자>를 탄생시켰다. 계급 간의 끔찍한 차별과 종교적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은 그러나, 사회적 갈등과 역사적 관점에서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봐도, 우리는 그저 시험을 위한 역사만을 다뤄왔을 뿐, 모든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지 못했다. 때로는 무고한 생명의 죽음에도 우선순위를 매기며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저자는 인도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이에게 숙고하고 반성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그가 찍힌 사진의 저작권 싸움을 더 오래도록 기억했다.

TV 카메라와 미디어는 선택적이고, 편집된 보도로 무자비한 전쟁에 가담했다. 억울한 이들의 고립된 슬픔을 외면하고, 대중이 냉소적이 되도록 부추겼다. 올바른 질서 확립을 위해 나서고, 국민의 편에 서야 할 정부와 경찰은 인도 전역에서 모여든 온갖 피해자의 요구와 꿈을 묵살한다. 이처럼 모두가 무관심할 때, 미디어의 기록은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공권력을 고발하고, 대중의 관심을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흥망성쇠에 있어 언론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한다.

<지복의 성자>는 슬픔으로 시작해 절정으로 치닫다가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배제되고 차별받은 사람들끼리 결합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스 우다야 제빈'이라는 미래 세대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외로운 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나 인도를 자멸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새로운 씨앗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어쩐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까지 끌어안는 진정한 포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인도뿐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에도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라는 것을 잊지 않고, 더 큰 '아자디(자유)'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야 하겠다.

▶연관 작품

<남산의 부장들> w.김충식, 폴리티쿠스 출판(주지하다시피 동명의 영화가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 w.수전 손택, 이후 출판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 P355

카슈미르는 피부가 흰 사람들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런 뒤바뀜이 끔찍한 비방에 일종의 정당성을 불어 넣었다. - P4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작가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를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 작년 12월 즈음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sns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푸시킨의 시를 발견했다. "당신을 사랑했소. 진심으로, 절실하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바랄만큼(1829)". 상대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열의가 감지되는 이 시는 책의 맨 앞장에 수록되어 있다. 길이와 관계없이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푸시킨의 연애 시를 읽고 나는 책 <눈보라>를 찾아 헤매었다. 당시에는 책이 출판되기도 전이었고, 이후에는 다른 일들에 묻혀 잊고 지내다가 3월이 되어서야 푸시킨의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시를 통해 예측했던 사랑 이야기를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본래 이 작품은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5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출간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벨킨'이란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으로, 푸시킨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새로운 '산문' 형식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푸시킨은 벨킨이 보낸 원고를 자신이 출판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도전에 관해 가졌던 두려움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적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눈보라>에 담겨있다.

푸시킨의 소설집 <눈보라>는 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의 삶에 관심을 두었던 작가답다. 그는 역참지기나 장의사처럼 지위가 낮고, 세상의 변두리에 위치한 사람들을 소재로 삼는다. 패배감과 열등감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을 질투하고, 복수하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들은 단 한 발의 총알로 자아를 부각시키고, 타인의 삶을 종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푸시킨은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기꺼이 찬양한다. '농노 아가씨'와 '귀족 아가씨'를 비교하면서, 전자만이 가진 '개성'을 추켜세운다. 이것으로 낮은 자들의 연약함과 부정적인 면모는 상쇄된다.

'운명' 또한 푸시킨의 이번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다. 소설 <눈보라>와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은 "협박""슬픈 전조"같은 눈보라가 몰아침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재결합으로 끝맺는 운명적 서사를 그려낸다. 인연과 운명의 영향은 어린 연인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역참지기>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집을 떠나간 딸이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인연의 끈을 상징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운명의 다리는 푸시킨의 소설 속에서만큼은 견고해 보였다.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짧은 시간 내에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깊고 무거운 소설을 마주하기 전에 피식 웃음이 나는 소설이 필요한 때가 있다면, 이번 작품을 읽어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