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는 정답을 보여주는 이가 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읽은 것을 제안하는 사람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95면).˝
나는 항상 외국어를 배우는 일을 좋아했다. 사실 어떤 언어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그것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때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외국어를 파고 들었고, 그로 인해 어머니를 무척 화나게 만들었다. 다양한 언어를 아주 조금씩 익히는 일은 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국어를 발음하고, 그것으로 적힌 문장들을 읽어내려 갈 때마다 느껴지는 희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언어에 집착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번역가‘ 밖에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결국엔 되지 못했지만(물론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는 없다.), 나에겐 번역가라는 직업이 특별하고 그들과 어떤 연대감마저 느낀다. 번역가를 꿈꾸던 시절에 그들에 관한 글을 정말 닳도록 읽었는데, 이번 악스트에서도 번역가들의 에세이를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글자 이외에 사람들 간의 보편적인 언어와 특정 국가의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강조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쉼 없이 주억거렸다. 언어의 바탕에 깔린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내가 하나의 외국어를 영영 정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막연하게 감지하도록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번역가들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은 김승욱 번역가의 것이었다. 그는 몇몇 세계문학전집을 비교 제시하면서 나에게 익숙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번역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원문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번역에 새삼 놀라워했다. 번역된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멍청하다는 느낌을 지우려고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반복해 읽던 기억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모든 언어에 통달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원문을 읽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좋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하지만 역시 미숙한 실력으로 원서를 읽는 데에는 많은 품이 들기 때문에 자꾸만 그 일을 미루게 된다.
˝나는 <인터스텔라>나 <인셉션> 같은 영화보다 ‘생기는 대로 낳아서 키웠다.‘는 어른들의 말을 더 이해할 수가 없다(141면, 「피스」 w. 최진영).˝
올해 가장 기대했던 소설집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악스트의 매력이었다. 그 책을 사야지, 하는 말만 수백 번 반복하다가 악스트에서 만나니 더없이 반가웠다. 앞으로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질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무척 기대된다. 이번 호의 첫 번째 주자는 손보미, 최진영, 강화길 작가였다. 그녀들은 세상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서사가 여성의 죽음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몽땅 죽이는 방법‘밖에 모르는 여성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상에 ˝더 많이 분노하고 많은 원한을 느끼게 되기를, 자기 자신의 뼛속 깊이 새겨진 고통과 모멸감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를,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다(137면, 「이전의 여자, 이후의 여자」 w. 손보미).˝ 하지만 여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녀의 화살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향한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그것마저 감내하기로 약속했다는 듯이 엄마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여성에게 어머니는 ˝너무 미워하지 마(171면, 「산책」 w. 강화길).˝라는 부탁을 남긴다. 이런 세대 간, 또한 종종 같은 성(性) 안에서도 존재하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의 연대는 여전히 가능하다. 우리는 한 개인에게 벌어진 일이 특정한 누군가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이해하고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서사에는 차별과 배제가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 Axt 31호를 읽으면 분명 추가하게 될 구매목록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w. 강화길, 손보미, 임솔아, 지혜, 천희란, 최영건, 최진영, 허희정/ 은행나무 출판
<나보코프 문학 강의> w.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김승욱 옮김/ 문학동네 출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