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과 정의 -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법'은 번뜩이는 지적임과 공명정대함을 내세우는 권력이었다. 하지만, 법과 기득권의 결합이 내게 건넨 좌절은 어릴 적의 환상을 없애버리기에 충분했다. 국민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어야 할 법체계는 종종 한 시대쯤 물러서서 우리의 뒤꽁무니를 좇는다. 법전 위의 구시대적 단어로 이끌어낼 수 없는 해석의 부족으로 인해 억울하고 무고한 이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한 사회의 지성체가 결합된 책 한 권이 어째서 나조차도 당연히 여기는 것들을 밝혀내지 못해 쩔쩔매는 것일까, 불가해한 날들이 이어져왔다. 요즘은 특히나 판결이 정의라는 단어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이 한국의 법 시스템과 법조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이 책의 필요성을 절감해 왔다.

김영란 전 대법관을 떠올리면, 내가 존경해 마다않는 또 한 명의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연상된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긴즈버그 대법관은 단단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숱한 싸움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꼼꼼히 따져 묻고, 냉정하게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었다. 여러 해 동안 '감정적'이라는 단어는 '여성'들에게 달라붙어 있었지만, 긴즈버그 대법관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차별에도 발끈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판단을 읊으며 응수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마주한 긴즈버그 대법관은 그렇게 여성을 뛰어넘어 내가 좇고 싶은 하나의 빛이 되었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판례를 분석하고, 문제 제기만을 행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도모하거나 극적인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한 사건에서 어떤 의견이 오고 갔고, 끝내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독자는 여러 사건을 따라 읽으며 현 한국 사회를 되짚어보고, 더 이상 우리의 기대만큼 만능적이지 않은 '판결' 자체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한다. 결국 <판결과 정의>는 책의 본문보다 이후에 독자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논의가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판결 이후에 이어지는 제대로 된 수습과 대책 마련이 필요한 것과 결이 같다. 대한민국의 법조인뿐 아니라, 각각의 국민이 현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열띤 토론이 <판결과 정의> 이후에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별을 사랑하는 방법 100 - 매일 하나씩! 어렵지 않게 실천하는 에코 라이프
김나나 지음 / 앤의서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지구 온난화'라는 단어를 듣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건 너무도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들렸다. 그 나이 때에는 뭐든 불가해하지만, 그중에서도 '기후변화'는 현 세대 안에서 목격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것처럼. 분명히 도달하겠지만, 내가 사는 동안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이 날씨가 극도로 더워지고 나서야, 뉴스에서 무너져 내리는 얼음덩어리를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위기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선진적이고 지적인 사상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환경운동가들의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너 나 할 것 없이 스스로가 얼마나 환경을 위하고 있는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빈 수레가 내는 요란한 소리일 뿐이어서,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제는 진짜 환경을 위한 액션을 취하고 싶은 이들에게 <지구별을 사랑하는 방법 100>은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또, 코로나19 사태로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감하고 있는 시기에 이 책은 현대인의 필독서로 주목받을 만한 가치를 지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소하지만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로 비닐봉지와 일회용 컵의 사용량이 그나마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초창기에 고객과의 언쟁을 피하기 위해, 이외에도 갖은 이유로 정부의 방침에 응하지 않는 곳들도 물론 있었다. 게다가 최근의 코로나 사태로 일회용 컵은 원상 복귀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례 없는 방침으로 무언가를 깨달아 나가는 중이었다. 타의에 의해서 지구를 보호하는 일에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좀 실망스럽지만, 결국엔 유용한 행동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본격적인 환경 보호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이처럼 정부가 선생님 역할을 자처한 후에야 고작 사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므로, <지구별을 사랑하는 방법 100>과 같은 책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등장이 과연 몇 사람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래도 100가지나 되는 방법 중에 분명 하나쯤은 누군가의 마음을 동하게 할 것이다. 하나의 꾸준하게 타오르는 불씨가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이 학교에, 동네 도서관에, 사회 곳곳에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있으면 좋겠다. 무심코 열어본 책장 속에서 하나의 행동을 시작하고, 부지불식간에 지구별 지킴이로 자리 잡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모든 준비생들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해낼 사람들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작가의 말 중에서)."

꼭 암만 봐도 험해 보이는 길만을 골라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지만, 그놈의 밥을 빌어먹지 못해 갖은 고생을 한다.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서야 겨우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예술인으로서의 삶은 고달프지만, 또 그만큼 매력적이어서 거기에 투신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서 있다. 그리고 나도 늘 가시밭길 위를 헤매고 싶어 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서 일 인분을 해내지 못해 우울감을 느끼면서도, 예술에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려는 이들의 버둥거림과 벗어날 수 없는 우울의 그림자는 내가 겪어본 일이기도 했으니 나는 이 책을 허구로만 생각하지 못했다. 내 과거를 제3자의 시선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또 때로는 견디지 못하고 울고 웃으면서 읽어냈다. 예술이라는 꿈을 놓지 못한 이가 아니더라도, <GV 빌런 고태경>은 부단히도 기회를 찾아 헤매는 청춘을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 공무원과 유튜버를 권유하는 어머니와 도무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꿈에 대한 집착은 내 삶과의 접점이다. 나와 여러모로 닮아 있는 소설을 참 적절한 때에 마주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불신하면서도 차마 놓지 못했던 꿈을 실현시킬 단 하나의 찬스를 만나게 될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을 선사해 준 각별한 작품이다.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지. 진정으로 응원해 주고 지켜봐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217p)"

예술이든, 이외의 어떤 분야에 도전하고 있든 간에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는 고달프다. 적지 않은 경우에 준비라는 것이 음지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축축하던 그 시기를 글을 쓰며 버텨냈다. 책을 읽고 짧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기도 했다. 아니,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근근이 삶을 버티게 하는 요소다. 그게 내가 가진 두루뭉술한 꿈이기도 때문인 것도 있지만, 글을 통해 내 존재를 인식해 주는 어떤 이들이 내 삶의 터보 엔진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깊은 울림을 주고, 나의 허접한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지도록 도와주었다. 사회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고, 내 몫을 해낼 수 있도록 북돋워 주었다.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고, 좋아하는 일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위치로까지의 도약을 꿈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예된 삶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모든 준비생들을 떠올려 본다. 꿈꾸던 그 순간을 정말로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허황된 위로는 건넬 수가 없다. 내 스스로도 그 시기를 만났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선택 아마추어'들이 실패를 감내하며, 무언가를 아끼는 우직한 마음과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도 나만큼 '고태경' 씨의 끈질긴 삶에 위안을 얻게 되길 바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세상을 샅샅이 뒤져내 최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야한다고 늘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뿌리를 가진 고려인들의 슬픔을 담은 이 작품이 반갑다. 작품을 통해 그들의 비극을 명확히 인지하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문학초점, 그리고 촌평 파트에 선정된 적지 않은 작품 목록 중에서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단박에 골라내었다. 이 작품에 유독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은 정세랑 작가의 이전 작품 <지구에서 한아뿐>을 아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소리를 내어주겠다는 어마무시한 선언이 내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어째서 그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성대의 떨림을 통해 누군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많은 경우에 스스로의 몫을 확보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자발적으로 박탈당하겠다는 것이 의아했고, 우려스러웠다. 그게 내가 다른 작품을 제치고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가장 먼저 읽게 된 이유다.

정세랑 월드의 매력 속으로,

작가 정세랑의 글은 매 문장마다 자기주장이 확고하다. 작가가 누군지 명시되지 않더라도, 그의 글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바깥 세계의 현실적이고 복잡다단한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일은 뒤로 밀려난다. SF 소설 형식을 빌려 마치 초등학교 시절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에서 그리던 그림처럼 색다른 세계를 조성하고, 누군가를, 혹은 더 나아가 이 지구를 사랑하는 일을 더 부지런히 해낸다. 문장에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감지해 냈다면, 그건 정세랑 작가의 글이 분명하다. 이전 작 <지구에서 한아뿐>도 넘치는 다정함으로 독자들의 피드를 휩쓸었다. 아, 그는 독자에게 지구가 직면한 위기를 일깨우는 일에도 여념이 없다. 작품을 읽다 보면 나의 사소한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뜨악해지고, 지구에 엎지른 물을 주섬주섬 주워 담고 싶어진다. 때로는 과격한 방식으로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데(예를 들어 <리셋>에서 거대 지렁이가 지구를 갈아엎는 방식으로), 그것이 임박한 위기라는 점은 자명하므로 또 한 번 섬뜩함을 느낀다. 그의 종말 시나리오가 실현 가능한 종류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정세랑 작가의 글은 그날 하루라도 텀블러와 에코백을 챙기게 만드는 유효한 충격요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세랑 식 낙관적 시선이나 전망, 인간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쉽사리 동의되지 않는 까닭이지요. 잘 될 거라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국면도 좀 더 그려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계간지 창작과 비평, 316면)."

한편으로, 이번 좌담에 초대된 이근화 시인은 정세랑 월드에 관해 위와 같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워낙에 탄탄한 팬층을 자랑하는 작가이지만 시인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다. 작가 정세랑은 인간의 횡포를 경계하면서도, 사람에게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끝끝내 세상을 소생시킬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문제에 관해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좀 더 머리를 쥐어 싸매면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 내고 싶은 욕구가 해결되지 못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월간 채널예스' 2월호에서 작가는 가볍게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다짐을 전달했다. 이미 생각의 포화가 수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삶 속에서 자신마저 고민을 보태고 싶지 않다는 명확한 의사를 전달한 바 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사랑스러운 필력에 크게 힘입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이와 같은 행보에 동의를 표한다. 어쩌면 불가피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인간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애정을 정세랑 작가가 아주 오래도록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어느 행성에서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