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 눈보라 휘몰아치는 밤, 뒤바뀐 사랑의 운명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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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를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 작년 12월 즈음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sns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푸시킨의 시를 발견했다. "당신을 사랑했소. 진심으로, 절실하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바랄만큼(1829)". 상대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열의가 감지되는 이 시는 책의 맨 앞장에 수록되어 있다. 길이와 관계없이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푸시킨의 연애 시를 읽고 나는 책 <눈보라>를 찾아 헤매었다. 당시에는 책이 출판되기도 전이었고, 이후에는 다른 일들에 묻혀 잊고 지내다가 3월이 되어서야 푸시킨의 소설집을 읽게 되었다. 시를 통해 예측했던 사랑 이야기를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본래 이 작품은 <벨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5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출간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벨킨'이란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으로, 푸시킨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새로운 '산문' 형식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푸시킨은 벨킨이 보낸 원고를 자신이 출판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도전에 관해 가졌던 두려움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적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눈보라>에 담겨있다.

푸시킨의 소설집 <눈보라>는 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의 삶에 관심을 두었던 작가답다. 그는 역참지기나 장의사처럼 지위가 낮고, 세상의 변두리에 위치한 사람들을 소재로 삼는다. 패배감과 열등감에 휩싸인 이들은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을 질투하고, 복수하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들은 단 한 발의 총알로 자아를 부각시키고, 타인의 삶을 종결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푸시킨은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기꺼이 찬양한다. '농노 아가씨'와 '귀족 아가씨'를 비교하면서, 전자만이 가진 '개성'을 추켜세운다. 이것으로 낮은 자들의 연약함과 부정적인 면모는 상쇄된다.

'운명' 또한 푸시킨의 이번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다. 소설 <눈보라>와 <귀족 아가씨 농노 아가씨>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은 "협박""슬픈 전조"같은 눈보라가 몰아침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재결합으로 끝맺는 운명적 서사를 그려낸다. 인연과 운명의 영향은 어린 연인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역참지기>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집을 떠나간 딸이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존재하는 인연의 끈을 상징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운명의 다리는 푸시킨의 소설 속에서만큼은 견고해 보였다.

푸시킨의 단편소설집 <눈보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짧은 시간 내에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깊고 무거운 소설을 마주하기 전에 피식 웃음이 나는 소설이 필요한 때가 있다면, 이번 작품을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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