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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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작품들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 강의라니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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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성 직업인의 경험을 귀담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직장에 몸담고 있는 여성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부모 세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과 육아로 인한 퇴직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회고록은 여성 직업인에 대한 우리의 절박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녀는 종군기자로서 숱한 위험에 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녀는 사진을 찍는 자신의 일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에 집요한 열정을 쏟는 사람 중에서도 ‘린지 아다리오‘는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분쟁지역에서 극도의 공포와 공황상태를 겪고 난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을 보였고, 더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어 그 지역들이 가진 부조리와 인권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자 했다. 자신을 몰아세워 가며 살아온 그녀의 생애로 인해 우리는 여성으로서, 또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내가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 했던 모든 일들을 그리워했다. 심지어 이전에는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이를테면 자유라든가. (95쪽)

분쟁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수 주간 집을 떠나있는 경험은 ‘린지 아다리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종군기자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직업이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동료들의 비보를 접하면서 ‘린지 아다리오‘는 현재의 평화로운 삶을 소중히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삶이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의 생활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꽤나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지구 한 쪽에서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토록 사치스러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직업과 사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된 직업과 일상 사이의 고리는 ‘린지 아다리오‘가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면서 사진을 찍도록 부추겼다. ‘폴‘이나 아들 ‘루카스‘ 등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만 하는 시간들,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죽음들, 그리고 직업과 일상 사이의 불균형 등으로 그녀는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지만, 절대 그만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열정을 갖고 있는 일을 통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때에 알맞은 장소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린지 아다리오‘가 자신의 젊음을 온통 쏟아부었던 사진 찍기는 결국 그녀가 원하는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남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전쟁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녀 본인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을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미래 세대의 열정이 존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사소한 변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보다 더 안전하고 쉬운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종군기자 ‘린지 아다리오‘의 선택이고, 일상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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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길에 난데없이 두 명의 인물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나타난다.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일까.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 그들은 어떤 것에 대해 사고를 하기보다는 뒤죽박죽 섞인 말들을 내뱉음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페이지는 휙휙 넘어가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초점이 없으므로 독자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사이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번번이 이어지는 망각 속에서 제대로 된 결말도 없이 줄기차게 반복되는 대화의 진행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이 난사되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도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 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에 물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음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164쪽)˝

그런 그들에게도 딱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존재한다. 책의 제목처럼 그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1막과 2막의 이틀 밤 동안 ‘고도‘를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한 소년만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찾아올 뿐이다. 우리가 본 건 두 번의 헛걸음뿐이지만, 사실 이 기다림이 언제부터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고도‘가 누구인지 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혹시라도 ‘고도‘가 올까 봐 제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맹목적으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고도‘란 누구일까. 아니,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우리는 영영 얻을 수 없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가 구원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에스트라공‘의 대사처럼 그들은 모래밭 한가운데서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 묻혀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온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 척박한 삶이 어디에서 기인했고 어떻게 해야만 또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는 가운데서 ‘고도‘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희망을 저버리면 나무에다 목을 매는 길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164쪽)˝

이 시대의 청년들은 이전보다 더 질이 낮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상황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으니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뿐만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고도‘를 기다리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고도‘를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포조‘를 통해 ˝우리 시대가 나쁘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우리 시대라고 해서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말이오.(51쪽)˝라고 전한다. ‘고도‘는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누군가이자 무엇이었고, ‘고도‘가 나타나는 완벽한 현재를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도래하지 않을 ‘고도‘를 기다려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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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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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 작가 'G'와 10대 여자아이 'V'의 관계는 한 아이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탄생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부모 사이의 반복되는 다툼이다. 침대 위에서 귀를 틀어막고 있는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부모의 싸움은 계속된다. 부모 간 전쟁의 끝에서 아이는 아버지를 잃었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사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마치 영원처럼 기다려 보지만, 아이는 끝끝내 아버지를 되찾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애정 하는 문단에 몸담고 있는 'G'를 데려와 아버지의 공백을 채운다. 소아 성애자인 'G'가 떠올리는 건 오로지 자신의 성적인 욕구와 글쓰기뿐이다. 'V'가 이 관계로 인해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게 될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G'를 보면서 소설 밖 우리의 분노는 들끓는다. 아이가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탓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부모다. 아버지가 없다면, 그럼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V'의 어머니는 'G'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딸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다. 20살에 출산을 하고, 줄곧 남편의 폭력 속에서 살아온 'V'의 어머니는 'G'가 진심으로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소아 성애자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V'에게 버림받은 'G'는 어느새 '가여운 사람'이 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듣는다면 어머니의 무지함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 하나만 소아 성애를 정당하게 본 것이 아니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유명한 문인들이 한 데 모여 서명을 하고, 소위 지식인들에 의해 세상은 빠르게 납득되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식이 결여된 세상에서 'V'는 구원될 기회를 잃고, 'G'의 '공모자'로 낙인찍힌다. 거대한 사회 시스템마저 아이의 양육을 포기했으니 아이는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가면을 써가며 부단히도 애를 써 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앞에서 수많은 루머를 생산하고 또 재생산한다. 성적 만족보다는 애정을 갈구하는 몸짓을 보이는 청소년들이 자기 신체와 성적 욕망에 대해 성인만큼 이해하고 있다고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 'G'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얼마 못가 시들시들해진다. 어린 'V'에 비하면 'G'는 약삭빠르고 자신의 결점을 변호할 능력이 뛰어나며 사람들이 쉽게 망각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G'는 'V'를 궁지에 몰아넣은 채로 숱한 팬을 거느리고, 작가로서 유명세를 떨친다.

'G'라는 이름의 작가를 비롯해 문단 전체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쓰인 《동의》는 소설 밖 독자에게도 비난을 가한다. 'G'의 글들이 흥미로운 단어들로 엮인 문학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간주될 때 'V'의 삶은 점진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텍스트들을 읽어 나가고 있었는지를 다시금 점검하고, 또 다른 증언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지를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동의》는 곳곳에서 새로운 증언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는 이때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유년기, 청소년기, 그에 대한 아무런 향수도 없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채 자신을 내려다 보며 위에서 떠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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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반양장)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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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절대악을 경계하고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꼭 읽어야만 하는 정치 사상서이기 때문에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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